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episode13. 가브리엘 (6) (88/98)



〈 88화 〉episode13. 가브리엘 (6)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엘리샤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건…”

엘리샤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바들거리는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진정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전 회차의 기억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0회차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스테이터스.”

 회차 탓인지, 잘 쓰지도,  보지도 않는 스테이터스 창을 띄웠다.
내 앞에는 사용자에게만 보이는 푸른 페이지가 떠올랐다.
앞에는 내 이름부터 시작해, 내 특성이 적혀 있었다.
이러니까 용사들이 약할 수가 없지.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지, 무엇이 특기인지 나열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보는 것은  능력이었다. 능력에 적혀 있는 부분만 글자가 깨져 있었다.
처음에는 읽지 못하게 필터링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강한 능력일까, 라는 생각이  적도 있었다.
반대로 내게 ‘있던’ 능력이었고, 지금은 없기에 지워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조금 버거운 일이었다.

“…얼마나 알고 있는진 모르지만, 그래. 이 능력은 성하에게 받았지… 성하에게 받은 건 잊지 않고 있으니까. 잊을  없으니까.”

엘리샤는 체념한  허탈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다시금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전율이 일었다.
‘가브리엘’도 혼자선 버거운 사탄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죽어야 했던 내가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란 명목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인 내가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을   번도 쓰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능력을 엘리샤에게 넘긴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엘리샤에게 옮겨지고 나서야 의미를 얻었고, 개성을 얻었다.
그것의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능력을 개화시키지 못했고, 엘리샤는 개화시켰다는 의미인 걸까.

“이건 줄 수 없어.”
“왜?”
“이게 있어야만, 이게 있는 나여야만 해.”

그렇게 생각에 잠길 무렵, 엘리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의문에도, 그녀는 이미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줄 수 없다고 단칼에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버틴 이유도, 지금까지 미치지 않은 이유도 이 능력이 있어서였어. 성하가 있어야 해.  능력이 없으면, 내게서 성하가 멀어져. 나는… 나는 성하를 포기할 수 없는 만큼,  능력을 포기할 수 없어.”

엘리샤는 고개를 푹 숙인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옷자락은 그녀의 주먹에 의해 꼬깃꼬깃해질 정도였다.
나는 엘리샤의 말을 끝까지 듣기 위해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성하가 내 눈앞에서 몇 번을 죽는다 해도, 다시 시작할  있다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해.”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눈을 응시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에서는 필사적인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몇 번을 죽었을까. 나는  알지 못했다.
그야 나는 전 회차와 0회차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니까.

“이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 이 마음을 가지고, 성하와 함께하고 싶어… 나는 성하가 없으면 안 돼. 성하가 꼭 필요해. 성하만, 성하가 있어야만… 나는 나로 있을 수 있게 돼. 하지만… 성하가 나를 싫어한다면 나는 버틸 수가 없어서….”

엘리샤의 목소리는 떨려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같았다.
0회차만 봐도 그렇게 애틋한 기억이 아닐  없는데, 대체 그녀는 몇 회차를 건너온 걸까.
나는 착잡한 마음에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심정을 아는 건지 바들거리는 손을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왜!”

그녀는 참아오던 감정을 터뜨리듯, 큰소리로 내게 의문을 품었다.

“왜 성하는 나를 사랑할 때면 죽고, 죽지 않을 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어째서, 어째서 대체 그런 운명을 내게 보여주는 거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 마음을 찢어놓아야 속이 시원한 거야? 어째서 내게 그런 광경만을 보여주는 건데. 나도, 나도 아파. 성하가 죽으면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진  같아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하지만 죽지 않은 성하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게 되는 걸 보는 건  괴로워.”

엘리샤는 내 멱살을  잡고 추궁하듯 소리쳤다.
자신이 봐 왔던 것은 지옥이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그녀가 무엇을 봐 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사랑은 변해. 회차가 거듭되고, 내가 행동을 달리할 때마다 성하가 사랑하는 이는 달라지고, 죽는 시점도 달라지고, 성하의 마음가짐 또한 달라져. 운명 같은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떻게 나랑 이뤄질 때면 성하는 죽어버려. 이게 내 운명인 걸까 하고  번은 체념하게 돼.”

 옷이 늘어날 정도로 꽉 잡아당긴 그녀는 어느새 내 품에 들어와 몸을 떨고 있었다.
톡. 하고 엘리샤의 눈에선 커다란 눈물이흘러내렸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이 능력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있어. 그런 생각이 나를 절망하지 않게 해 주었어. 그래서 성하에겐 미안하지만 줄  없어.”
“그래.”

엘리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안 된다. 고.
어차피 그 능력은 엘리샤에게 있을 때 ‘회귀’인 것이지, 내게 있을  ‘회귀’인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회귀’라는 능력이 갖고 싶긴 했다. 수틀리면 다시 시작할 기회는 좀체 없으니까. 아니, 아예 없다.
만회할 수는 있어도, 선택하기 전으론돌아갈 수 없는 게 불변의 진리였다.
내게 돌아오면 단순한 ‘용사’라는 능력이 될 뿐이라는   알고 있었기에,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성하. 성하는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

엘리샤는 불안 반, 기대 반 섞인 눈빛으로 내게 질문했다.
전이라면 내쳤을 상황에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고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대답한 뒤 하늘을 우러러보자 찬란하게 빛나는 달이 보였다.

“성하.  성하를 사랑해. 성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잖아. 아니야? 회차를 거듭하는 사람은 회차를 거듭하는 사람에게서만 이해를 받을 수 있어. 성하도 회차를 거듭할수록 알게 될 거야.”
“뭐…?”
“성하는 이제 죽더라도 다음 회차에서 눈을 뜨겠지. 그럼 뭘 할까. 잘 알던 사람을 동료로 삼으려고 할 거야. 잘 알던 사람은  봤으니 초면에 그를 꿰차고 있겠지. 하지만 상대는 뭐라고 생각할까?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왜 이리 눈치가 빠른 거지?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걸 알고,  습관을 아는 거지? 그리고 그 끝에 상대는 성하와 거리를  거야. 불안할수밖에 없거든.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이렇게 친절하면서, 나에 대해  안다는 사실이.”

그녀는  손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사랑을 속삭였다.
자신만이 나를 이해할  있고, 나만이 자신을 이해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되묻는 순간,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하를 원해. 성하만을 보고, 성하만을 사랑해. 성하, 제발. 내 말을 들어줘. 나와 같이 있어 줘. 돈도, 몸도, 권력도 다  수 있어. 성하가 얼마나 아는진 몰라도, 나는 0회차부터 성하를 좋아했어.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린 적도 없어. 칭찬해줘. 일편단심이야.  마음은 변치 않아. 성하가  번을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내가 몇 번을 죽더라도 변심 같은  없어. 나와 함께해줘. 나를사랑해줘. 나만을 바라봐줘.”

그녀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얼마나 죽음을 반복하고, 얼마나 같은 삶을 반복하고, 얼마나 같은 시간을 걸어온 걸까.
그녀는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위화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게 바로 회귀하는 사람의 부작용인 걸까.
나는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허. 난 이미 국가전복죄에 살인죄까지 곁들여진 거 아니었어?”
“내가 내 나라를 버릴게. 이 나라에서 살아도 좋아. 성하랑 함께라면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
“그럼 권력이랑 돈은 어디서 주는 건데?”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씹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눅 들기는커녕 필사적으로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 그녀의 말을 긍정으로 답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제발.면죄부를 줄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돈을 들고 도망칠게. 뭐든 할게. 제발. 난 성하가 없으면 안 돼. 성하가 이렇게 계속 다음을 기억하면,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도 없잖아…? 성하가 싫증나지 않도록 잘 할게. 응? 기라면 기고 벗으라면 벗을게. 뭐든 할  있어. 어긋난 사랑이라도 좋아. 나만, 나만 바라봐준다면 뭐든 할게.”

그녀는 떨리는 동공의 초점을 내게 맞춘 채 말을 이었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손은 내 손을 더듬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몸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다음 회차를 기억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회귀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자포자기한 채로 내게 빌었다.
광기 어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 정도면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만. 진정해.”
“…받아주려고?”
“내게도 생각할 시간은 있어야지. 애초에 이쪽은 지금 너한테서 도망쳐온 거라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깐 감싸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폭주를 멈춰 세운 건데, 그녀의 생각에는 오직 사랑뿐인  같았다.
나는 당연한 걸 요구함과 동시에 지금 나의 상황을 전달했다.

“…미안해.”

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엘리샤는 눈을 잠시 내리깔고는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있다는소식 듣고 바로.”
“잘 곳은 구했어?”
“…아니.”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 생각에 잠겼다.
슬슬 돌아가서 잘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엘리샤에게로 시선이 갔다.
나는 큐라를 타고 왔는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올 수 있던 걸까. 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오게 된 경위를 물었다.
역시 마법에 유능하니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건가.
차차 넘겨두고, 그녀의 잘 곳을 물었더니,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나를 찾아다닌  같았다.

“성하는 어디서 자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 잘 곳을 구했거든.”
“…여자?”
“여자긴 한데 나랑은 관계없어.”

이번엔 반대로 엘리샤가 내  곳을 물어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 뒤에 있는 건물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리샤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그녀의 시선이 건물로 향했다.
나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들이 은근 나에 대한 평가를 좋게 해줘서 고맙지만, 너무 과한 평가라고 생각이 든다.
당일 도착한 곳에서, 당일에 여자를 꼬실 능력을 가지고 있던 적은 없었다.

“흐음….”
“어디서 자려고? 지금이면 여관도 손님은 안 받을 땐데.”
“그러게. 성하랑 이렇게 있으면 굳이 안 자도 괜찮은데.”

 말을 듣고 잠시 신음하던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리 모험을 좋아하는 공주라지만 노숙을 하기엔 세상이 조금 위험하지 않나?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당장에  일들을 생각하면 화를 내도 마땅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런 화도 누그러진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녀는 슬쩍 다가와내 옆에 달라붙어 앉았다.
은근슬쩍 자신의 마음을 어필하는 그녀가 그렇게 안타까워 보일 수가 없었다.

“성하.”

엘리샤는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성, 하…?”

달을 바라보고 있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복잡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던 나머지, 0회차의 기억을 계속해서 보고 있던 나의 마음이 미어지고 있었다.
데자뷔를 보면 내게 없던 힘이 솟아나고, 기술이 생길 때처럼, 0회차의 기억을 볼 때면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몸과 마음에 생동감 있는 감정이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고, 결국 눈물은 내 볼을 타고 내렸다.
엘리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한심할 정도로 나는 우유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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