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episode14. 달 세뇨 (2) (92/98)



〈 92화 〉episode14. 달 세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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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샤는 회귀했다.
‘미카엘’의 강대한 빛을 받은 뒤 숨을 거두었던 그녀는 그녀가 알던 자신의 방에서 눈을 떴다.
멍하니 몸을 일으킨 엘리샤는 기침을 토해내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건지 입을 틀어막은  몸을 일으켰다.

“…거기 누구 있어?”
“네. 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엘리샤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방을 살폈다.
자신이 수천 번은 봐 왔던 방의 풍경을 뒤적거리며 자신의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문밖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용사 소환은 다음 주지?”
“네. 공주님. 용사님들의 소환 예식은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엘리샤는 한편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제발 자신의 말을 부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회귀할 때마다 물었던 말이지만, 이번만큼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엘리샤의 바람과는 반대로, 병사는 격식을 차린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긍정으로 답했다.
그 순간, 엘리샤는 다리에 힘을 잃고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공주님?! 공주님! 들어가겠습니다!”
“젠장. 무슨 일이야?!”

방 안에서 풀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문밖을 지키던 병사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론 정적만이 귀를 아프게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각한 일이라고 판단한 병사는 문을 쾅쾅 두드리며 공주를 불렀고 결국 대답이 없자 어깨를 앞으로 내세우고 문을 부술 기세로 들이박기 시작했다.
왕성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자, 근처에 있던 상급 병사는 소리치며 병사에게 다가왔다.

“공주님이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뭐?! …이런 망할, 너 일단 부수고 있어! 빨리 다른 병사를 불러올게!”

병사는 다급하게 자신의 상사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상사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엘리샤의 방을 바라보았다.
혀를 차며 뛰기 시작한 상사는 손가락으로 그에게 지시를 내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

커다란 소동 끝에, 엘리샤는 눈을 떴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문을 잠그지 못하게 하고, 그녀의 방 밖에는 병사가  명이나 배치되었다.
엘리샤는 공허해진 눈빛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의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딘가 의사들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말이 돌기 시작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셋째 공주님이 설마 실어증에 걸리신 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소리 말게.”

그런 이야기는 조금씩 새어나가고 있었고,  이야기는 결국 왕성 내부에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무리 말단 병사라고 한들 이 소식을 접하지 않을  없었으며, 모두가 셋째 공주, 엘리샤의 안위를 걱정하거나 병을 추측하는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를 모를 리 없던 왕은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라의 내로라 하는 의사들을 모두 불러 진단하게 하고, 셋째 공주의 병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테베레스의 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옆에 있던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음 주에 용사들의 소환 예식이 있어서 바빴지만, 엘리샤가 병에 걸린 것은 중대한 사항이었기에 가만둘 수 없었다.
길거리에 엘리샤의 병환에 관한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고, 의사를 끌어모은 왕은 한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


“…….”

실패했다. 나는 패배했고, 내가 죽은 세계에 성하를 놓고온 꼴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천 번의 생을 거듭하며 세상의 거의 모든 마법을 통달했음에도, 세상의 거의 모든 체술을 익혔음에도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져야만 했다.
무능했다.
‘가브리엘’까지는 어떻게 내가 버틸  있었다고 한다지만, ‘미카엘’의 힘은 반칙이었다.
사람으로선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2316번의 생을 거친 나조차도 반격 한  해보지 못한  죽어야 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 협회에 들러 어깨너머로 배운 마법을 조합한 끝에 만든 오의도 ‘미카엘’의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를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성하를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성하 옆에 있던 ‘미카엘’을 설득하지 못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생각이 짧았다. 내가 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성하는 이제 없다. 나를 바라봐주던 성하는 이제 없었다.
다시 나는 몇천 번의 회귀를 거치며 새로운 성하를 봐야 하겠지.
성하라면 뭐든 좋아. 뭘 하든 좋아. 하지만, 하지만….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아…! 으, 으아아.”
“공주님…! 정신 차리십쇼!”

성하가 나 없는 세상에서 나를 잊으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자니, 어느샌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새  양손을 붙잡고 나를 제압했다.
안 그래도 미쳐버릴 것 같은 나날에, 이런 강압적인 방법을 쓰는 병사까지 있다니.
하지만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시선을 떨군 채 울적함에 빠질 뿐이었다.
내 손에 벗어난 성하는 무슨 삶을 살게 될까.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마냥 살아가는 와중에 내가 제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나는 그의 동료를 죽인 살인귀였고, 그나마 동정받을 이유를 하나 찾아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행복 앞에서 나에 대한 건 모두 흐려질 것이고,  성하에게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것이다.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죄어왔다. 내게 괴로운 사실일 뿐이었다.
이번에 있을 성하도, 성하니까 나는 좋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성하가 나를 잊고 살아갈 거란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런의욕이 나지 않았다.
수천 번의 회차를 거칠 때는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이해할 수 있던 성하를 놓치고 나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원래라면 성하가 용사의 능력을 얻지 못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엘리샤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기를 4주가 되었다.

“하아. 모든 의사가 결국 오진을 하거나 원인도 하나 찾지 못한 거로군.”

왕은 한탄했고, 결국 최후의 수단을 구해야만 했다.
용사를 소환해 환영했고, 그들이 이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니, 왕은 왕대로 엘리샤를 위한 조치를 해야 했다.
힘에 익숙해진 용사들이 자신의 막내딸, 엘리샤를 치유해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입을 열었다.

“셋째 딸, 엘리샤  테베레스의 병환을 찾고, 고치는 자에게는 작위를 주고 혼약까지 성사시켜 주겠노라.”

왕의 한 마디가 있던 후로부터, 나라는 크게 떠들썩해졌다.
전단지가 붙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그 공고를 보고 왕성을 찾기 바빴다.
공주를 뵙고, 공주의 병세를 읽어내리는 그들은 의사보다 지식이 얕았고, 오진하기 일쑤였다.
한숨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엘리샤는 짜증이 점점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자인 용사들은 객기를 부리느라 방이나 어지럽히고 가고, 영 본 적도 없는 진단 법이라면서 이상한 짓을 시키는 사람이 많을 뿐이었다.
공주와 혼사를 한 번 성사시켜보겠다고, 생을 한 번 여기서 역전시켜보겠다고 수없이 들락날락하는 사람 중에서 성하는 없었다.
치요와 ‘가브리엘’의 일로 엘슈펠로 떠난 성하가 엘리샤의 병환이나 그것에 관한 공고를 볼 수단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엘리샤의 마음은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쾅.

엘리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실어증이라고 진단하고 돌아서도록 행동했다.
증세가 없으니, 증세를 고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할 수 없었다.
엘리샤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어느 한 사람을 마지막으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사람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모두 성하가 혹시 나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혹시 나를 따라 2317번째의 세상으로 따라와 주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성하는 오지 않았고, 그녀는 그 일주일간 마음이 무너져 내린 뒤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말했다.
그녀는 먹지 않아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고, 넋을 놓고 지내는 탓에 그녀의 눈은 점점 공허해지고 있었다.

“흑.”

그녀는 잠글 수도 없는 방의 문을 닫은  문에 기대앉아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다렸고, 그 수많은 사람이 진료를 신청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를 들여보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런 시간 속에서도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한 채 좌절해야만 했다.

*

“‘미카엘’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셀렛 교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셀렛 교수는 그걸 알 턱이 없으니 어떻게든 얼버무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브리엘’이 있는 쪽에 시선을 힐끗 보낸 뒤 심호흡을 했다.

“뒤에 같은 종류의 신기인 ‘가브리엘’이 있습니다. ‘미카엘’을 보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 ‘가브리엘’이라니, 그런 게 있다는 말입니까? ‘미카엘’과 같은 종류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거죠?”

‘미카엘’이 국보처럼 취급된다는 걸 아는 나는 거래를 하는 거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미카엘’과 같은 종류의 신기, ‘가브리엘’의 존재를 들은 셀렛 교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 그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신기가 인간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치요 옆에 떡하니 서 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증명하죠…? 아, 시련 같은 게 있던가요.”
“흐음. 한 번 참여자를 찾아보죠.”

‘미카엘’은 자신의 칼자루를 만지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시련에 참여하게 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도 그런 걸까.
처음 만날 때부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부러  목소릴 말했다. 그 후 눈길을 뒤로 힐끗 돌리니 ‘가브리엘’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똑같이 시련을 주는 것은 할 수 있던 것 같았다.
어차피 치요도 있으니 누가 참여하든 시련엔 통과하지 못할 게 분명했지만, ‘미카엘’과같은 신기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셀렛 교수는 ‘미카엘’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지 턱을 만지작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부끄럽지만, 이 신기를 다룬 사람은 한 번도 없습니다. 칼자루를 잡을 수 없으니 무기로 쓸 수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이렇게 이동식 보관함에 넣어 봉한 채 연구에만 쓰고 있습니다.”

‘미카엘’을 연구하는 곳으로 안내한 셀렛 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찬란한 빛을 발산하는 ‘미카엘’을 가리켰다.
시련에 통과할 수가 없으니, 허락 또한 받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인 연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가브리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죠. 어떻게 생긴 거죠? 참가자는 여기  조수가  겁니다.”
[내가 ‘가브리엘’이네.]
“네?”

셀렛 교수는 자신이 그새 데려온 젊은 조수를 가리키며 시련 참가 대상이란 것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힐끗 돌려 무기를 찾는 셀렛 교수의 앞에 ‘가브리엘’은 인간 모습 그대로 나섰다.
백합으로 변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냥 인간으로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브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셀렛 교수는 얼빠진 목소리로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제 분수에 맞지 않아 손에 쥐는것조차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것뿐인데, 인간들은 그걸 시련이라고 꾸미고, 자신의 실패를 포장하려 하지.]

‘가브리엘’은 나지막이 입을 열어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랄하게 그들을 내리까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은 천천히, ‘미카엘’이 봉해진 유리관에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언니. 나야.]

쨍그랑.
‘미카엘’을 봉하고 있던 유리판이 간단히 깨지고, ‘가브리엘’은 ‘미카엘’의 칼자루를 잡았다.
셀렛 교수는 칼자루를 잡았음에도 시련에 들지 않은 ‘가브리엘’을 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가브리엘’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언니를 불렀다.
그러자, ‘미카엘’은 그에 답하듯 우우웅. 하고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언니? 교, 교수님. 이건 정말 같은 신기가 아닐까요.”
“신기는 인간으로도 변할  있는 것인가?”

조수는 기겁하며새된 목소리로 교수를 찾았고, 교수는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찬란한 빛을 발하던 검이 작은 소녀로 변했다.
사뿐히 땅을 밟은 ‘미카엘’은 황금색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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