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episode13. 가브리엘 (8)
푸른색의 백합이 발밑에 카펫처럼 깔리고, 주변에 줄지어 서 있던 건물들은 어느샌가 없어졌다.
백합만이 남은 초원에서, 오직 ‘가브리엘’의 존재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은 ‘가브리엘’은 자신의 오른팔을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신의 말씀을 빌려 목자의 일을 행하고자 하니, 신은 나의 청을 들어주소서.]
‘가브리엘’이 주문을 읊는 순간 사방에서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꽃잎이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밤하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달이 우리를 비추었다.
[…2316번의 삶을 살아온 아이야. 너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어린양이 아니다.]
2316번이란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회귀한 횟수가 무슨 버스 번호처럼 커다란 숫자를 가지고 있었다.
떨리는 시선을 옮겨 엘리샤에게로 향하니, 엘리샤는 이를 까득 깨문 채 ‘가브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지지 않아.”
엘리샤의 목소리에서는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엘리샤는 바로 자신의 허리 뒤쪽에 끼고 있던 휴대용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지지 않는다니, 오만한 말이다.]
‘가브리엘’이 손을 휘두르는 순간 사방에 휘날리던 백합 잎들이 한 점에 모였다.
그 점은 동시에 일직선을 그리며 엘리샤를 향했다.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엘리샤는 지팡이를 든 채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쇠뇌라니, 대체 꽃이 어떻게 화살을 쏠 수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던 내 궁금증을 푸는 장면이었다.
“나는, 용사의 사랑을 받은 자.”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 순간, 그녀의0회차를 알게 된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가 회귀하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중간에 서서 중재를 해야 하나 싶던 찰나, 엘리샤가 지팡이를 꺼내 들고 영창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용사를 사랑하는 자.”
마법을 쓸 땐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스스로 암시를 건다.
불에 관한 마법을 쓸 때는 모든 것을 불사른다. 같은 말을 통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킨다.
하지만 엘리샤의 주문을 듣는 순간 무언가가 다르게 느껴졌다.
무슨 마법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영창이었다.
“같은 시간을 몇천 번이고 지나쳐왔고,”
[꽃잎이여, 흩날려라!]
보통의 마법이면 세 구절에서 끝났겠지만, 그녀의 영창은 끝나지 않았다.
큐라가 주로 쓰는 불 마법, 인페르노조차 세 구절인데, 무슨 마법을 쓰는 걸까.
나는 중재해야 한다는 생각도 까마득히 잊은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은 엘리샤의 영창이 세 구절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같은 참상을 몇천 번이고 봤음에도 이 마음은 변치 않으니.”
‘가브리엘’이 손짓한 순간 백합이 즐비한 꽃밭에서 흩날렸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꽃잎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고, 그 꽃잎들은 이번에 세 점으로 모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백합 잎들은 어느새 형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쳐졌다.
“‘용사’여 내 부름에 응하라.”
엘리샤는 그 와중에 시선을 힐끗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만개.]
“페러렐.”
‘가브리엘’이 모은 꽃잎들이 세 갈래로 나뉘어 일직선으로 엘리샤를 향해 날아갔다.
엘리샤가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뒤로 넘어갔던 꽃잎들이 찬란하게 피어오르듯 폭발했다.
폭발의 여파로 튕겨 나간 엘리샤는 멀쩡한 모습으로몸을 일으켰다.
[아니…? 멀쩡, 하다고?]
‘가브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엘리샤는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닦으며 ‘가브리엘’을 노려보았다.
“‘가브리엘’ 너는 목자일 뿐. 인간들을 상대하는 ‘우리엘’이 아니야.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지팡이를 위에서 아래로 털 듯이 휘둘렀다.
이미 이겼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그런 엘리샤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그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없이 돌았다고만 생각해? 신의 힘을 빌리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 것만으론 부족해. 너는 나를 인도할 수 없어.”
[윽…! 신의 힘을 빌려 회귀하는 주제에 신을 능멸해?!]
엘리샤는 ‘가브리엘’을 도발하려는 건지 입꼬리를 올리며 ‘가브리엘’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동시에 비꼬는 듯이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신이라면 껌뻑 죽는 ‘가브리엘’이 자신의 화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소리치며 손을 위로 곧게 뻗었다.
밤하늘이 갈라지고, 그 틈새에서는 우주가 엿보이는 듯했다.
철컥. 무언가가 장전되는 소리. 그것은 ‘가브리엘’이 열은 틈새에서 나는 소리였다.
[장전!]
분에 찬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꽃밭 위로 울려 퍼졌다.
[‘가브리엘’의 고유공간 안에서 공격을 받고 생채기 하나 나지 않다니… 치유 마법을 쓰는 것처럼보이진 않았는데.]
‘미카엘’은 엘리샤 같은 경우를 처음 보는 건지 경악하며 엘리샤와 ‘가브리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엘리샤는 공격 마법을 쓴 것도,방어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치유 마법을 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주문에서 무슨 마법인지 감이 오질 않으니 무슨 마법을 쓰고 ‘가브리엘’을 상대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조준! 발사!]
‘가브리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 장전된 거대한 창이 엘리샤를 향해 떨어졌다.
말이 창이지,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성에 있을 만한 거대한 기둥이 하나씩 꽂히는 것처럼 보였다.
창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이 정도야?”
[대체 어떻게?]
먼지 바람이 일고 모두 엘리샤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찰나, 엘리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먼지 바람을 헤쳐 나왔다.
‘가브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하며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같은 시간을 몇 번이고 살아온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마법이야. 누구보다 시간은 많았고,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나에겐 별거 아닌 일이지.”
[개소리하지 마. 한낱 인간이 어떻게 천사를 뛰어넘는다는 말이냐!]
엘리샤는 당황한 채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가브리엘’에게 비법이라도 알려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번이고 공격을 맞춘다 해도, 엘리샤에겐 아무런 타격이 들지 않았다.
방어 마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였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최상위 방어 계열 마법일까.
엘리샤의 대답을 들은 ‘가브리엘’은 이를 까득 깨물고 엘리샤를 째려보았다.
“한낱 인간? 이상한 소리 하네. 내게 이 능력이 있는 순간부터, 나는 ‘한낱’이란 단어가 붙을만한 인간은 아니라는 걸.”
엘리샤는 그런 ‘가브리엘’의 외침을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능력은, 내 사랑에 반응해주었어. 그러니 이마음은 그런 단어에 어울리지 않아!”
엘리샤의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욱신거렸다.
사탄을 앞에 두고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떠올라버린 탓에, 내 마음은 이토록 아픈 것일까.
기억에 아릿하게 남는 장면이 나를 죄여왔다.
죽고 싶지 않지만, 내가 없는 세상은 사양이라 했던 그녀가 나를 끝없이 쫓아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빌었던 소원인 걸까.
[안 되겠다. 이건 ‘가브리엘’이 헤쳐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인도할 수 없다. 그럼 이 세상에서 지우는 수밖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 된다. 성하. 각오를 다져라. 그녀를 이대로 둔다면 성하의 앞날에도 문제가 생긴다.]
몇 번이고‘가브리엘’이 꽃잎을 날려 공격하는데도, 엘리샤에겐 통하지 않았다.
타격이 있는 것처럼 엘리샤가 휘청거리는데도, 어느새 보고 나면 상처는 지워져 있었다.
나았다는 감각보다, 통하지 않았다는 감각이 더 강했다.
결국, 보다 못한 ‘미카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안돼… 잠시만, 기다려줘.”
[이건,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니 내가 개입해도 되겠지.]
나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다.
손을 내밀었지만 ‘미카엘’은 이미 내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걸어나간 뒤였다.
자신의 개입이 괜찮을 거란 말과 동시에 그녀는 양손을 우아하게 벌렸다.
“안돼…! 잠시만, 죽이지 마.”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이냐! 우리를 괴롭힌 녀석이 아니냐! 성하의 의견을 존중한다지만, 이것은 아니다. 우리의 앞날에 대한 문제다.]
나는 엘리샤를 동정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굳게 잡으며 ‘미카엘’을 부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춰선 채 고개만 힐끔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큐라가 내 몸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윽.”
[…미안하다. 나는, 성하가 무슨 마음인지 알고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녀를 동정하고 있는 거겠지. 그녀가 회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성하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놔두라고만 하는 거라는 걸. 하지만 2316번이다. 그 긴 시간의 이야기는 모두 들을 수 없다. 결국, 성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큐라의 말에 말문이 막힌 순간에, ‘미카엘’이 슬픈 눈으로 내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입에 담았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찌르니 내 입은 닫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회귀를 그렇게 했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그 질문엔 ‘아니’였다. 한 회차에 1년이라고 해도 2000년이 넘어간다.
나는 결국 ‘미카엘’의 말을 이기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어?”
[…언니!]
엘리샤가 새된 목소리로 ‘미카엘’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가브리엘’은 갑자기 끼어든 ‘미카엘’을 보고 놀란 듯했다.
[‘가브리엘’이 널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신나?]
“끅! 어, 어떻게.”
[마법으로 장난질 쳐놓은 걸 내가 잡지 못할 리 없잖아.]
‘가브리엘’이 공격했을 때와는 다르게, ‘미카엘’이 주먹을 휘두르자 그대로 엘리샤의 배에 꽂혔다.
허공에 붕 뜬 엘리샤는 이내 바닥을 뒹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엘리샤는 자신의 마법을 꽤 신뢰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도 ‘미카엘’의 손짓 한 번에 사라진 듯했다.
[언니가 나설 것까진…]
[너는 목자니까, 이런 자는 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해.]
‘미카엘’의 개입에 난처한 표정을 짓던 ‘가브리엘’은조심스레 ‘미카엘’을 말렸다.
자신이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카엘’은 나와 공명하고 나서 0회차의 기억을 엿봤다.
그녀가 용사의 능력을 받은 후로 2천 번의 회귀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브리엘’이 지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 ‘미카엘’은 거르려고 한 건데.”
엘리샤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지금 네년의 면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우연이네. 나도 그래. 내가 뭔 짓을 하더라도, 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미카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엘리샤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으며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잘됐군. 그럼 보지 말자고.]
‘미카엘’은 엘리샤의 대답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빛이여, 창대하리라.]
엘리샤가 무슨 마법도 쓸 새 없이 ‘미카엘’의 전방은 빛으로 뒤덮였다.
빛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재가 되어버린 백합 위에 누워있는 엘리샤가 있었다.
나는 내 마음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이 광경을 봐야만 했다.
큐라의 손을 뿌리치고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성하?]
큐라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엘리샤의 주검에 다가가 무릎을 꿇자, ‘미카엘’은 간결하게 사과의 말을 보냈다.
‘미카엘’의 잘못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속이 떨리는 듯했다. 몸은 눈물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바들거렸다.
[한심한 꼴을 보여서 미안하네.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아냐.]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혹시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던 건 아니지?]
[…성하가 슬퍼하잖아.]
‘가브리엘’은 죽은 엘리샤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말을 이었다.
‘미카엘’이 기운 없이 대답하자, ‘가브리엘’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가지런히 누운 엘리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어 일말의 희망이라도 바랐지만, 그녀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렇게 상심에 젖어있을 때, 나는 그녀의 품에서 나이프를 찾았다.
모험가에겐 여차할 때를 대비해 두 번째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
그런 철칙을 잘 지키는 엘리샤이기에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레 나이프를 잡았다.
손이 이렇게 떨리는 일이었던가, 나는 두 손으로 나이프가 떨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하나, 둘, 셋.
[성하…? 성하!? 성하!!!]
[대체 왜… 왜…]
[인간의 생각은 도통 모르겠군. 대체 뭐 때문에…]
셋 세는 순간에 숨을 참고 칼을 내 심장에 밀어 넣었다.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내 이변을 알아챈 ‘미카엘’이 당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그 뒤로 큐라가 따라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를 잡고 흔들었다.
‘가브리엘’은 내 꼴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