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episode15. 큐라 (1)
[…밉구나. 성하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내게 아무런 감정도 품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냐.]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큐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그녀가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줄까.
[무슨 일인가. 용사로서의 일이냐?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급하게 구는 것이냐. 보지도 못한 왕녀는 중요한 일에 끼고, 나의 감정은 중요한 일에 끼지도 못하는 것이냐.]
내 생각이 짧았다. 그녀가 내 생각을 이해해주길 바랄 게 아니라 내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려 해야 했다.
나조차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상대가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다니, 그건 너무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나는 끌어안던 큐라를 잠시 떨어뜨려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이내 그녀의 눈동자로 향했다.
루비를 박아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붉은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눈동자는 얼마 안 가 눈물을 머금었다.
“우린 친구로 만났고, 친구로 지냈어. 그렇지?”
[…그렇다.]
나는 눈을 잠시 내리깔고 그녀의 양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그러자 큐라는 메이는 듯한 목으로 겨우 대답을 해주었다.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주변을돌아보지 못한 것은 미안해. 내가 시야가 좁아서 주변의 변화에 신경도 쓰지 못했어.”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잠시 텀을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깜빡이는 눈을 때때로 큐라의 눈에맞추고, 다시 그녀의 작은 손을 쳐다보기를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없네. 뭐라고 해야 하나.”
헷갈린다. 기억에서 봤던 단편적인 일들이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누가 말한 것인지.
헷갈린다. 그녀가 했던 말들이, 내 기억에 남은 것들이 어느 회차에서 말했던 것인지.
점점 뇌가 이상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이 미쳐가고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생각이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분명, 인간들의 본능에는 관심이 없다 했지. 인간들끼리 몸을 섞는 것조차 나와는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내 몸을 보는 것도, 내가 그들의 몸을 보는 것도 관심 없었다.]
내가 할 말조차 잊고 버벅거리니, 큐라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들을 꺼내며, 자신이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입에 담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과는 종이 달라 생기는 생각들이 천천히 단어가 되어 나열되어가는 순간 큐라는 내 손을꽉 쥐었다.
[아니야.]
큐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말들을 모두 흩어지게 만들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들과 생각들을 부정했다.
[내가 틀렸다.]
종이 다른 것과는 별개로, 마음을 품어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미 품어버린 마음은 나를 괴롭혔다. 친구로서 지낼 것이다.라는 마음 따위는 가볍게 무너뜨리고 나를 괴롭게 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종이 다르다. 성하는 나보다 빠르게 늙고 죽을 것이다. 금방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지우려 해봐도, 이끌리는 마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건…”
[자. 옷도 잘 입었지?]
“뭐?”
그녀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손을 떼어낸 채 자신의 원피스를 꾹 잡고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갑자기 웬 옷? 이라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인간들이 내 몸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도 내가 틀렸었다. 인간들은 자신이 마음을 허락한 자에게만 몸을 보여준다 했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그러니 내 몸도 다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성하만,성하만 보도록 하겠다. 그러니… 그러니 성하도 나를 마음에 품어다오.]
“…아.”
[그, 그래. 번식행위도, 나는 그저 애를 낳기 위해서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간들은 쾌락이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지기 위해 한다고들 하더구나. 나도, 나도 그러고 싶다. 응?]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경광등이 울렸다.
큐라의 상태가 어딘가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탓일까. 아니, 그런 것은 내 탓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녀의상태에서 불안함을 느끼게된다.
점점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얼마나 절박한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견뎌왔기에 이렇게 털어놓는 것일까.
수많은 시야가 쏟아지고, 수많은 소곤거림이 귀에 들려왔다.
[이, 이렇게 빈다.]
그녀는 자신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목을 긁어내렸다.
“손 떼! 피 나잖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작은 팔을 떼어냈지만, 그녀는 멈출 기미 없이 떨리는 팔에 힘을 꽉 쥐었다.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는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큐라는 불안한 듯 자신의 붉은 꼬리도 숨기지 못한 채 원피스 바깥으로 드러내었다. 손톱은 피로 붉게 물들고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아. 성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야. 잘 알고 있지.”
[그럼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도 아는 것이냐?]
“알지.”
불안함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현실로 드러났다. 무서웠다. 처음에 엘리샤를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떨려왔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엘리샤의 0회차를 본 순간부터, 나는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뭘 하든 안 되는 놈인가. 싶을 정도로 하는 일마다 꼬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용사]라는 능력을 쥐어준 탓에, 그녀는 [회귀]를 얻게 되고, 그 뒤로 마음이 망가져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갑자기 이래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성하는 이리 말하지 않으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잖느냐? 손을 잡고 싶다고 말을 해도, 조금 곁에 있고 싶다고 말을 해도 임무를 주기 바쁘고, 나와 떨어져서 뭔갈 하기 바쁘지. 용사라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험이라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마음이라는 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생각한다. 성하가 신도 아닌데, 그런 감정 하나 일일이 알 수가 없지.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말하겠다. 나를 봐다오. 내게서 눈을 돌리지 말아다오. 나를 싫어하지 말아줘. 혹여 내 말투가 깔보는 것같이 느껴진다면 바꾸겠다. 혹여 내 꼬리가 종이 다르다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면 자르겠다. 숨길 수 없는 귀도 자를 자신 있다.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드래곤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잘라내겠다. 또, 또 무엇을 바꿀까? 머, 머리카락의 색이 불길하다고 느껴진다면 자르겠다. 눈, 눈 색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보겠다. 안 바뀐다면 뽑겠다. 그대를 느낄 수만 있다면 시력 같은 건 포기해도 좋아. 이빨도 인간답지 않게 뾰족하다면 갈아내겠다. 뽑아도 된다. 그러니, 그러니 나를…]
“큐, 큐라. 정신 차려. 그러지 않아도 돼. 지금 너무 격앙되어 있어. 조금만 진정해. 너무 극단적이야. 그리고 내겐 너무 갑작스러울 정도로 급진적이야.”
정신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큐라가 말하면 말할수록, 주변에 멈춰선 사람들이 늘어났다. 술렁거리는 이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자신이 가진 신체 일부임에도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잘라내겠다 말하는 것을 보니 듣는 내가 다 섬뜩해졌다. 이곳에 온 지 5주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큐라는 회귀자가 아니었다.
엘리샤는 수천 번의 회귀로 마음이 망가져 있다. 라며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이번에 큐라의 반응을 보니 정말 이해 가는 게 없었다.
[부모도 없지. 나를 들여주는 동족도 없어. 용도, 인간도 아닌 내가 있을 곳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대가 있었다. 그대만이 내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렇지.”
[그런데 그런 그대가 나를 두고 다른 이만을 애타게 찾는 것을 보니, 참아오던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게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성하의 짝이 되면, 나는 혼자가 되지 않을 수 있어.]
큐라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외로움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몰아붙였는가. 라는 의문은 금세 풀렸다. 처음부터 홀로 살았던 그녀가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랑이라는 마음을 알게 된 후에 자신이 다시 혼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 결과였다.
그녀는 티도 내지 않은 채 자기의 생각으로 자신 스스로 좀먹어가고 있었다.
“…대답을 원한다 했지. 그럼 따라와. 여긴 너무 눈이 많잖아.”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는 그녀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큐라는 팔에 준 힘을 쭉 뺀 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별달리 대답할 것이 따로 있는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잔뜩 끌어버린 직후라 조금 곤란한 느낌도 있었다.
[…….]
팔을 잡힌 채끌려오는 큐라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꽤 몰린 인파를 헤집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게 무서운 거야?”
[그렇다.]
“큐라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준 나라서, 그래서 같이 있고 싶은 거야?”
[그래. 친구를 알려준 것도, 외로움이라는 걸 알려준 것도 성하니까]
늘 혼자 살아왔던 큐라는, 자신이 느끼던 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왔고 살아왔다.
나는 그녀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그녀의 마음에 구멍을 뚫어버린 꼴이되었다. 내가 곁에 있는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큐라 자신도 깨달아버린 거겠지.
[응. 그래. 그런 거야. 따라오면 대답해준다 했지? 대답, 대답을 바란다. 대답해다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방금처럼 자신의 목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던 큐라다. 거절한다면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역시 성하는 내가 그렇게까지생각되지 않는 듯하구나. 응. 그대가 마음에 들도록 인간답게 바꾸겠다. 같은 종처럼 산다면 나도 받아들여진 여유가 생기지 않겠느… 아니, 않을까? 응? 마, 말투도 바꿀게. 어, 어때? 꼬, 꼬리도 자를 게 기다려봐.]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기다려봐.”
[뭘! 뭘 기다리라고! 당장에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그렇게 진심이 아니라는 모양이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고치겠다고 하잖아! 내, 내가 못나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그런 거겠지. 그야 같은 종이 아니니까. 성하가 마음에 들 때까지 내 몸에 붙어있는 걸 떼어내겠다고 하잖아.]
큐라는 불안한 사람처럼 말과 몸을 떨더니 말투도 바꾸어 내게 어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바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큐라는 그런 걸 기다려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역린을 건드린 건지 그녀는 역정을 내며 내게 소리쳤다.
[읍.]
이제는 말로 통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에 대답하지 못한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허리를 두르고 입에 입을 맞추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큐라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내 입술을 탐하듯이 입술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욕심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혀를 내 혀에 얽어왔고, 마킹하듯 내 이빨을 하나하나 훑었다.
[…대답은 늦었지만,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저 얼버무리기 위해 한 것은 아니지?]
[푸하.]하고 입을 뗀 큐라는 조금 못마땅하다는 표정을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도 얼마 안 가 미소로 지워지고 없었다.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린 건지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럼 지금 성하도 내게 좋아한다고 말해줘.]
“나도 큐라를 좋아해. 그러니까 굳이 말투 안 고쳐도 되고, 꼬리 같은 것도 자를 필요 없어. 나는 큐라의 그대로를 좋아하니까.”
[…응. 나도 성하가 좋다. 성하가 내 마음을 받아준 게 너무 기쁘다.]
나는 큐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주었다.
확실한 대답을 원한 건지, 큐라는 나를 힐끗 올려다보며 쐐기를 박아달라는 듯 애원했다. 나도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의 목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그녀가 했던 말을 상기시킬 때마다 왜인지 변명하듯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건지, 그저 이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이런 대답을 하는 건지 나 스스로도잘 모르게 되었다.
[그럼 오늘 밤은 내 몸을 탐해주겠느냐?]
심란한 마음도 잠시, 큐라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