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episode13. 가브리엘 (2)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어. 그동안 못 봤잖아.]
[그러게.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한 용사를 돌보고 있어.]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쉽게 제국에 발을 들인 나는 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었다.
중세보다는 근대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밧줄은 도르래로 움직이며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봤고,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던 찰나,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용사?]
[나 혼자서는 계약에 어긋나잖아.]
[그렇긴 해. 우리는 단독으로 개입해서는 안 되니까.]
전 회차에서 ‘미카엘’의 기억을 엿본 나는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 거라 판단한 건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내가 아는 체하면 대화가 끊길 것 같았기에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근데 주인은 놔두고 왜 너 혼자 돌아다녀?]
[아아. 내 주인은 방임주의라서 말이야.]
‘미카엘’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지금 옆에 없는 주인을 물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힐끗 돌렸다.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자매라는 느낌이 확 느껴졌다.
[성하. 저 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이 가느냐?]
“글쎄다….”
내 옆을 총총 걷던 큐라는 내 소매를 꽉 붙잡은 채로 ‘미카엘’과 ‘가브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파충류 눈을번쩍이니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큐라는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이런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잘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그보다. 정말 ‘카보드’를 구한 거라면… 어째서 여기 남아있는 거야? 언니와 같이 있던 인간이 가지고 있었다 했던가. 그와 계약이라도 한 거야?]
[계약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그저 책임을 지는 것뿐이지.]
‘가브리엘’이 이야기하던 도중에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카보드’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카보드’를 찾은 ‘미카엘’이 어째서 남아있는지에 대해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그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는 거겠지.
그녀의 말을 들은 ‘미카엘’은 고개를 저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나가 넘실거리는 게 느껴져?]
‘미카엘’이 뻗은 손가락 끝에 황금색의 물결이 잡히는 것 같았다.
찰랑거리는 마나의 흐름이 내게도 느껴졌다.
[언니의 성숙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야. 언니가 가지고 있던 것이 ‘카보드’인 것은 틀림없겠지. 하지만 정말로 저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게 맞는진 의심스러워.]
[나도 그건 이상하게 생각해. 아버지의 영광을 어찌 한낱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것인가. 그에 대한 물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어. 하지만 그가 용사인 이상, 마냥 특별할 것도 없지.]
‘가브리엘’은 의심하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볼 때마다 등에는 식은땀과 함께 긴장감이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나도 그 의견엔 동의한다.
어째서 ‘미카엘’이 찾던 걸 이세계에서 온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일까.
‘미카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미카엘’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답을 떠올린 것 같았다.
[용사… ‘카보드’를 가지고 있는 용사라. 그렇다면 그가 나의 과업을 이뤄줄 사람인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잠깐, 인간. 손에 쥔 건 뭐야? 설마 정령의 열쇠를 가지고 온 거야?]
‘미카엘’의 대답을 들은 ‘가브리엘’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가브리엘’의 과업을 알고 있는 나로써는 그녀의 말에 긍정적인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용사라는 능력을 얻은 0회차에도 능력을 써보지 못한 채 사탄에게 패배했는데, 지금 와서 능력을 쓰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에 빠져있을 찰나에, ‘가브리엘’이 내 손에 쥐어진 르미야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실반이라고 하는 정령이 줬습니다만.”
나는 그녀의 물음에 르미야를 쥔 손을 슬쩍 내밀며 솔직하게 답했다.
자신을 실반이라고 소개한 정령의 모습과 함께, 그때 정령이 일렀던 말을 떠올렸다.
자격을 얻길 바란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는 걸까.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는 운이 좋네.]
[그렇지? 정령에게 사랑을 받는 인간은 드물 텐데 말이야.]
‘가브리엘’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그저 입을 다문 채 나뭇가지만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입이 무거웠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가브리엘’은 반대로 ‘미카엘’에게 신호를 보내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도 이것이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다들 제 할 말만 하는 족속들이군. 같은 족속이지?]
듣다 화가 났는지, 큐라는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들을 향해 날을 세웠다.
“어, 여기 있었구나.”
[어 주인. 찾았었어?]
“응. 어디 갔나 해서.”
그렇게 난감해하고 있을 찰나,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가브리엘’이 주인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나와 ‘미카엘’의 관계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누구? ‘가브리엘’이랑 닮았네요.”
[아! 여긴 내 언니. ‘미카엘’이야.]
“언니…? 세상에, ‘미카엘’이라니… 얼마나 강한 거죠?”
그녀는 잠시 ‘가브리엘’과 시시덕대는가 싶더니,시선을 옮겨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경계하던 것도 잠시, ‘가브리엘’의 설명을 들은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미카엘’에게 다가갔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는 감탄하며 ‘미카엘’에게 물었다.
“아! 저는 이가라시 치요라고 합니다.”
“…저는 유성하라고 합니다. 혹시 일본 사람이신가요?”
“네! 그럼 그쪽은…?”
“한국 사람이요.”
치요는 ‘미카엘’을 빤히 바라보다,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뭔가 나도 같이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름을 듣자 하니 그녀는 일본인인 것 같았다.
“신기하네요. 저는 그냥 제 모국어를 하는 건데 이야기가 통하다니~”
그녀는 해맑은 목소리로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야 소환자에게는 통역 능력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니까 그렇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치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진 마.]
“왜?”
[그는 용사니까, 치요의 경쟁자야.]
치요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몇 걸음 다가와 악수를 청하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가브리엘’이 그것을 막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치요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가브리엘’을 돌아보았다. 이내, ‘가브리엘’의 말을 들은 치요는 어쩔 줄 몰라 손을 황급하게 내렸다.
용사끼리는 친하게도 못 지내나?
[그렇게 경계할 건 없잖아. 너. 마음에 안 들어.]
“힉.”
머쓱해진 내가 머리를 긁적일 때쯤, 큐라가 앞에 나서서 치요와 ‘가브리엘’을 향해 삿대질했다.
그리고선 방금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 아우라를 내뿜으며 이를 드러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큐라에 기세에 짓눌린 치요는 새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진정해. 그는 이미 마왕을 잡았으니까.]
당장 왕도 한복판을 전쟁터로 만들 것 같은 분위기가 일었다.
‘가브리엘’의 푸른 눈과 큐라의 붉은 눈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내가 이걸 말릴 수 있는 건가? 싶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미카엘’이 가운데로 끼어들어 제지했다.
경계하는 ‘가브리엘’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카엘’은 내가 몇 번이고 마왕을 토벌할 거라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그녀들을 안심시켰다.
“어? 정말로요?”
“뭐, 그렇긴 해요.”
‘미카엘’이 그래도 오래 산 짬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곳에서 눈치가 빨랐다.
그 덕에 ‘가브리엘’은 나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한 것 같았다.
“그럼 일단 갈까? 일단 집으로 초대해야 하나…?”
[치요. 일단 근처 음식점에라도 자리를 잡는 게….]
“에에. 그런가?”
치요는 밝은 목소리로 우리를 반기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려고 고민하는 순간, ‘가브리엘’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러자 그녀는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은 주의해야지.]
“하지만 ‘미카엘’이면 ‘가브리엘’의 언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가브리엘’은 치요에게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미카엘’을 가리켰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든 됐어. 음식점이든 집이든.]
[나는 음식점이 좋아.]
‘미카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내저었고, 큐라는 뒤에서 말할 타이밍을 엿보더니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큐라는 배가 고팠던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아. 우리가 꽤 긴 시간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할 말도 많고.]
결국, 밥을 먹기로 한 일행은 치요와 ‘가브리엘’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와중에 ‘가브리엘’은 뭔가가 듣고 싶은 일이 있는건지 입을 열었다.
[그래. 너의 어린양 하나가 저지른 일이 너무 컸기 때문이지. 너는 그 양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줬던 거야.]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우리에게도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어.]
‘가브리엘’을 힐끗 바라본 ‘미카엘’은 깊은숨을 한 번 내뱉고선 말을 시작했다.
‘미카엘’의 기억에서 봤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인류의 세대교체, 구 인류의 몰살계획, 그리고 노아의 선택이 이들을 인간계로 몰아내었다.
그것에 ‘가브리엘’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카엘’은 그녀를 나무랐고, ‘가브리엘’은 축 늘어진 채로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미카엘’의 시선은 이미 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그렇지. 나도, ‘우리엘’도, ‘라파엘’도 서로를 볼 시간 없이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려 하고 있어. 언니가 가장 늦을 줄 알았는데, 반대로 가장 빨리 끝났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브리엘’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카엘’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녀의 말에 동의할 뿐이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고, 큐라와 치요도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제 자신보고 쓸모없다고 하던 언니는 없겠네.]
[아니.]
‘가브리엘’은 향수에 젖은 눈을 하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카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브리엘’의 말을 내치고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인간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 않겠다 하셨어. 그러니 나는 이 모습으로 천계에 돌아가도 쓸모없을 건 분명해.]
[…….]
[너희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지. 목자의 일을 하고, 심판자의 일을 하며, 의인의 일을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
‘미카엘’은 슬픈듯한 황금색 눈빛을 하고선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변을 훑으며 지나갔다.
자신의 아버지, 신을 떠올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리움, 슬픔이 묻어나왔다.
지금도, 앞으로도 자신이 필요 없을 거라 확신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슬프게 들릴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도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녀를 위로하는 말조차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미카엘’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은 목자였고, ‘우리엘’은 심판자였으며, ‘라파엘’은 의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무런 역할도 없었다.
[정말, 나는 천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아버지를 등지겠단 소리야?]
[나는 지금의 연을 더 소중히 여기겠어.]
‘미카엘’은 전 회차와 다른 말을 꺼냈다.
망설임 없이 돌아가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문을 품은 그녀를 본 ‘가브리엘’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미카엘’에게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뭔가 다짐한 듯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언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돌아가기로 했잖아. 혹시 저 인간이 이상한 물을 들인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 성하와 공명할 때면 자꾸 마음이 아파. 심장이 아파. 그에게서 받은 심장이 자꾸만 나를 아프게 해.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아. 자꾸만 옥죄이는 기분이 들어.]
‘가브리엘’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빠르게 손을 올려 부정했다.
하지만 그 부정이 무색하게 ‘미카엘’은 말을 이었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작 그런 기분 하나에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을 미루다니 언니도 제정신이 아니야.]
‘가브리엘’은 이를 까득 깨물며, ‘미카엘’을 나무랐다.
아무래도 바로 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그녀를 꾸짖는 거겠지.
천계로 돌아가는 것을 망설이는 그녀를 나무라는 듯 했다.
왜인지 일이 어렵게 돌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