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episode13. 가브리엘 (5) (87/98)



〈 87화 〉episode13. 가브리엘 (5)

[…언니의 보증이라면 믿겠다만은…]

‘미카엘’이 보증을 서니, ‘가브리엘’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숨을 내쉬며 한발짝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역시 신기다 보니, 자매간의 서열이 확실한  같았다.
아니, 원래 자매지간에도 저런 서열이 있는 건가?

“슬슬 이동할까?”

어느새 그릇을 비운 치요는 다른 사람들을  번 슥 둘러보고는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에 빠졌던 ‘가브리엘’은 깜짝 놀라 치요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근데 치요는  하다 왔어?”
“으음… 심리치료…? 정신과에서 인턴 하다가 왔어.”
“뭐야. 머리 좋은 사람이었네.”

길거리로 나선 나는 치요에게 살짝 다가가서 조심스레 그녀의 과거를 물었다.
나처럼 죽어서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수도 있나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자 치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말에 대답해주었다.
갑작스러운 의예과의 등장에 나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었다.
취업준비생으로 지내던 나와는 꽤 다른 길을 밟고 사는 사람이었다.

“성하는?”
“나는 취업준비….”

치요는 해맑게 나를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나만 듣는 것은 치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말을 하자니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레 입을열었다.

“아하하. 잘  수 있을 거야.”

치요는 멋쩍은 듯 웃더니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위로했다.
어차피 이제 죽어서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떻게 할 셈이냐?]
“무슨 여자?”
[우리를 죽이려 했던 보라색 여자.]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 뒤에서 큐라가 뭔가 떠올렸는지내 옷을 슥 잡으며 물었다.
순간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되물었지만, 그녀의 보충 설명에 누구를 말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여자?”
“아아… 테베레스라는 곳에 엘리샤라고 있어.”
“성하는 인기쟁이구나?”
“아니야….”

큐라의 말을 들은 치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0회차의 기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감정은 없었을 텐데.
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아군이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복잡했다. 안쓰럽기도 했으며,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계속해서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알았어. 돈은 줄 대로 줬으니 집은 알아서 구할  있겠지? 이 나라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충분해.”
“‘가브리엘’. 그래도 언니인데 한 번 정도는 재워줄 수 있잖아?”
[그건….]

치요의 말을 부정하고 있자니, 앞장서서 걷던 ‘가브리엘’이 고개를 힐끗 돌렸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이제 헤어지자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이었다.
뭐 돈도 돈 대로 받았으니 상관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카엘’과 큐라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치요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치요의 말을 들은 ‘가브리엘’은 쩔쩔매며 치요를 향해 해명할 틈을 찾고 있었다.

[푸핫. 그 잘난 ‘가브리엘’이 인간한테 쩔쩔맬 줄이야.]
[…내가 직접 세계에 영향을 주면  된다는 말씀만 없었다면 이러지도 않았어.]

‘미카엘’은 ‘가브리엘’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더니 빵 터져선 고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입을 비죽이며 자신이 을의 입장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인간을 통해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그런 약속이 있었기에 치요에게 쩔쩔매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런 말씀만 없어도 나는 금방 그 왕을 죽였을 거야.]
[풋. 네 힘으로 그 왕을 잡기엔 역부족이지 않니?]
[…버겁긴 하지. 하지만 못 이기는 건 아니야.]

‘가브리엘’은 자신의 과업만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자 ‘미카엘’은 그녀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입을 비죽였다.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구 인류의  사탄은 ‘가브리엘’이라도 어렵다니, 대체 얼마나  거야.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대체 구 인류는 얼마나 강하게 설계된 것일까. 신인류는 일부러 약하게 만든 건가?
나는 신음을 토해내며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표정이 왜 그러느냐? 식은땀이 나고 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건지, 큐라가 나를 깨웠다.
퍼뜩 차린 정신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너무 생각에 잠겼던 것 같았다.
아직도 떠오르는  사탄의 모습이 눈에 생생하게 남았기에 그런 걸까.
 생각이 미치자, 노아가 들고 있던 ‘아크’가 기억에 맴돌았다.
뭐, 필요성을 따지자면 힘을 되찾은 ‘미카엘’ 하나로 충분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큐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



사사로운 대화가 오가고, 결국 치요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된 나는 그녀의 큰 집에 놀랐다.
거대한  안에 치요, ‘가브리엘’을 더불어 4명의 동료가 그녀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뭐야. 새로운 동료? 치요랑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네. 반가워. 나는 뤼덴이야. 마족만 아니라면 환영이야.”

처음에 집에 발을 들인 순간,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칼칼한 성격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군더더기 없는 근육으로 가득  있었으며, 무엇보다 나보다 키가 컸다.

“반갑습니다. 유성하라고 합니다.”
“뭐야. 용사… 인가?”
“용사 맞아. 그래도 이미 마왕을 처치했대. 괜찮아.”

나는 그녀의 환대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의 형식이 네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대답을 망설인  뒤로 치요가 들어오면서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냥 이쯤 되면 나 마왕  번째로 잡았다고 현수막도 걸 판이다. 다 말하고 다니네.

“뭐?! 벌써 마왕을 잡은 사람이 있다고? 며칠 됐다고!”

뤼덴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대체 뭔가 하니 거실을 중심으로 2층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난간에 몸을 기댄  소리치고 있었다.

“우와. 너랑 같은 빨간 머리카락. 근데 얘가 더 이쁘다.”
“아니, 나한테  그래?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엠마에요.”

뤼덴은 그새 내 뒤에 있던 큐라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엠마는 뤼덴의 말을 듣고 항의하듯 계단을 뛰어오더니, 바로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선 그녀도 큐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머리카락 진짜이쁘다.”
“뻣뻣한 것 같으면서도 찰랑거리는 것 같아. 신기해. 따로 관리해?”
[나, 나는… 읏, 마, 만지지 마라!]

뤼덴과 엠마의 질문 공세를 버티지 못한 큐라는 내게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고개를 휘적휘적 저으며 머리카락을 사수했다.
그리고 나선 도망치듯 내게로 다가와 숨었다.

“근데 뒤에는… ‘가브리엘’의 가족?”
“멍청아! ‘가브리엘’은 신기잖아. 가족이 있겠냐.”

큐라가 내게로 도망쳐 숨으니, 엠마는 아쉽다는 듯 입을 비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시선을 돌린 그녀의눈에는 ‘미카엘’이 들어왔는지 ‘미카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미카엘’과 ‘가브리엘’을 번갈아 보았다.
눈동자의 색은 달랐지만. 그녀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뤼덴은 주먹으로 엠마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언니 ‘미카엘’이야.]

뤼덴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워하던 ‘가브리엘’은 힐끗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미카엘’을 소개했다.
그러자 맞은 곳을 만지작거리던 엠마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자신을 때린 뤼덴을 홱 돌아보았다.
뤼덴은 휘파람을 불며 엠마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어? 손님이야? 사람이 많네.”
“…동료일 수도 있잖아.”

현관 앞쪽에서 인사를 하며 어정쩡하게  있자니,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하니 치요가 말했던 4명의 동료  두 명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연두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이 들어오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보니 이 파티는 그냥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파티였다.
그럼 여기서 전위를 맡는 건 뤼덴 하나뿐인가?
뭐, 한 곳에서 생활하기엔 성별이 하나인 곳에 훨씬 편하긴 하겠지만.

“얘는 멜. 그리고 쟤는 비샤야.”
“반가워!”
“…안녕하세요.”

치요는 연두색 머리카락의 소녀의 이름과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의 이름을 차례로 알려주었다.
멜은 활기찼고, 비샤는 조금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유성하라고 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일단 전위는 나랑 뤼덴이 맡고 있고, 중위는 멜, 후위는 엠마와 비샤가 맡고 있어.”
“치요가 전위야?”
“응. 일단 ‘가브리엘’이 쇠뇌라고 했으니 그에 따른 포지션은 미리 잡아두는 연습을 하고 있지. 아직은 전열 마법사지만.”

거실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나는 치요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듣게  포지션이 조금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치요는 내 물음에 고개를끄덕이더니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렇구나… 근데 쇠뇌여도 후위 아닌가?”
“그런가? 그래도 ‘가브리엘’이 지켜주니까 차라리 내가 전열에서 모두를 막아주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만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치요는 잘 모르겠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는지 그녀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파티에는 앞에서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 적어지는 게 당연하니 자신이 대신  역할을 맡는  같았다.
아무리 ‘가브리엘’을 들고 있다 할지라도 조금 무모한 포지션이긴 했다.

“저, ‘가브리엘’의 언니신가요? 엄청 아름다우세요!”
“엄청난 분위기, 엄청난 품격. 역시 ‘가브리엘’의 언니인가.”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더니, 뤼덴과 엠마가 ‘미카엘’에게 가까이 가서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미카엘’은 딱히 관심 없다는  그녀들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나를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제 거에요. 너무 달라붙지 말아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말한 뒤 ‘미카엘’의 팔을 잡아 내쪽으로 끌었다.
그러자 뤼덴과 엠마는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옆에 있는 ‘미카엘’을 보아하니 ‘미카엘’은 만족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씩 웃고 있었다.
귀찮으니 나보고 떨어뜨려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 같았다.

[질투했어?]

내 귀를 잡고 살짝 잡아당긴 ‘미카엘’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에 바람이 들어오니 몸이 움찔거렸다.

“글쎄다.”
[성하는 솔직하지 않아서 재미없어.]

나는 애써 표정을 굳힌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 채 대답했다.
그러자 ‘미카엘’은 나를 톡 밀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하는 하렘을 만드는 거야…?”
“아니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왼쪽에는 ‘미카엘’, 오른쪽에는 큐라를 끼고 앉은나를 치요가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하렘이라니 얘는 무슨 소리래. 물론  회차에서도 남자 동료를 한 번도 구해본 적이 없는  같지만.
난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부정하려 고개를 내저었다.


*

시간이 흐르고 저녁을 먹은  모두가 잠든 밤.
잠시 화장실을 쓴 뒤 방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어디선가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나는 발소리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흣. 읏.”
[핫.]

오늘 낮에 대화하느라 들었던 목소리가 신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방을 다시 한번 살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방이 치요와 ‘가브리엘’이 쓰는 방이라는 것을 단번에  수 있었다.
2층은 이미 다른 동료가 쓰고, 1층은 치요와 ‘가브리엘’이 같이 쓰는데, 손님방도 1층인 게 문제였다.
그보다 손님이 오면 이런 일은 웬만해선 안 하지 않나?

“하아.”

결국,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다시 조용히 걸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심정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서 방으로 돌아가진 못한 채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차갑게 볼을 간지럽히는 공기는 나를 반겼다.
 앞에 놓인  칸 안 되는 작은 계단에 주저앉은 나는 밝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치요를 꼬시면 용납  한다고 한 건가?”

오늘 낮에 일본인들은 이름 대신 성으로 부른다는 문화를 몰랐던 내가 치요를 이름으로 불렀던 때가 떠올랐다.
‘가브리엘’은 분명히 치요를 꼬시면 용납 못 한다고 했는데,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남의 성생활에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지만, 상상 이상이었던 게 조금 타격이 심하게 왔다.
방에 언제 돌아가지.
나는 착잡한 속을 달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그러게요.”

그렇게 시선이 하늘을 향해 있던 때, 한숨을 들었는지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꽤 익숙한 것 같은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안녕. 잘 지내고 있었어?”
“이런…!”
“가지마.”

나는 엘리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엘리샤의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어서려 했던 엉거주춤한 자세는 엘리샤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었고, 입은 엘리샤의 손에 틀어막혔다.

“그저 성하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따라온 거야. 봐. 주변엔 아무것도 없어. 이야기가 듣고 싶어.”
“너랑 할 말은….”

없어.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 기억만 아니었다면, 나는 엘리샤를 내치고 ‘미카엘’을 불렀겠지.
붉게 물든 세상에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 순간 나는 그녀를 내칠 수가 없게 되었다.

“미안해. 전 회차의 기억이 있는 거지?”
“응.”

심호흡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자니, 엘리샤가 먼저 사과했다.
그래. 그녀가 왜 나를 죽였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자, 그녀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뒤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성하가 다른 여자들이랑 있는  싫었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봐주길 원했어. 하지만 성하가 무난하게 여행을 끝낼수록, 모험을 마칠수록 곁에 늘어나는 여자는 늘어나고, 나는 소외당하는 기분이라 그랬어. 하지만 다른 여자들을 죽인 모습을 보이니 미움받게 되는  두려워서. 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다시 시작하자. 라는 생각으로 그랬던, 거야. 미안해. 미워하지 말아줘. 이런 말 하기는 염치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탁할게.  번만 내게 기회를 줘.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나는 정말 성하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나는 성하가 없으면 안 돼. 성하가 없으면, 나는… 나는 버틸 수가 없어.”

그녀는 울컥 올라온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점점 빨라졌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내게 호소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을 죽인 것은 그저 질투였고,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시작하기 위해  죽인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걸까.
원래부터 그녀의 성격인 걸까 아니면 거듭된 회차에 미쳐버린 걸까.
이런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는 내가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지.

“엘리샤….”

나는 나지막이 떨리는 입을 움직였다.
그녀가 나를 죽인 책임을 묻기 위함도,  동료들을 죽인 책임을 묻기 위함도 아니었다.
내 부름에 그녀는 울먹이는 듯한 눈을 내게로 향했다.

“이제 그 능력을 내게 돌려줘.”

0회차의 기억에 기댄 내 기만은, 과연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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