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4)

“저.. 정말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세요.”

 “정말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예쁘셔서 제가 그만 실수를...”

 “가시라구요.”

 “정말..”

 “가라니까요.”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전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나를 흘겨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녀와 난 그렇게 서있었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민우 아버지. 정말 이상한 사람이시네요. 점잖게 봤는데..”

 “그..그게 아니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줄 꿈에도 몰랐네요. 그동안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봤던 제가 한심하네요. 그리고 민우 엄마가 불쌍해지네요.”

 “죄.. 죄송합니다. 정말 할말이 없습니다.”

 “됐어요. 어서 가세요. 제 눈 앞에서 사라지라구요.”

 “하..하지만..”

 “왜요? 민우 엄마한테 말할까봐 그게 두려워서요?”

 “그..그게..”

 “그래도 그런 걱정은 드나보네요.”

 “....”

 “다시는 안봤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뻘줌하게 서있던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잡았다.

“왜 이래요?”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제..제가 사과할 시간이라도 주세요.”

 “저 늦었어요. 그런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지라구요.”

 “그..그럼 나중에라도.. 제 연락첩니다. 꼭 전화주세요. 이따 퇴근 후에라도..”

그녀는 내가 건네는 명함을 뿌리쳤다. 하지만 나는 집요하게 그녀의 손에 명함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내 명함을 손에 든 채 그곳을 떠났다. 나는 황망한 기분으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음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섞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여자도 아닌 앞집 사는 여자를 성추행했으니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도 거를 만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녀의 연락처라도 받아올 걸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녀가 아내에게 오늘 일을 모두 말해버리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일들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절부절 불안한 모습을 보이니 동료들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복잡하니 그런 눈빛들 조차도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졌다. 한여름의 해는 오후 여섯시가 지나서도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고 있었지만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귀찮은 전화벨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전화벨 소리는 집요하게 울려댔다. 받지 않았다. 끊어졌던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책상에 던져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녀가 스쳐갔다.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여..여보세요?”

 “저...혹시.. 민우 아버지...”

 “아...네. 저..접니다...”

저편에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아직은 낯설게 들려왔지만 그녀가 분명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저.. 앞집에 사는..”

 “나.. 민주 어머니.. 맞죠? 맞으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주셔서.. 정말 기다렸어.”

 “네? 아.. 네..”

나도 모르게 조급함을 드러내고는 아차 싶었다. ‘아무리 미안하더라도 이렇게 나가면 안 되는 것인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소..손은 좀 어떠세요?”

 “네? 아.. 소.. 손요.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보다는 민주 어머님이 더...”

 “...”

얼마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침 일을 상기시켜 다시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난처함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난 그녀에게 죄인이었다.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으니 최대한 그녀의 용서를 구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 기다리다 입을 열려던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퇴근 하신건가요?”

 “네? 퇴..퇴근.. 아..아니요. 아직 회사에요.”

 “그럼.. 저랑 좀 만나실래요?”

 “네? 마..만나요? 아..네..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사과의 의미로..”

 “그럼 강남역으로 오실래요?”

 “네..가..가야죠. 갈게요. 도착하는대로 전화 드릴게요. 이.. 이 번호로 드리면 되죠?”

 “네.”

전화를 끊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침에 무척 화나 많이 나있었던 그녀가 내 손의 상처를 걱정해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화를 누그러트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착한 심성이 느껴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전철역으로 내달렸다. 강남역 까지는 겨우 한정거장이었지만 단 1초도 늦을 수가 없었다. 전철에 오르고도 더딘 느낌에 마음이 조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 아침의 일을 용서받고 싶었다. 어쩌면 내 자신의 무거움을 한시라도 빨리 덜어내고자 하는 이기심이 더 강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남역에 내린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될까요?”

 “여기 3번 출구에요.”

 “아..그러세요?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뛰듯이 달려 올라갔다. 계단 끝에 이르렀을 때 한쪽 건물 앞에 서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소곳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보아도 예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성적인 쾌락을 앞세웠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설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걸음 정도 앞에 다가섰을 때에서야 비로소 나를 알아보고는 몸을 움츠리듯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바로 달려온건데... 제가 좀 늦었나요?”

 “아..아니에요. 저도 금방 왔어요.”

 “저.. 아직 식사 전이시죠?”

 “네? 아.. 네.”

 “그럼.. 제가 저녁을 대접해도 될까요?”

 “그냥 집에가서 먹어도 되는데..”

 “아..아닙니다. 아침의 일도 있고 하니.. 제가 대접을 하는게 마땅하죠. 거절하지 마시고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부탁입니다.”

 “...”

 “그렇게 하시는거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안내해 가끔 들리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가장 괜찮은 스테이크와 잘 익은 와인을 주문했다. 그녀는 그런곳이 생소한 듯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아니면 내가 어색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여기 와보셨어요?”

 “아..아뇨.”

 “제가 종종 아내하고 찾아오는 곳입니다.”

 “아.. 민우 엄마하고도 잘 다니시나 보네요.”

 “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자주 밖에서 데이트를 하는 편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부럽네요.”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가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 다정한 부부 같아 보이지는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외로운 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손은 좀 어떠세요?”

 “아.. 괜찮아요. 아까 약국에서 약을 사다 바르고 반창고도 붙였는걸요.”

 “많이 아프시죠? 저도 모르게 그만...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 심했던 거 같아요. 사람 많은데서 소리 질렀던 것도 그렇고요..”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벌을 받을 짓을 했으니 그래도 싸죠. 온 몸을 다 할퀴셨다 해도 제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훗.. 설마요.. 온몸까지야..”

그녀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 한구석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내 죄를 덜어냈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녀의 알 수 없는 외로움 같은 것을 달래주고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와 지속적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스쳐갔다. 

“여기 식사 괜찮지 않으세요?”

 “네, 아주 맛있어요. 와인도 그렇구요. 원래 제가 술을 잘 못하는데.. 여기 와인은 달짝지근한게 맛있네요. 이러다 취하면 안되는데..”

 “하하. 걱정마세요. 취하시면 제가 업고라도 모셔다 드릴테니까요.”

 “훗.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죠.”

순간 온몸이 경직된 듯 몸이 굳었다. 또 다시 그녀 앞에 죄인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그녀도 눈치를 챘는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어머, 다른 뜻은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아..아닙니다. 하하.. 제가 잘못한건 맞는데요.”

 “아..아니에요. 그런뜻은.. 정말 죄소해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하하. 괜찮다니까요. 대신 제가 2차도 쏠테니까 시간 내주실래요? 이 근처에 정말 근사한 곳이 있거든요.”

 “네. 알겠어요. 그럴게요.”

그녀는 내게 미안해서인지 선뜻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성추행을 한 남자에게 오히려 미안해하는 그녀의 천사같은 선한 마음에 자꾸만 끌리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묘한 설렘이 느껴졌다. 아내 연주 말고 설렘을 느껴본 건 이번이 처음인 듯 했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에서 나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2차로 옮길 와인바까지 택시를 타고 갈까 했지만 소화도 시킬 겸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그녀도 그것이 좋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식사에 알콜 기운까지 느껴지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도 그런 듯 했다. 그녀의 얼굴이 처음보다 많이 밝아져 있어 마음이 놓였다. 술기운으로 인해 그녀의 기분이 많이 업 된 듯 했다. 와인바까지 가는 길은 약간 어두웠지만 잎이 무성한 가로수들이 늘어서있어 꽤 운치 있었다. 

“여기 너무 좋네요.”

 “그쵸? 저도 가끔 혼자 걷는데 참 좋더라구요.”

 “혹시 민우 엄마하고도 걸어보셨어요?”

 “네? 아.. 네. 몇 번 걸어봤죠. 집사람도 좋아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민우 아빠는 생각보다 다정하고 감성적이시네요.”

 “하하. 뭘요. 다들 똑같지 않나요?”

 “똑같긴요. 우리 남편은 그저 일 밖에 모르는걸요. 휴..”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옆모습이 괜히 애처로워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이 나의 보호본능을 자극해왔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은 강한 열망이 일었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제가 민주 어머니 이름을 알아도 될까요?”

 “네? 제.. 제 이름요?”

 “네. 이름요. 궁금해요. 제 이름부터 말씀드리자면... 박성우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저는 한혜영이에요.”

 “아. 예쁘시네요.”

이름을 말하며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예쁘게 느껴졌다. 

“나이는요? 전 올해 서른 아홉이에요.”

 “전 서른 여섯이에요.”

 “아, 딱 좋네요.”

 “네? 뭐가요?”

 “아.. 아니요.. 그냥 순간 사귀기 딱 좋은 나이차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에? 사..사겨요?”

 “하하하.. 그냥 그렇다구요. 오해는 마세요.”

 “후훗... 네..”

그녀를 여자로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만 그녀를 남자의 진심으로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녀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훔쳐보며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자전거가 튀어나왔다.

“앗.. 조심해요.”

순간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고, 중심을 잃은 그녀가 내 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놀란듯 내 품속에 말없이 기대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다행이에요. 놀랐습니다. 갑자기 튀어 나와서..”

 “냄새가 좋아요.”

 “네?”

 “성우씨, 스킨 냄새요.”

 “...”

그녀는 내 품안에 몸을 기댄 채 나의 체취를 맡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침에 버스에서 안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여자를 안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또 이렇게 되었네요.”

 “네? 뭐.. 뭐가요?”

 “아침에처럼 성우씨랑 몸이 닿았어요.”

 “아.. 그..그러네요.”

 “근데 지금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도 되죠?”

 “아.. 네.. 그..그러세요. 얼마든지요.”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내 품에서 한참을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변화에 나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금 많이 외로운 것이 틀림없었다. 온몸이 떨려왔지만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내 품안에 있던 그녀가 수줍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경직시켰다. 숨 막히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뭔가를 갈망하는 촉촉한 물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런 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목석이었다. 

단 몇 초 동안이었지만 난 그녀의 눈빛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도 내 입술을 받아 들였다. 너무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머리속은 황홀했고, 가슴은 터질듯 뜨거웠다. 첫 키스 때의 그 느낌처럼 설렘의 강도는 너무도 컸다.

내 혀는 뱀처럼 그녀의 혀를 감았다. 그리고 뜨겁게 빨아들였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깊은 키스는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에 그녀는 내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마치 연인간의 행동처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와인바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서로를 깊이 느꼈지만 아직은 그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에는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와인바는 엔틱풍으로 인테리어를 해놓아서 분위기가 무척이나 고상했다. 혼자 온 사람들은 바에 앉아 마시지만 우리 같은 커플들은 별도로 마련된 작은 방처럼 꾸며진 테이블로 안내를 받았다. 이미 아내와 몇 번 와봤던 곳이라 나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그 공간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타인들의 시선에 방해를 받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서 음침한 둘만의 공간을 찾는 커플들이 자주 오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그 곳의 고상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이 신기한 장식물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이어졌던 어색함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듯 했다. 

“여기 정말 예뻐요.”

 “그렇죠? 집사람도 무척 좋아하는 곳이에요. 혜영씨도 마음에 드실거라 생각했어요.”

 “저희 남편하고 정말 비교가 되네요. 저희는 이런 곳에는 한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휴.. 또 처량해지네요.”

 “하하. 너무 걱정 마세요. 이젠 제가 가끔씩 좋은 곳에 데려가 드릴게요.”

 “저..저를요?”

 “네. 이젠 우리 친구가 된것 같으니 그래도 되지 않나요?”

 “치..친구요?”

 “네. 친구요. 안되나요?”

 “아.. 아뇨. 안될거야 없지만..”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다행스럽게도 테이블로 와인이 들어오며 분위기가 전환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접시에 견과류들이 담겨있었고, 드라마에서나 봄직한 멋진 잔에 붉은 와인이 채워지자 그녀의 눈망울에 기쁨이 담겼다. 그녀는 그 매력적인 분위기에 취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오늘 밤 그녀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음흉한 생각이 스쳐갔다. 확실히 나는 늑대의 피를 타고난 남자인 모양이었다. 

술이 약하다던 그녀는 이곳에서만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셨다. 이미 식사를 하며 한잔을 마셨기 때문에 주량은 훨씬 넘어선 것 같았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귀엽게 꼬이고 있었고, 행동 역시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술기운이 오르자 그녀는 마음속에 있던 답답함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남편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혹시 아내 연주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그동안 아내에게 잘 해주었는지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어릴 때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은데요?”

 “정말 분위기 있고, 멋있는 남자랑 데이트를 해보고 싶어요.”

 “민주 아빠한테 불만이 많으시네요.”

 “재미없어요. 오늘 민우 아빠, 아니 성우씨랑 있어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거 같은데요?”

 “지금요? 지금은...”

 “요즘은 유부녀들도 애인이 하나씩은 다 있다고 하던데요?”

 “네? 아휴.. 설마요.”

 “제 주위에는 다들 그렇게 사는거 같더라구요.”

 “후.. 글쎄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한번쯤은 일탈에 대한 꿈을 꾸지 않나요? 저도 그렇던데..”

 “휴.. 누가 저같은 아줌마를 좋아하겠어요. 말도 안되요.”

 “음... 저는 혜영씨 같은 여자가 좋던데요? 아직도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네에? 하하하. 말도 안되요. 뭐하러 저 같은 여자를..”

그녀는 기분좋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내 시선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옆얼굴로부터 목선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무척이나 예뻐보였다. 그 하얀 목줄기에 키스하고픈 욕망이 일었다. 

그녀의 눈이 자주 깜박였다. 이제 슬슬 술기운이 버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몇 번 꾸벅거리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치켜뜬 두 눈은 금방이라도 다시 닫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좋으세요?”

약간은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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