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episode13. 가브리엘 (7)
[뭐하느냐?]
계단에 앉아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그때, 큐라가 뒤에서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녀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내가 없어서 나를 찾으러 나온 것 같았다.
[옆에 여자는 누구… 설마.]
“…….”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엘리샤를 보더니 큐라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엘리샤는 입을 꾹 다문 채 큐라를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심장이 크게 뛰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년 때문에 성하가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진 아느냐?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서 성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아무리 ‘미카엘’과 공명하고 있다 한들 성하도 사람이다. 너 같은 충격이 계속 가해진다면 성하는 무너질 것이다. 이, 이….]
“안돼. 죽이면, 안돼.”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엘리샤에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큐라는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녀를 꾸짖으며 지금의 상황과 내 심정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손톱을 세우려 했고, 나는 나지막이 그녀를 멈추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여자를 살려두라고 하는 것이냐.]
“미안해.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줄래?”
“성하….”
큐라는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설명을 해야 할까. 내가 봤던 기억들을 말해주기엔 너무 방대한 양이었고, 내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하자니 너무 복잡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이자, 옆에 있던 엘리샤가 내 이름을 애절하게 불렀다.
젠장.
[…왜 다 나가? 뭐야.]
조금 진정되려고 할 때마다 뒤에서 자꾸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이번엔 ‘미카엘’이 대문을 조심스레 열더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남의 집 문 앞에서 우르르 모여 뭘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거부감이 드는 얼굴이구나. 썩 꺼져라.]
‘미카엘’은 엘리샤의 얼굴을 보더니 손을 내저어 그녀를 물리려 했다.
아무래도 전 회차에 자신이 ‘카보드’를 순순히 받고 천계로 떠났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엘리샤를 볼 때마다 자신의 역겨움이라도 새삼 깨닫게 되는 건지, 안색을 새파랗게 물들인 채 고개를 돌렸다.
“…공명했으면 어느 정도 알겠네. 알 수밖에 없겠지. 성하의 기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엘리샤는 천천히 ‘미카엘’의 몸을 한 번 훑어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미 ‘미카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아니, 확실히 많이 알고 있겠지.
여기 있는 모두가 엘리샤의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하가 전 회차를 기억하는 것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뿐이지 본질은 바뀌지 않아. ‘미카엘’. 인간에 대해 정을 붙일 일도, 관심을 가질 일도 없던 너는…!”
[닥쳐!]
엘리샤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미카엘’을 향하고 있었고, ‘미카엘’은 어금니를 까득 깨물고엘리샤를 향하고 있었다.
엘리샤의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 ‘미카엘’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같은 선택을 했다고! 성하를 버리고 ‘카보드’를 선택한 게 너의 본성이라고… 큭!”
하지만 엘리샤는 그런 ‘미카엘’의 분위기에도 압도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하며 알게 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다른 회차의 자신을 목격하거나, 듣지 않는 한,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그걸알고 있는 엘리샤는 ‘미카엘’을 꾸짖듯이 소리쳤고, 참다못한 ‘미카엘’은 분을 이기지 못해 엘리샤의 목을 붙잡았다.
가녀린 팔임에도 얼마나 힘이 센지 한 손으로 엘리샤의 목을 잡은 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경동맥이 막힌 그녀는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허공에 발버둥 쳤다.
엘리샤의 얼굴은 피가 쏠려 붉어지고, 눈은 충혈되고 있었다.
“끄윽. 끅.”
[그래. 내가 추잡하고 역겨운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아.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성하는 이미 그런 ‘나’에게 배신을 당하고 왔던 거잖아. 그럼 그렇게 상처받은 성하는 누구에게 사죄를 받아야 하지?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배신을 당한 성하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지? 나는 그런 상처를 받았는데도 나를선택해준 성하를 따를 거야. 그것이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야.]
엘리샤가 ‘미카엘’의 팔을 잡고 주먹으로 후려치는데도 ‘미카엘’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나지막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자신보고 역겹다.라고 표현한 그녀는 어느새 목소리에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와 공명하고 기억을 엿본 그녀는 자신도 자신이 추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전 회차의 자신을 인정하며 속죄하겠노라 말했다.
“큭, …죽, 여봐. 주도, 권은… 결국, 내게 있고… 너는 다음, 회차에서 또 똑같은 ‘미카엘’이 되어, 있을 테니.”
[……!]
“쿨럭 컥! 커흑!”
‘미카엘’의 손에 힘이 점점 강하게 쥐어지자, 엘리샤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힘겹게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은 ‘미카엘’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손에 힘을 풀었다.
무너지듯 땅에 주저앉은 엘리샤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기침을 토해내며 거칠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제길. 제길! 어째서 이런…. 어째서 그런 신님이 주실 법한 능력을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냐. 너 같은 역겨운 년한테 그런 능력을 주실 리 없는데도.]
“하, 하하. 역겹다고? 그래. 역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쩌지? 이건 성하가 준거라서 말이야.”
‘미카엘’은 자신이 다음 세상에서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는지 혀를 차고 있었다.
‘미카엘’이라면 엘리샤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데 죽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른다. 세계를 다시 쓴다. 와 같은 회귀 능력이 있는 엘리샤를 보며 신님을 원망하듯 말을 이었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사랑해서 줬었다. 라고 말을해야 하는 건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엘리샤는 비틀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리고선 힘 빠진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더니 능력에 대해 밝혔다.
내가 준 것이라고.
[…뭐?]
능력을 준 사람의 이름에서 내가 나오니, 큐라와 ‘미카엘’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녀들의 시선에서는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라는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0회차의 이야기야.”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바싹 마른 입을 겨우 떼어냈다.
이 말을 해도 될지, 나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이 상황까지 왔으니 모두에게 말을 해야 할 것같았다.
엘리샤를 기점으로 가장 첫 번째 회차를 입에 담았다.
그러자 엘리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큐라와 ‘미카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용사였고, 몇 번의 마왕을 잡은 끝에, 모든 마왕은 죽어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마족의 왕. 사탄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참패했고, 그와 동시에 내 용사 전용 능력. ‘용사’를 엘리샤에게 건넸으며, 그 능력이 엘리샤에게 간 순간 ‘회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미카엘’은신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된다. 능력을 다른 이에게 준다고 바뀌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사실이었고, 나는 그녀의 의견에 옳다, 옳지 않다. 라는 말을 해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자, ‘미카엘’은 [세상에.]라고 말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용사는 99명이라 했는데, 어째서 성하의 능력이 ‘용사’인 것이냐? 그 능력의 효과는 무엇이었느냐?]
큐라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내 능력에 관해 물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는 사실이었다. 다른 용사들은 자신에 맞는 적성이라던가, 사인이라던가, 그런 요소에 의해 능력이 정해지는 한편, 나는 감도 잡히지 않는 ‘용사’라는 능력이었으니까.
그 능력이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었다.
0회차 때 한 번도 쓰지 못했다면, 반대로 그 ‘용사’라는 능력의 이름은 공백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몰라. 어쩌면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엘리샤에게 보내준 순간 바뀌었다면.”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이야기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밤하늘에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새벽을 반기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엘리샤. 이제 돌아가. 나중에 연이 닿는다면 다시 이야기하자.”
“싫어.”
나는 조금이라도 자기 위해 마무리하려 했다.
엘리샤에게 돌아가라 했지만, 엘리샤는 칼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싫어. 싫어! 싫다고! 또 성하는 어느새 여자를 모을 거잖아. 2주 후에는 테베레스에 돌아와서 세라를 만날 거고, 베르틱에 가서 ‘아크’를 주워올 거잖아. 왜 자꾸 여자를 모으는 건데? 남자가 동료로 있으면 든든하지 않아? 그보다, 왜 날 또 보내려는 거야? 나 없을 때 또 여자들이랑 몸을 섞고 아이를 만들고 가정을 꾸리려는 것 아니야? 솔직히 성하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은 없잖아. 여기서 인연을 쌓고, 애정을 쌓으면 여기서 살 생각이잖아. 난 성하를 잘 알아. 그 수많은 회차 속에서 성하가 원래 세계로 돌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성하는 사실 원래 세계가 싫었잖아. 부모님 걱정을 하면서 돌아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주제에 정말로 돌아가려 한 적은 없잖아. 고민만 할 뿐이었지. 언제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막상 이곳으로 오고 나니 돌아가고 싶다고 버릇처럼 외칠 뿐이었잖아. 안 그래? 성하는 왜 나만 그렇게 내치려고 해? 성하는 어차피 여기서 살 건데, 나를 버리려고 해? 맨날 쌓아놓은 인연을 떠날 사람처럼 정리해놓고서 떠나진 않아. 그저 자신이 선택한 여자랑 도란도란 살 뿐이야. 나는 그 꼴 못 봐. 전 회차에서는 다 죽여버리고 싶었어. 성하랑 몸 섞는 여자들을 보고 눈 감아야 했다는 게 얼마나 치욕스럽고 화가 났는지 알아? 정신이 나가버리는 줄 알았어. 설마 리타마저 성하의 몸을 탐하나 싶었어. 뭐, 그랬다면 배를 갈라서 죽여버렸겠지만. 아무튼. 이 이상은 안 돼. 나는 떠나지 않아. 성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성하에게 꼬리 치는 년들을 모두 쳐내지 않는 이상 나는 안심할 수 없어. 돌아갈 수 없어. 좋아해. 제발. 나만 바라봐줘. 나만 사랑해줘. 나랑만 몸을 섞고 사랑을 속삭여줘.”
엘리샤는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주먹을 아래로 강하게 휘둘렀다.
그리고선 앞으로 내가 할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세라를 만났던 여관을 떠올렸고, ‘아크’를 가져왔던 심해를 떠올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녀는 정말 나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한 것 같았다.
엘리샤의 말을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내 생각을 읽는것처럼 정확한 부분을 짚었다.
질투가 곳곳에 배어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실로 끈적거렸고, 내 몸을 휘감는 듯했다.
소름이 돋아올랐고, 나는 발걸음을 주춤 뒤로 물렸다. 엘리샤는 내가 뒷걸음질 친 만큼 앞으로 다가왔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성하가 싫어하지 않느냐!]
“시끄러! 드래곤이라 해서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
듣다못한 큐라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엘리샤를 향해 소리쳤다.
엘리샤는 큐라의 일갈에도 물러서지 않은 채 날을 세우고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대체 집 앞에서 뭐해?]
그렇게 큰 소리가 몇 번 오가더니, 집주인의 파트너, ‘가브리엘’이 문을 열고 우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제 주인과 열심히 비비다 나온 건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윽.”
[…‘가브리엘’ 네가 목자랬지. 저기 제 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양이 있어.]
[어떻게?]
엘리샤는 ‘가브리엘’을 보자마자 숨을 삼켰다.
‘미카엘’이 엘리샤를 죽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회귀에 관해선 손쓸 도리가 없었다.
‘가브리엘’에게 인도를 맡기기로 한 건지, ‘미카엘’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눈을 끔뻑이며 엘리샤를 힐끗 바라보았다.
[‘회귀’를 하는 인간이야.]
[…언니. 목자는 양을 치지 늑대를 치진 않아. 알잖아. 그런 능력은 신님의 손 위에서 노는 존재라고, 우린 그 밖의 양을 칠 뿐이야.]
‘미카엘’의 말을 들은 ‘가브리엘’은 자신의 영역 밖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게.]
‘가브리엘’의 손짓에 세상이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