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34)

“잠시 연주 좀 빌릴까?”

 “네? 아.. 네..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아내 연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가다듬고는 눈짓으로 괜찮다고 허락했다. 최선배가 정중히 연주에게 손을 내밀자 연주는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에 질투의 분노가 일었지만, 그것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앞쪽으로 나가는 동안 난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견디기 힘든 분노가 가슴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최선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되나요? 아니면 질투?”

 “네?”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테이블에 양팔꿈치를 대며 두 손으로 턱을 받쳐들면서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지나친 친밀감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순간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녀가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내 얼굴을 구석구석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잘 생겼네요?”

 “네? 아.. 아니 뭘요. 그 보다 형수님께서.. 워낙 아름다우셔서..”

 “형수님요? 훗..”

 “왜.. 왜 웃으시죠?”

 “그냥요. 성우씨한테는 그런 호칭은 듣고 싶지 않은데요?”

 “...”

뭔가 묵직한 것으로 머리통을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그 눈빛이 눈을 통해 내 심장까지 후벼파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이마에 땀도 맺히기 시작했다. 내 얼굴일 붉게 물들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 당황스러워졌다. 지금 나의 느낌을 들켜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귀엽네요.”

 “에? 아..”

그녀는 그 한마디로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를 내 품에 넣겠다는 호기도 더 이상은 가질 수가 없었다. 너무 당돌하고 저돌적인 그녀의 눈빛에 기선을 제압당한 것이었다. 그 순간 테이블 아래쪽에서 무언가 종아리를 건드렸다. 흠짓 놀라 아래를 쳐다보니 그녀의 발이었다. 하이힐을 벗은 예쁜 발이었다. 엄지 발가락에는 짙은 와인색 메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왼쪽에 앉아있는 그녀의 오른발이 깊이 들어와 나의 오른쪽 종아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점점 그 발이 위로 올라와 무릎에 이르렀다. 옆트임이 있던 드레스 덕분에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가 하얗게 드러났다.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우리 뒤쪽으로는 테이블이 없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단 한사람에게라도 그런 모습이 보여진다면 정말 큰일 일이었다. 

“두려워요?”

 “네?”

 “생각보다 용감하지 않네요.”

 “...”

 “후훗.. 괜찮아요. 아직 그런 순진함이 남아있다는 게 맘에 들어요.”

나도 여자라면 물리도록 만나본 남자였지만, 이상하게 그녀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위용도, 거만함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빛에 길들여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도 춤출까요?”

 “아까 몸이 안좋으시다고..”

 “아뇨.. 성우씨가 추자면 출수 있어요.”

 “...”

점점 더 도발적으로 나를 유혹하는 그녀로부터 숨이 막혔다. 

“하지만 춤보다는 지금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좋은 것도 없죠. 물론 살을 비비는 방법도 있겠지만..”

또 한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그녀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여기 호텔에 방을 잡아두었어요.”

 “네?”

 “오늘 두 사람을 위해서 선규씨가 잡아둔거에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잡아달라고 부탁했죠.”

 “저..저희 부부를 위해서요?”

 “네.”

 “왜 그런..”

 “그냥 선물이에요. 두 분이 호텔에서 시간 보낸지도 꽤 오래 되셨죠?”

"그...그건 그렇지만.."

뭔가 일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난 어떤 거부감도 표현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 앞에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 슬그머니 시선을 옮겨 춤을 추고 있는 최선배와 연주를 찾았다. 사람들의 틈 사이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기에는 매너있게 서로를 잡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최선배의 아내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혹의 눈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왜 이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나를 유혹하려는 것일까? 혹시 최선배와 작당을 한 것은 아닐까? 설마.. 생각이 길어질 수록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리고 최선배와 연주가 춤을 추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가슴까지 터질것 같았다. 최선배의 두 손이 연주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는데 그 손이 엉덩이를 동시에 잡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 그의 손이 예의를 차리느라 연주의 손을 가볍게 잡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연주의 몸으로 옮겨가 있던 것이다. 질투의 분노는 불길처럼 일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최선배의 아내 앞에서 그런 감정을 티내지 않으려 애를 써야할 판이었다.

“화나요?”

 “네?”

 “저기 두 사람 때문에 화나냐구요.”

 “아..아뇨. 전혀..”

 “얼굴에 다 티가 나는데요?”

 “...”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요. 저도 지금 화가 나거든요.”

 “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전혀 화 난 느낌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내게 위로를 주려고 하는 말인것 처럼 느껴졌다.

“저도 알고 있어요.”

 “네? 뭐..뭘요?”

 “저기 두 사람의 관계..”

 “예?”

순간 머릿속으로 빠른 화살 하나가 강한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저 두 사람의 관계를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혹시 내가 아는 만큼 그녀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 나에게 보여준 그녀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단지 순수한 CC는 아니었죠?”

 “네?”

 “성우씨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맞죠?”

 “...”

 “꽤 오랫동안 잠자리도 같이 했던 걸로 알아요. 맞나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랄까.. 남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느낌이랄까? 나 혼자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내 여자를 이미 다른 남자가 마음껏 유린했었다는 과거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유 빛을 띈 그녀의 가녀린 손이 내 주먹을 어루만지는 순간에 떨림이 멈춰버린 것이었다.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에서는 나를 보듬어주고 싶은 모성애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우리 이제 같은편인것 같네요.”

 “그..그런가요?”

 “많이 힘들었죠?”

 “그..글쎄요.”

 “다 이해하고 살려면 여기가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녀의 손이 내 가슴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손은 얇은 셔츠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의 가슴을 더듬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마치 그녀의 손이 내 심장을 따듯하게 만져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친해질 수 있는 건가요?”

 “...”

 “내가 너무 도발적이죠?”

 “후.. 그런 것 같네요.”

 “싫으세요?”

 “아..아뇨. 싫지 않습니다. 이렇게 미모를 갖춘 분의 도발이 싫을 리가 있나요.”

 “그럼 제가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거죠?”

 “네? 하하하. 네, 그러셔도 됩니다.”

서로에게 공통분모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경계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를 일 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녀와 같은 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최선배에 가졌던 알 수 없는 패배감 같은 것을 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최선배의 아내를 내 품속에 품으면 결국 최선배와 난 같아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치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 두 사람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생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자신의 생각 같은 것들을 늘어놓으며 나에게 자신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조금씩 친밀도를 높여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꽤 오래 흐른 듯 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한두곡 정도 춤을 추고 들어왔지만, 최선배와 아내 연주는 들어오지 않았다. 최선배 아내와 대화에 푹 빠져있어 그들을 잠시 잊고 있던 나는 시선을 돌려 앞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수많은 쌍들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들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들 틈사이를 구석구석 살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게 찾아도 소용없어요.”

 “네?”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난 영문을 모른 체 그녀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까부터 없었어요. 우리 대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그..그럼.. 어디로 갔는지 봤다는 말이세요?”

 “네. 둘이 같이 나갔어요. 우리 몰래..”

 “모..몰래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내게로 내밀었다.

“마셔요.”

나도 내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부딪혔다. 그녀는 와인색 립스틱이 칠해진 도톰한 입술로 와인잔을 가볍게 물고는 아주 조금씩, 여유롭게 와인을 넘겼다. 하지만 난 잔에 들어있던 와인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갑자기 목이 갈라지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뒤엉켰다. 혹시 그들 두 사람이 내 상상대로 어딘가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 최선배의 아내가 잡아두었다는 그 방에서? 아니면 화장실? 아니면 최선배만이 아는 비밀 공간에서? 나는 별의별 생각들에 가슴을 떨었다. 

“밖으로 나갈래요?”

 “네? 어..어디로요?”

 “두 사람 찾고 싶은 거 아니에요?”

 “네. 하..하지만..”

 “있을만한 곳을 알 것 같아요.”

 “그..그럼 어서 나가죠.”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녀를 다그쳤다. 그리고는 이내 후회했다. 남자로써 그런 조급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그런 날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에 비해 너무도 태연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난 더 부끄러웠다. 그녀도 분명 남편에 대한 질투를 느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앞장을 섰다. 난 반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치 길을 잃을까 두려워 엄마의 뒤꽁무니를 바짝 뒤쫓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뒤따르면서 어찌보면 난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토록 많은 여자들과 자유롭게 즐기면서도 아내 연주에게는 보수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 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도 참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로비를 가로질러 회전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녀와 다섯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뒤를 따르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뒷모습을 훑고 있었다. 어깨를 드러낸 하얀색 드레스는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고, 그녀의 몸매를 완전하게 드러낸 채 섹시함을 강조해주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간 긴 드레스였지만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옆트임이 있어,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하얀 다리가 보여 더욱 섹시해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 연주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던 내가 어느새 앞에 있는 여자의 육체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피식 뱉어내고 말았다. 여자 앞의 남자란 이처럼 단순무도 한 것인가..

호텔 밖으로 나서면서부터는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아내 연주를 빠릴 찾고 싶은 나의 다급함에 비해 별로 빠르지 않는 그녀의 발걸음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그치는 옹졸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호텔 건물 뒤쪽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호텔 옆쪽부터는 잘 꾸며진 공원처럼 가꿔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분위기를 내주는 조명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명들은 그리 밝은 것들이 아니어서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도 공원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곳 어딘가에 최선배와 연주 두 사람이 뒤엉켜 있을것 같은 불안감에서였다. 

호텔 뒤편으로 나서자 좀 더 넓은 공원이 펼쳐졌다. 조경이 아주 잘 되어진 멋드러진 공원이었다. 그곳에는 희한하게 생긴 아주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었고, 예술성을 갖춘 조각작품들도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는 벤치가 놓여져 있었다. 그 벤치들 위쪽으로는 어김없이 노란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원으로 들어서서 산책로 같은 길을 걷는 동안 그녀도, 나도 말이 없었다. 그녀도 나처럼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멈춰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이라도 맞아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난 온 세상이 멈추는 것 같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옅은 노란색 조명이 밝혀진 벤치 앞에서 최선배와 연주가 서로에게 안겨있는 것이었다. 연주가 아주 편한 모습으로 그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나에게 너무도 커다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그 동안 나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사랑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이 컸다. 상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두 다리라 후들후들 떨렸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어오면 힘없이 쓰러져버릴 것처럼 내 몸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내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진 것이었다. 최선배가 연주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뭔가 말하자 연주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듯 한 모습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최선배의 입술이 연주의 입술로 포개어졌다.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심하게 떨던 내 입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울음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 순간 최선배의 아내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언뜻 빛에 비쳤던 그녀의 눈망울이 젖어있었다.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안겼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품에서 몸을 떨던 그녀가 나를 올려보았다.

“어서 나에게 복수해요. 어서..”

난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나 역시 최선배처럼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나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녀도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속에서 나의 혀와 그녀의 혀가 뒤엉켰다. 키스를 하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그리고 코에서 뜨겁고 버거운 숨결이 새어나왔다. 그녀도 나처럼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도 같이 할만큼 가까웠던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내가 느꼈던 만큼의 배신감과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키스를 하는 내 입술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그녀는 키스를 하면서 흐느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흐느낌이었다. 흐느껴 우는 여자와의 키스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순간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난 손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힘껏 내게로 끌어안았다. 단단해진 아랫도리가 그녀의 아랫배에 짓눌렸다. 그녀도 그것을 느낄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저편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는 최선배와 아내 연주를 보고 있었다. 

‘씨발... 될대로 되라지..’

내 속에서 분노가 들끓으면서 최선배와 연주에게 복수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오직 최선배의 아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당신 이름이 뭐지?”

 “소현이요.”

 “소현.. 넌 이제부터 내 여자야. 알았지?”

 “네. 성우씨. 당신의 복수가 곧 나의 복수에요. 그걸 위해서 난 당신의 여자가 될 거에요.”

밑도끝도 없이 그녀에게 반말을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종적인 여자가 된 그녀로부터 아주 짜릿한 정복욕 같은 것을 느꼈다. 

“여기서 할까? 널 먹고 싶어. 아주 깊은 곳에다 박아주고 싶어.”

 “그래 줄래요? 여기서? 더 두 사람이 보고 피눈물 흘리게?”

 “그래. 너의 그 구멍을 최선배, 아니 최선규 저 자식이 보는 앞에서 걸레로 만들어버리고 싶어.”

 “당신이 원하면.. 그렇게 하세요.... 벗을까요?”

 “하아.... 이런 씨발...”

난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취해 혼잣말처럼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내 손은 그녀의 치맛자락의 옆트임으로 파고 들었다. 탱탱한 허벅지 속살이 만져졌다. 조금 더 밀어 넣자 곧바로 그녀의 엉덩이가 만져졌다. 살이 느껴질 정도로 얇은 팬티에 감싸여 있는 그 탐스러운 엉덩이 살을 손 안에 가득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짧은 신음을 뱉어냈다. 난 거침없이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렸다. 하지만 내 손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한 그녀의 팬티를 벗겨낼 수는 없었다. 팬티가 한쪽 엉덩이를 드러낼 만큼만 벗겨진 채로 머물자 그녀는 스스로 팬티를 벗어 내렸다. 그러는 동안 난 잠시 그녀의 입술을 풀어주었다. 옆트임 사이로 겨우 팬티를 끌어내린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두 발을 차례로 번갈아 들면서 팬티를 벗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주 작게 돌돌 말아서 한 손에 쥐었다. 팬티를 보이지 않으려는 그녀의 부끄러움이 나의 성욕을 더욱 자극해왔다. 

난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다시 내 혀를 받아들였다. 거친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내 손을 치마 속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치마 속에 아무것도 입혀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손을 앞쪽으로 파고들어 가랑이 사이로 밀어넣자 그녀는 머뭇거림도 없이 다리를 벌려주었다. 까칠한 털 숲의 느낌이 손바닥 안에 번졌다. 가운데 손가락으로 갈라진 틈 사이를 파고들자 어렵지 않게 젖은 속살이 만져졌다. 그녀의 그곳은 이미 오래전부터 젖어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한없이 정숙해보이던 그녀의 내면에도 본능적 욕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난 더 이상 그들을 보지 않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소현, 그녀만을 느끼려 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 두 사람을 신경 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공원에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 우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둘만의 느낌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우린 우리의 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누다 문득 눈을 뜬 순간 그녀의 등 뒤로 서있는 최선배와 연주를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마치 차가운 얼음을 내려놓듯 소현에게서 떨어지며 한걸음 물러났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녀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네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내게 화가난 표정을 짓다가 금새 자신과 최선배의 행동을 보았느냐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그 순간 당황했던 내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 앞에서 내가 죄스러운 모습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소현에게로 다가섰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팬티를 뒤로 내밀었다. 난 그들 모르게 그녀로부터 그녀의 팬티를 받아들고 내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선배가 먼저 말했다.

“어..어떻게 된거지? 두 사람?” 

 “어떻게 되긴요? 뭐가요?”

 “지..지금 두 사람..”

 “그러는 당신들은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죠?”

 “우..우린..”

 “변명할 생각 하지 말아요. 다 봤으니까..”

 “그..그럼..”

 “맞아요. 두 사람의 몹쓸짓을 다 보고.. 화가 나서 우리도 그랬던 것 뿐이에요. 이제 됐나요?”

 “...”

네 사람은 서로에게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적막이 흘렀고, 스쳐가는 바람의 길이만큼 시간도 흘렀다.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알지 못한 것이었다. 난 연주를 쳐다보았다. 연주는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난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건가?’

 ‘아니면 내게 분노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내 머릿속은 너무도 복잡했다. 아마도 거기에 서있는 세 사람 모두가 나와 똑같을 것이었다. 그 긴 적막을 깨며 최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어디로요?”

최선배의 말에 소현이 대꾸했다. 그러자 최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잡아둔 방으로 가지.”

 “호텔 방으로요?”

 “지금 거기 말고 달리 갈 데가 있나? 지금 우리에겐 조용히 얘기할 곳이 필요해.”

 “그러죠. 가요.”

소현은 돌아서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도 난 연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주는 마치 자신의 남편을 끌고 가듯 하는 소현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난 그런 연주의 표정을 못 본 채 하고는 소현을 따라 돌아섰다. 연주가 얼마나 날 원망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잘못보다는 서운함을 더 크게 느끼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연주의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만큼이나 큰 충격과 배신감에 젖어있었으므로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흐르는 적막은 숨이 막힐 만큼 조여들었다. 누군가 숨소리를 크게 내면 뭔가가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엘리베이터에는 우리 네 사람만 올랐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라도 탔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엘리베이터 안쪽의 벽들은 유리처럼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이 더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개를 움직이다 최선배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것은 최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었다. 

나와 최선배는 문을 마주보고 나란히 기대서있었고, 연주는 최선배 옆 구석에 몸을 숨기듯이 서있었다. 그리고 최선배의 아내 소현은 버튼이 있는 쪽에 바짝 붙어서있었다. 그녀는 올라가는 내내 문에 비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지만 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줄곧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 때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 때문에 난 연주를 살피기가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궁금한 것이 연주의 모습이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난 우리가 내리는 층수를 살피지도 않았다. 그저 최선배가 인도하는 데로 따를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몇 층에 내리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지금의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였다. 내 일생에 가장 큰 고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혼생활이 파탄날 수도 있는 그런... 

최선배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다음에 그녀들이 뒤를 따를터였지만 난 확인하지 않았다. 소현이 먼저 뒤를 따르던, 연주가 먼저 뒤를 따르던 내 알바 아니었다. 내 뒤로 저만치 따라오는 하이힐 굽 소리만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만치 앞에서 최선배가 걸음을 멈추고는 바로 앞에 있는 문에 카드키를 들이댔다. 최선배는 전자음 소리와 동시에 손잡이를 밑으로 내리면서 문을 열었다. 최선배는 방문을 활짝 연 채 내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최선배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방 안에는 엔틱풍의 더블 침대 두 개가 놓여있었고, 반대편으로는 역시 엔틱풍의 소파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인용 소파 2개가 마주보고 있었다. 중앙의 빈 자리에는 미리 들어와있는 룸서비스용 카트가 놓여있었고, 그 위로 덮개에 덮여진 음식과 와인, 그리고 위스키가 놓여있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 창가에 다다른 나는 답답한 마음에 커튼부터 젖혔다. 눈부신 야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공기를 들이키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유리를 통해 방문 쪽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열인 문을 잡고 서있는 최선배를 지나 소현이 들어섰다.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최선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뒤로 들어설 것 같던 연주는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 앞에 드리워진 그녀의 그림자는 꼼짝하지 않고 거기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 자리에서 최선배와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우린 서로 주고받는 입장이었으니..

최선배의 설득이 있었는지 연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방으로 들어섰다. 소현은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고 연주는 안절부절하며 침대 앞쪽에서 서성거렸다. 서성이는 동안 연주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2년전 결혼기념일에 선물로 사주었던 그 반지였다. 그 반지를 낀 채 옛 연인과 키스를 나눈 연주의 모습이 떠오르자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내 손에도 연주가 끼워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다시한번 되새겼다. 그래 어차피 우린 서로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지.”

최선배가 나를 향해 말했지만 난 곧바로 그 말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연주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연주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소파쪽으로 향했다. 연주는 소현이 앉은 반대편쪽 소파에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자 최선배가 룸서비스로 들어온 카트를 밀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음식과 술들을 소파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쪽으로 오지 그래?”

최선배가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난 그제서야 못이긴 채 하며 소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동공이 커지면서 얼굴에 경련 같은 것이 일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연주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최선배의 모습에 분노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분노를 티내면 패자가 된 듯 해서 자존심이 상할 것만 같았다. 최대한 여유롭게 보이기 위해 슈트를 벗어 침대위에 던져놓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한쪽 손에 만져지는 천조각을 느꼈다. 

‘아차..’

공원에서 소현으로부터 건네받은 그녀의 팬티였다. 슈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다면 좀 더 편했을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왠지 최선배를 조롱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주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기분은 그랬다. 난 주머니 속의 팬티를 만지작거리면서 소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최선배는 얼음이 담긴 잔에 위스키를 공평하게 부어놓고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내밀었다. 

“지금은 모두에게 술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서..”

최선배의 말이 맞았다. 이런 분위기에는 약간의 술이 필요했다. 잔을 잡은 소현은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 독한 술을 음료수 마시듯 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스스로 한잔을 더 따랐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입도 떼지 않고 길게 들이켰다. 그녀의 뱃속을 파고드는 불같은 느낌이 내게로 전달되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벌써 췻기가 올라온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폭탄처럼 느껴졌다. 

“후우우.. 술을 마시니까 좀 낫네요. 그쵸?”

소현이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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