15살 생일이 지나면서 단증이 나왔다. 지금까지 품띠였는데 검은 띠를 허리에 매니 쑥스러우면서 우쭐해졌다. 공인 2단이다.
“재석아.”
“네. 사범님.”
“새벽타임 한번 지도해 보지 않을래? 차비 정도 챙겨줄게..”
“네? 4단 따야 하는 거 아니에요?”
“2단이면, 보조사범으로 문제없어..5시부터 7시까지 두반인데..아침잠이 많아?”
“.......그건 아닌데...자신이 없어서요..얼마 주는데요?”
“음..네 도장비 면제에 매달 20만원씩.”
“....엄마랑 상의 해볼게요..”
“그래.”
한 달에 엄마에게 받는 돈이 150만원이었다. 학원비로 100만 원 정도가 들었고, 저녁 식사비와 차비, 책값과 용돈까지 포함된 금액이 50만원이었다. 그런 액수에 비해 20만원은 작은 금액이었지만 내가 노력해서 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에게 선물이라도 하거나 이번처럼 놀러갈 기회가 왔을 때 내 돈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았다. 더불어 엄마랑 이야기해서 지금 다니는 학원들도 좀 정리를 했으면 했다. 태권도. 피아노. 영어회화. 보습학원 중에서 태권도를 새벽으로 옮기면 중간에 시간이 떠버린다. 그리고 피아노를 전공 할 것도 아닌데 계속 학원에 다니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치려면, 학원을 다닐게 아니라 실력과 지명도 있는 선생님께 개인 레슨을 받아야 했고, 전문적으로 나갈 생각도 없다. 영어회화도 유치원 때부터 했던 거라 외국인 선생님과 말장난 하다 오는 것 밖에 안돼서 그만 다녀도 될 거 같았다. 보습학원은 이미 3학년 과정까지 진도가 끝이 났다. 계속 나가봐야 복습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닐만한 것이 없네? 나..혹시..천재?’
지금 5시 반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잔다면 4시 반에 일어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러면 학교 끝나고 집에서 엄마랑 보낼 수 있을 텐데, 하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엄마. 저 드릴 말이 있어요..”
“그래? 뭔데...”
저녁에 음료수 한잔을 챙겨 주시곤 방에 들어가려는 엄마를 잡고 사범님의 제안과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건..너 하고 싶은 데로 해..난..너..믿으니까..”
“네..그럴게요. 엄마 실망시켜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주무세요?”
“........안 들어오셨어..”
“.......”
엄마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따라 오셨다. 엄마를 침대에 앉히고 욕실로 가서 양치와 샤워를 하고 돌아왔다. 엄마가 없었다.
“..................”
딱.
실망감에 침대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신다. 엄마의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똘똘이가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엄마에게서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엄마도 씻고 오셨던 것이다. 촉촉한 머릿결이 볼을 스치고, 민트향 가득 품은 입술이 얼굴을 덮쳤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엄마의 몸과 완전히 포개졌다.
“일찍..자야지...”
“그럴게요..”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다. 4시 30분이다. 한숨도 못 잤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장에 나가 어떻게 하는지 견학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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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석이에게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조언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건강하고 좋았지만 태권도를 다니는 줄 몰랐다. 얼마 전에 피아노 치는 것을 봤지만 아직도 다니는 줄 몰랐다. 공부를 잘하는지도 오늘 들었고 당연히 회화나 보습학원도 다니는 줄은 몰랐다.
‘전부..내가 데려가 끊어 줬을 텐데...’
모른 게 아니다. 듣고 잊어먹은 것이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에 지수엄마가 이야기 했던 과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재석이 학원비로 나가는 돈이 대략 100만원 내외였다. 연주 족집게 학원비가 그 정도였기 때문에 과외비도 그 정도일거 같았다.
딩동~
“어? 어쩐 일이야?”
“응..어제 이야기 마저 하려고..”
지수엄마와 혁재엄마였다. 국화차 한잔씩을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보통 손님이면 거실로 갔겠지만 다들 주부라서 그런지 식탁을 더 편안해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선생님이 일단 애들을 만나보고 싶데. 여러 명같이 하는 것은 처음이라 애들 실력도 보고 결정하면 안 되냐고.."
"나도 참.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고요..호호.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 믿음이 가서 꼭 시키고 싶은데..“
“그래? 지수 과외비는 얼마나 드려?”
“50만원이요. 주 5일 두 시간씩에 그 정도면 비싼 거 아니에요. 그지 혁재엄마?”
“그럼요.”
“알았어..”
토요일. 점심을 먹은 후 재석이와 시내로 나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따듯한 오후를 같이 다녔을 뿐이다. 재석이랑 같이 다니면 좋은 것이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과 무슨 이야기든 재미있게 들어준다는 것이다. 잡은 손은 든든하면서도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남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충고를 하기도 하고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귀찮아한다. 재석이는 어려서 그렇겠지만 충고나 비판을 하지 않고 열심히 들어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다소 속상했던 것들은 마음이 풀리고, 어렵던 문제라도 말하면서 답을 찾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저번에 갔었던 식당을 보며 나를 위해 쳐줬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그래서 재석이를 데리고 악기점에 갔다. 피아노를 사줄 생각이었다. 매달 지출에서 50만원이 줄었기 때문에 할부로 하면 괜찮은 피아노를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아노 가격이야 천차만별이었지만 가능한 비싸고 좋은 걸로 사주고 싶었는데, 재석이는 전자피아노를 갖고 싶어 했다.
“소리도 다양하고, 헤드폰 끼면 아무 때나 칠 수 있어서 좋아요. 피아노는 옆집에 피해를 주니까..마음대로 못해서 불편해요..”
항상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이 예쁘다. 가격도 피아노보다 저렴해 할부로 안 해도 가능할 정도였고 바로 가지고 올수도 있었다. 집에 와서는 나를 앉혀놓고 두 시간 동안 연주도 해주고 노래도 불러줬다.
“I love you~사랑한다는 이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네요~ I love you~ 의미 없는 말이 되었지만~ 사랑~해요~”
잔잔한 음악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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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딩동~
“안녕하세요. 엄마가 가보라고 하셔서 왔는데...”
“응. 어서 들어와..”
지수엄마는 알고 있었지만 집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안에는 지수와 지선이도 있었지만, 모르는 누나와 형도 있었다. 나와 지수 지선이는 관계가 이상했다. 둘 다 유치원 동기들로, 지수와는 단짝이었다. 지수가 졸업하고 지선이가 왔을 때, 나와 지수는 지선이에게 오빠라고 하라고 시켰고, 지선이는 일 년 동안 그렇게 불렀다. 그러던 것이 초등 학교 때 같은 반이 되면서 반말을 한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지수는 진짜 오랜만이다. 이제 제법 숙녀 티가 나는데?”
“어머~ 얘 좀 봐~ 예전부터 숙녀였는데~”
“언니. 그쯤하고 소개부터 하지?”
“참! 호호. 선생님. 이애는 유치원때 단짝 재석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소개가 끝났는지 나만 소개를 했다. 나는 그냥 머리를 45도 숙여 태권도식 인사를 했다. 태권도식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비굴하지 않게, 오만하지 않게, 딱 그 정도 인사였다.
“그래..반갑고..우선..지수와 혁재, 지선이와 재석이 이렇게 앉아..”
처음 보는 남자애가 혁재인 모양이다. 키가 나랑 비슷한 160~170사이로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그런 애였다. 우리중 제일 키가 큰 사람은 선생님이라는 누나였다. 허리가 어찌나 날씬한지 사람이라기보다 마네킹 같았다.
“자 이거 받아서 풀어봐..”
지수와 남자애가 같은 문제를 받고, 나와 지선이가 같은 문제인 걸로 봐서 남자애는 고1인 모양이다. 문제지를 받아보니 1번부터 10번까지 난이도가 균등한 것이 제법 정성을 들인 표시가 났다.
시험은 국어, 영어, 수학, 3가지를 봤는데, 보습학원에서도 이미 중3까지의 진도가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누나가 시험지를 들고 나간사이 우리들은 지수 엄마가 주신 음료수와 과일을 먹고 가볍게 이야기를 했다.
“만날 학원 다닌다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응..이번 달까지만 다니려고..”
“난...고1인데..넌 몇 학년이니?”
“중2요.”
지수와 지선이 둘에게 친구처럼 대하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지만, 지수도 굳이 나에게 누나라고 하지 않았고, 나도 그냥 친구라는 생각에 별 문제 없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나는 혁재형이라고 해.”
“네. 그럴게요. 혁재형..”
“지수한테도 누나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
“..........지수...누나?”
“아휴~ 징그럽다. 난 그냥 지금처럼..”
“...........”
“지수랑은 친구니까..그럼 앞으로 지선이가 나에게 오빠라고 해.”
“뭐야~ 말도 안 돼. 흥. 그렇게는 절대로 못해!!”
지수와 지선이가 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빛이 제법 사나웠다. 어쩌면 나가서 한판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수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지수에게 반말하면 달려드는 녀석이 1년에 한두 명은 꼭 있었다. 그리고 10살 때 이후 그런 애들에게 얻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나가서 볼일 보고, 재석이는 이것들도 풀어볼래?”
“네..”
대충 훑어보니 고1과정 인거 같다. 몇 개는 아는 것을 머리 굴려 맞췄는데, 몇 개는 도통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르면 모르는 데로 적당히 답을 썼다. 그러니 오히려 더 금방 끝났다.
“..........”
누나는 좀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다. 누나는 지수엄마에게 이야기 하고, 지수어마는 우리엄마와 혁재엄마를 불렀다. 얼마 후 우리는 한자리에 전부 모여 누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전부 오시라고 한 것은 제가 결정하기 어려워서요. 처음에는 고1애들과 중2애들, 이렇게 두 팀으로 운영하면 되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했어요. 그 점 사과드릴게요.”
“...........”
엄마들은 무척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과외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었다. 우리엄마야 원래 표정에 변화가 드물었다.
“현재 지수는 제가 그동안 고1과정까지는 전부 띄었어요. 그건 아실 테고, 혁재는....고1수준..정도 되요..재석이가 중학교 과정은 전부 끝냈네요. 지수도 중3수준은 되고요. 그러니까..전부 수준이 달라서...어떻게 해야 할지..”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고 싶으신데요?”
“만약 4명을 전부 맡는다면, 지수는 고2진도를 나가고요. 혁재랑 재석이가 한팀으로 고1 과정을 하고, 지선이는 중3과정에 맞춰 나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제 친구 중 한명을 같이 해서 둘이 3팀을 운영하면 어떨까 해요.”
혁재 엄마와 지선이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누나가 조심해서 말을 하기는 했지만, 혁재형 수준이 지수보다 떨어지고, 중2인 나랑 비슷하다는 이야기였다. 지선이 경우 자기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결과적으로 4명중 가장 실력이 떨어져 같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물론, 애들이랑 어머니가 좋으시다면요..”
“...............”
애들이야 어떻던, 엄마들은 전부 동의했다.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수업을 맞춘다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과외를 시킬 바에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이 믿음도 가고 마음에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그렇게 해주세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과외비는 짧게 언급되고, 시간은 우리와 상의해서 정하고, 장소는 3집이 돌아가면서 제공하기로 했다. 그래서 학교 끝나고 오후에는 엄마와 지내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게 되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7월부터 시작한 과외는 기말고사를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돈을 받고 가르치는 이상 눈에 보이는 성과 위주가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진도가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태권도와 피아노는 조금 성장한 기분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새벽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다 보니 스스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무심히 지나갔던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나 새벽반은 전부 어른들이라서 그들의 깊은 사고는 오히려 그들에게 배웠다. 저녁에 한두 곡이라도 피아노를 쳤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내 등에 등을 대고 기대서 들으신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는 것의 기쁨을 몰랐다. 처음 엄마에게 피아노를 들려 줄때도, 음악을 들려준 것이 아니라 이만큼 칠 수 있다는 음악 실력을 들려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쁨은 없었다.
저녁은 엄마와 둘이 먹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와 함께 음식을 준비한다. 처음 한두 번은 공부하라고 말리셨지만, 지금은 같이 인터넷이나 요리책을 찾아보며 새로운 음식도 도전하곤 했다.
날씨가 조금씩 무더워지다가 찌는 듯 한 더위로 바뀌면서 방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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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요즘..아빠..”
“응...”
이제는 현주도 느낄 정도로 남편이 변했는지, 현주가 그만큼 어른이 되었는지 어둡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순간, 나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잠깐 동안 생각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오래됐는걸..”
“재석이 이후에도 계속?”
“..........가끔씩...”
“이제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이네, 엄마는...”
“그건..그래..”
어느새 딸애가 커서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랜 세월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었다. 다만, 딸애는 좀 늦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휴가 때 여행이라도 갈까?”
“으응?”
사실은 재석이랑 이미 여행갈 계획을 다 짜 놓았다. 요즘 인기 있는 발리에 갈려고 예약까지 다 했다. 딸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딸애가 휴가 때 같이 여행가자고 말하니 우리끼리 가려고 한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너도 애인이랑 가고 싶지 늙은 엄마랑 가고 싶겠어?”
“엄마는~ 엄마가 뭐 늙었다고 그래..”
그건 사실이다. 아직 늙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애인이랑 가고 싶은 거다. 이 눈치 없는 것아.
“연주는?”
“연주가 좋다고 하면 같이 가고..엄마는 재석이랑 여행가는 건 싫어? 전에 제주도도 갔다 왔잖아?”
재석이야 항상 마음속에 있으니, 당연히 같이 가는 거다. 그래서 연주만 물어 봤는데, 현주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오해하고 있어 주기를 바란다.
“으응.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넷이 가자고?”
“아빠에겐 한번 말은 해볼까 하는데...같이 가신다면..다시 가정으로 돌아 오실지도 모르잖아..엄만 싫어?”
“...........너의 아빠는...사실...휴...너 알아서 해..”
“응.”
“언제, 어디로 가려고?”
“음...7월 말에 일주일정도로...발리 어때? 요즘 한창 뜨는 곳이라는데..”
“발리? 예약 안 될 텐데?”
“어떻게 알아?”
“으응..나도 알아는...봤어...”
현주는 남편이 단순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딴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받아 주리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주는 아빠도 멀리 갔지만 엄마 역시 돌아오지 못 할 만큼 멀리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문득 현주와 연주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나에게는 재석이가 남이었지만, 현주나 연주는 비록 반뿐이라고 해도 피가 섞인 가족이었다. 현주가 나의 올케언니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그런데도 재석이가 좋으니 문제다.
“오늘 애들에게 한번 의견을 물어볼게..아빠는 내가 나중에 따로..”
“알아서 해..”
현주의 생각대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갑자기 취소한 표나 한두 장 나올까 비행기 표가 없다. 예약을 취소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것이 문제였다.
방학이라 전부 모여 저녁을 먹었다. 현주는 나에게 눈짓으로 의견을 물었고, 나는 모르는 척했다.
“저기 있잖아..”
“..................”
“이번에 가족끼리 발리로 여행을 갈까 하는데..시간 어때?”
“언제?”
연주는 반가와 한다. 아직 2학년이니 마음에 여유는 있는데, 벌써부터 입시에 시달리는 것도 불쌍했다. 재석이는 놀라서 나를 본다. 미리 이야기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지 가로저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다 그것을 재석이가 어떻게 해석할지도 몰라서였다.
“이번 달 말쯤 해서..일주일간 발리에 갈까 하는데..”
“표..없을 텐데..”
“어? 엄마도 그렇게 이야기 하던데..너도 알아봤냐?”
“으응...친구들이..하는 이야기..들었어..”
“그래? 아까 여행사 다니는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봤는데. 구해줄 수 있데..어때. 생각 있어?”
“난 좋아. 찬성~”
“엄마..생각은..어때요?”
“엄마도 좋다고 하셨어.”
재석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럼..뭐...”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한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응...”
딸들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남편만은 제발 가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같이 있는 것이 역겨웠고, 딸들을 생각하면 행복한척 해야 했고, 재석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정말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남편이랑 애인이랑 같이 여행을 간다는 것은.
“아빠는...바쁘시니까...너무 강요하지는 마..”
“아빠는 너무해. 그지 엄마~”
“네..그럴게요..”
새벽에 도장에 갔다 아침을 먹고 나갈 사람들 나가고 나면 엄마와 둘이 남는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시간이 많아서는 곤란했다. 특히 엄마와 나는 35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있다. 그래서 구청에서 하는 문예 강좌 중 댄스교실에 가입했다. 차차차, 이름이 좀 이상한데 춤 이름이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시간 반뿐이지만, 매일 엄마와 손을 잡고 스텝을 밟으면 한두 시간 금방 갔다. 이게 은근히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고 평소 안 쓰는 근육을 사용하는지라 나중에는 땀으로 흠뻑 젖는다. 엄마의 경우 처음 며칠은 온몸에 파스로 도배를 하시고도 일어나거나 앉을 때마다 ‘아야 아야’소리를 달고 다녔다.
엄마는 갈수록 아름다워지셨고, 어려 지셨다. 구청에서 하는 여러 강의들은 대부분 주부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댄스교실 역시 아줌마뿐이다. 16명 중 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강사를 포함해 나뿐이었다. 집에서의 연습은 엄마랑 하지만, 강사가 나를 교보재로 썼고, 아줌마들도 한 번씩은 같이 춰보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교실에서는 엄마랑 거의 출 기회가 없다. 내가 다른 아줌마들과 추는 모습을 보면 엄마는 때때로 입술을 삐죽거리는데 그 모습이 진짜 귀엽다.
엄마와의 관계변화는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엄마나 아버지, 누나들 같이 항상 주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선 의외로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 바라는 것이 있듯 아버지에게도 바라는 것이 있다. 주말이면 놀러가서 같이 사진을 찍는다던가. 무등을 태워준다던가. 고민을 들어 주는 그런 것들이다. 아버지는 아무도 웃지 않는 외식이나, 가끔씩 엄마 모르게 용돈을 주시는 것으로 그런 것들을 대신한다. 그건 아버지 잘못은 아니다. 아버지는 매일 늦게 오시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못 들어오실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나머지 식구들이 먹고 살면서 공부도 한다. 그러니 아버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배웠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웃지를 않으셨을까? 엄마의 이유는 알았다. 엄마의 항아리는 비어 있었다. 그 항아리가 비어진 이유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퍼 줬지만 아버지에게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아리가 비었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엄마의 항아리를 채워주지 않은 것인가? 만약 아버지가 엄마의 항아리를 채워줬다면 엄마는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엄마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엄마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잘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엄마와 사랑을 하게 된 원인도 이유도 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우리 아버지보다 잘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버릴 수는 없다. 아버지는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몰라도 만나서 뭔가 하기는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런데 뭐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집합 X에서 입력 값을 받고 집합 Y의 원소를 출력으로 내놓는 함수 f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관계야. X의 모든 원소 x에 대해 x f y인 원소 y가 Y에 반드시 존재해. f(x)=y이고 f(x)=z이면, y = z이야.”
일주일에 국어 하루, 영어 이틀, 수학 이틀을 했고, 국어와 영어는 저번에 봤던 누나, 상미누나가 봐줬고, 수학은 상미누나 친구인 슬기누나가 가르쳐준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하는 날이었고, 나와 혁재형은 내방에서, 지수와 지선이는 누나 방에서 수업을 했다.
“그럼, 먼저 3분 줄게. 이 문제 풀어봐.”
혁재형은 과외 말고도 따로 단과학원에서 정석이나 기본성문 같은 것들을 공부한다고 하는데, 괜히 나에게 라이벌 의식 같이 귀찮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경쟁심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문제들을 곧잘 풀었다.
“그래..잘했어. 원리는 알겠지?”
“네..”
“그럼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풀어오고, 1차 함수 100문제, 2차 함수 100문제. 문제를 만들고, 풀어와. 문제집에서 베끼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서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 알았지?”
“너무 많아요.”
“네..”
“재석이는 아무 말 안하는데, 형이 되가지고 너무 엄살 피우는 거 아냐? 방학이니까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네...”
“수고하셨어요. 누나.”
정리해서 거실로 나오니 슬기 누나가 안가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혁재형은 지수와 지선이 신발을 보고는 나가려다가 말고 누나 옆 자리에 앉는다. 매번 그런 식이라 혁재형이 지수나 지선이 둘 중에 하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눈치 챘다.
“상미 누나는 아직 안 끝났어요?”
“응.”
손님들이 안가고 있으니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엄마 찾아 안방과 욕실, 부엌을 돌아다녔다. 없었다.
“누나. 날씨도 더운데 수영장 한번 가요.~”
“응?”
“캐리비안 해적마을, 한번 가요. 네?”
“글새...다른 애들 생각도 들어 보고..”
엄마를 찾아다니는 동안 거실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갔고, 누나 방이 열리면서 상미누나와 애들이 나왔다. 다들 공부에 지친 표정이었다. 지선이가 나오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찬성을 했다.
“그래요. 선생님. 한번 가요. 우리..”
털겅.
“어머? 끝났니? 점심 먹고들 가. 드시고 가세요. 선생님..”
엄마는 시장이라도 봐 오시는 듯 양손 가득 비닐 봉투를 들고 들어오셨다. 얼른 가서 받아 주방으로 옮겼다.
“내가 너희들 엄마에게는 전화 했으니까. 먹고들 가. 선생님도 드시고 가세요~”
“그럼..그럴게요. 어머니.”
엄마가 두 번 연속해서 권하자 다들 일어났다가 어정쩡하게 앉는다. 나는 주방에서 엄마가 사온 재료들을 꺼내 싱크대 위에서 분류했다. 재료를 보니 낙지볶음이나 전골을 생각하시는 듯 했다. 낚지를 바가지에 옮겨 담고 굵은 소금을 뿌려 박박 닦았다.
“너도 가서 같이 있어. 엄마가 할게..”
“별로...할 이야기도 없는데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냐.”
“그럼 이것만 할게요.”
낙지 머리를 뒤집어 내장을 꺼내고 먹물주머니를 뜯어냈다. 그 주머니를 터트려 엄마 손에 묻히니 엄마도 예전 생각이 나시는지 매롱을 하신다.
“재석아~ 이번 토요일에 케리비안 해적마을 갈건 데. 너도 갈 거지?”
“응?”
어느새 지선이가 뒤에 왔다.
“그래. 집에만 있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
“네. 알았어요.”
엄마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가고 싶은 것도 가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수영을 못한다. 엄마가 자꾸 밀어내시니, 손을 닦고 거실로 나왔다.
“재석이도 간다고?”
“네..그런데..저 수영 못하는데..괜찮을까요?”
“호호. 뭐 수영하러 가나..물놀이 하러 가는 거지..”
수영장이든, 물놀이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언니, 우리 수영복 사러가자~”
“그래. 그러자.”
“어? 수영복 있어야 하는 거야? 없는데..”
“그럼 너도 같이 가자~”
지선과 지수가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 하는데, 수영복 말고도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점점 귀찮아지면서 괜히 간다고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재석아. 수영복은 이따가 엄마랑 가서 사. 엄마 오늘 백화점 갈 거야.”
“네..”
엄마는 부엌에 있으면서도 우리 이야기를 듣고 계셨는지 거실을 향해 소리치셨다. 나는 지수와 지선에게 눈으로 이야기 했고, 그녀들은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재석아 네 방 구경해도 돼?”
“별로 상관없는데. 똑같지 않나?”
누나 방에 일이 있어 들어갔을 때 보면, 화장품이 있다는 것과 좀 더 다양한 책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향기를 빼면 차이가 없었다.
“하긴, 너희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궁금할 수도 있겠네..”
지수와 지선, 그리고 상미누나까지 방으로 들어갔고, 그림자처럼 혁재형이 그 뒤를 따랐다. 슬기 누나는 살짝 웃으며 역시 따라갔다. 그들이 전부 들어가자, 혹시라도 이상한 것이 나오면 어쩌나 싶어 나도 들어갔다.
“깨끗하네?”
지수는 책상 앞에 앉고, 혁재형이 그 뒤에 탐색 모드로 섰다. 지선과 슬기 누나가 침대에 앉아서 쿠션을 실험하는 것처럼 흔들었고, 상미누나는 책장을 쭉 훑어봤다. 나도 눈으로 허점을 찾아봤다.
“엄마가 매일 청소해 주시니까..”
“셰익스피어 좋아해?”
“그거요? 그냥 장식이에요..”
물론 좋아한다. 그러나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셰익스피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신화를 알아야 하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이해해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이 아닌 바에야 그의 문학의 근간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나서 왜 영국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고대 지중해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로마사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리스신화, 로마사,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고, 셰익스피어까지 보면 서양문화를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 책장에는 그런 흐름에 따라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원서였다. 문장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번역본으로 보는 것보다 읽는 맛이 있었다.
“그래? 호호.”
“그건 그렇고...나가죠? 좁지 않아요?”
상미누나와 슬기누나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며 둘이 이야기하고, 지수와 지선이는 책상 책꽂이에 차례로 세워진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들을 들쳐본다. 혁재형은 지수의 그림자이며 탐색자였다. 서랍 등을 함부터 열어 안을 뒤졌다. 그냥 혼자 부엌으로 갔다.
“다들 뭐해?”
“몰라요. 제 방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나 봐요.”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여자 사진이나 시디라도?”
“어? 엄마도 그런 거 알아요?”
“있어? 호호. 다른 엄마들 하는 소리 들었지..재석이도 있구나..”
“아이~ 없어요.”
엄마는 숙달된 솜씨로 낙지를 볶으면서 순두부찌개에 호박을 토막 내 넣으며 나에게도 신경 써 이야기를 받아 주셨다. 나는 엄마의 손에서 뒤집개를 받아 낙지를 볶았다. 물이 거의 줄어든 것이 거의 다 되어갔다. 가스랜지의 불을 끄고, 냉장고에서 밑반찬들을 꺼내 접시에 적당히 덜어 담았다.
“어디서 먹어요? 6명인데?”
“식탁에서 그냥 먹으면 돼..여자들이라 괜찮을 거야. 현주 방에서 의자2개 가져와 줄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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