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episode14. 달 세뇨 (4) (94/98)



〈 94화 〉episode14. 달 세뇨 (4)

[지금  성하를 의심하는 거냐?]

침묵 사이에서 큐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감정을 삼키며 입을 연 그녀의 말 안에 날이 세워져 있음을 모두가  수 있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듯이, 그녀의 본 모습은 지금 연약한 소녀의 모습과는 반대로 500년을  거대한드래곤임을 알고 있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와서 말함과 동시에 내게 물음을 던졌던 이들을 훑어보았다.

[그리 많은 시간을 같이 다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성하는 용사다! 용사는 용사만의 특전이 있는  당연한  아니냐? 어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아직도 성하에게 말하지 않은 능력이 있을  아니냐.]

큐라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을 꺼냈다.
‘미카엘’이나 ‘가브리엘’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있음에도 물러남 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용사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내가 이토록 잘 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녀 나름대로 생각해내고,  편을 들어주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내리고 입을 닫았다.

“그, 그건… 용사의 능력은 원래 들키면 불리, 해지기 때문에…”

큐라의 일갈에 치요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더  말이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받은 것을 갚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아니다. 그저 성하의 입장에 서서 한 번 정도 생각해달라는 것이다. 성하는 이렇게 의심받을 걸 알면서 겨우 꺼냈을 것 아니냐. 궁금한 게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다 같이 캐물을 셈이라면 대체  궁금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느냐?]

큐라의 붉은 눈이 짙게 빛났다.
나는 무슨 설득을 해야 할지 제대로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큐라는 내 앞에 서서 나를 지켜주듯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쌓일수록, 나를 추궁하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미안. 내 능력도 말  해놓고 치사하게 추궁하려고만 했었네.”

다시 한번 침묵이 돌고, 치요가 그 침묵을 깨고 먼저 사과를 건넸다.
다행히 그들에게 말하지 않고 넘어갈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방법으로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을까. 에 대한 불안감이 싹텄다.

[참, 용사라는 작자들은 신의 총애를 받은 자들이니까…]

‘가브리엘’은 면목 없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세라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테스는 세라의 옆에서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전의 설명과 함께, 그걸 설명할 수 있던 이유를 넘길 수 있던 것 자체는 내게 있어 큰 수확이었다.

*

[잘했느냐?]
“잘했어.”

그렇게 잠시 개인 시간을 가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을 무렵, 큐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달라붙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내게 달라붙은 그녀는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고개를 힐끗힐끗 내밀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도 큐라는 그게 좋은 건지 [헤헤]하고 웃으며 머리를 움직였다.

[분명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겠지?]
“응.”

내 능력이 회귀가 아니기에, 당시에 큐라가 말을  때만 해도 거짓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큐라의 말이 마냥 거짓된 것이 아님을  수 있었다.
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큐라의 말에 긍정으로 답했다.

[칭찬도 좋지만, 나는 성하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다.]
“평소에도 오래 붙어있잖아?”

큐라는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과는 다르다. 단둘이 있고 싶다는 말이다.]

큐라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말을 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큐라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다.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입을 비죽이는 큐라는  시선이 느껴진 건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홱 돌렸다.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면 좀 그렇다 야. 덥잖아.”
[얼음 마법이라도 걸어줄까?]
“그건 너무 추워지잖아.”

후끈거리는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이 순간을 넘기려 했다.
 말을 하니, 그제야 큐라가 이쪽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산뜻한 얼굴로 그런 농담을 치니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강한 마법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큐라는 입을 비죽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왕도의 시장 거리를 걸었다.

“저건 얼마나 할까.”
[글쎄다. 솔직히 돈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 아니냐?]
“그건 그냥 지원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지나가던 와중 비싸 보이는 보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잡다한 이야기라도 꺼내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큐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뭔가를 살 때 비싸고 좋은 물건을 고르던 나의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목숨에 관련된 건데 싸고 안 좋은 거 사면 위험하잖아.”
[그렇다기엔 정작 성하는 좋은 걸 쓴 적이  적이 없다만.]

어깨를 으쓱이며 장비에 대한  사는 것에 예를들자, 큐라는 이상하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잠깐의 침묵을 깬 큐라가 말을 이었다.

[용사라고 칭한 자들이나 돈  벌었다 하는 모험가들은 모두 철제 갑옷을 두르고 있지만, 성하는 혼자 가죽 갑옷을 두르고 있잖느냐. 가죽으로 된 갑옷은 모두 돈이 없는 초심자뿐이다.]

큐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발걸음을 같이 옮겼다.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따라가니, 그녀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들어 올린 손가락 끝을 시선으로 따라가니 그녀가 말한 대로 웬만한 모험가들은 철제 장비를 끼고 있었다.
국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내가 가죽 갑옷만 입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거겠지.

[아무리 후방을 담당한다지만… 우리에게만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냐.]

큐라는 나를 향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한정적이다 보니까, 마냥 물 쓰듯 쓸 수는 없는 거지.”

나는 큐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대답해주었다.
이렇게 큐라가 나를 많이 생각해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마주하고 나니,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내심 500년을 외롭게 지내왔던 큐라에게,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이제 3번째의 만남이지만, 그녀에게는 이번이 처음일 테니 신중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종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발바닥에 뭔가가 많이 채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시선을 길 끝으로 옮겼다.
그렇게 눈으로 길을 따라가니, 곳곳에 종이가 채이듯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고개를 숙여 종이를 들어 올렸다.
안에는 테베레스의 언어가 적혀 있었다.
원래라면 읽을 수 없던 글자들. 용사가 아니었다면 읽을  없던 문자들.
하지만 용사가 되어 통역, 번역의 힘을 빌린 나는 그것을 읽을  있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문자들의 배열에, 큐라는 궁금하다는 듯 귀를 쫑긋거렸다.

“왕녀가 아프다고?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항이 적힌 종이가 바닥을 나뒹구는 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우면, 똑같은 내용이 적힌 종이라는 사실을알게 된다.
온 길거리에 부착되었던 흔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바닥을 나뒹구는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없던 일로 생각하라는 것처럼, 이제는 괜찮다는 것처럼.

[지금이면 다 나았으니 처리한 것이 아닌가 싶다만.]

내가 표정을 굳힌 채 종이를 넘기니, 큐라도 그 종이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그리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큐라의 의견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병이 모두 나았으니 종이를 모두 치워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전 회차도, 그 전 회차도 왕녀가 아프다는 일은 없었다.
회차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것은 회귀자와 관측자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모든 것.
나비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엘리샤나 나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프다고 하는 사람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아도 엘리샤라는 것을 알  있었다.

“그런가.”

나는 큐라의 말에 건조하게 대답했다.
3주간 테베레스에서 큐라와 세라, 테스를 찾은  2주간 엘슈펠에 갔던 것을 생각하면, 엘리샤는 2주 내로 아팠다는 것이 된다.
 모르겠다. 잘 알지 못하는 미래가 있으니 조금 불안해진다.
마냥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해도, 결국 다 알지는 못하니까 조금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한두 번 회귀한 것 가지고 미래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니 이런 불안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다 미래에 대한 미지에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하지 않는가.
이를 까득 깨물고 손에 쥔 너덜거리는 종이를 놓아주었다.
펄럭이며 바닥으로 가라앉은 종이를 짓밟으며 다시 앞으로 걸었다.

[성하?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니야.”

내 걸음이 조금 빨라지니, 큐라도 그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내던지고는 내 뒤를 따랐다.
총총 따라온 큐라의 목소리에 나는 둘러대듯 대답했다.

[성하.]
“…왜?”

큐라는 이내 내 손목을 잡더니 나를 멈춰 세웠다.
드래곤의 힘을 뽐내듯, 그녀는 강한 힘으로  팔목을 잡은 채 이름을 불렀다.
지끈거리며 전해지는 통증이 손목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꿈틀거리던 입을 겨우 연 나는 그녀의 부름에 답했다.

[슬픈 눈을 하고 있구나.]
“슬프다니?”
[그 왕녀라는 여자가 그리 좋은 것이냐?]

큐라의 말을 얼버무리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큐라는 대충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친구 좋지. 친구 좋아. 평생을 외롭게 살았다. 평생을 홀로 살았다. 하지만 성하와 있던 5주가 그토록 행복해서, 500년이라는 세월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알차게 살았다는 감각도 처음이다. 이토록 살아가는 게 충실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 성하가 있다는  하나로 나는 마음이 이렇게 미어진다.]

큐라는  팔을 꽉 잡으며 바들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천천히 흘러가는 그녀의 말은 조금씩 흘러넘치고 있었다.
시장길 한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당장 큐라와 나만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점점 물이 차오르는 듯, 그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를 봐다오. 나를. 친구로는 안돼. 그저 친구로 너를 보낼 생각은 없다.]

큐라는 자신의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녀의 눈물은 반대로 흘러내렸다.

[어째서 성하는 다른 여자의 일에 그렇게 진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냐. 나는, 나는 그저 친구  이상의 관계도 아니냐?]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말을 귀에 담을 뿐이었다.
마음속에 주워 담으니 조금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이렇게 나를 봐주는데, 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구나. 나는 그녀의 감정을 소홀히 하고 있었구나.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입안에 씁쓸하게 남아 맴돌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엘리샤의 일만 머리에 남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해결해 나가려 했던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나는 너무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의 감정에 소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나는 나지막이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감정을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몰라줘서, 미안해.”

 손목을 꽉 잡은 큐라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큐라의 어깨를 감싼 채 끌어당겼다.
작은 소녀의 몸이 품에 안기고,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큐라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그 해답은 찾지 못했다.

“…미안해.”

나는 몇 번이고 큐라에게 사과를 반복했다.
너의 마음을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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