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episode13. 가브리엘 (1)
*
[…깼어? 근데 안색이 왜 그래?]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큐라의 등 위였고, ‘미카엘’이 나를 보며 걱정하는 듯 내게 슬쩍 다가왔다.
내가 보았던 것들이 진짜인 건가? 믿기 힘든 이야기뿐이었다.
0회차의 나는 사탄에게 도전했었다. 어떻게 0회차에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걸까.
역시 용사의 능력을 빌린 탓인가.
“스테이터스.”
나는 ‘미카엘’을 향해 손을 저으며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무심하게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푸른 빛의 투명한 창이 내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지막에 봤던 그 기억이 정말 사실이라면, 아마 내 능력에 적힌 글자가 깨져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내가 0회차 때 엘리샤에게 능력을 넘겼기에, 나는 용사의 능력이 없던 것이었다.
그저 읽기 힘들게 되어있던 것이 아니었다.
“…쯧.”
멍하니 나의 스테이터스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혀를 차며 내가 본 것들을 차례로 나열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웁!”
[성하?!]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목까지 차오른 구토감을 애써 참았다.
겨우 버티고 다시 꿀꺽 삼키자, ‘미카엘’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내 등을 감쌌다.
“다, 다음 걸 봐야 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바들거리는 손을 움직여 다시 머리에 가져다대자, ‘미카엘’은 이런 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다고…
그렇게 반박하려던 찰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소름이 돋아서 피부가 새하얗게 일었다. 심장은 자꾸만쿵쿵 뛰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차올랐다.
0회차의 기억을 본 순간 지금은 몇 회차인 건지, 그 수많은 회차에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이대로 가려던 데로 가줘. 무슨 일 있으면 강제로 깨워줘.”
나는 ‘미카엘’을 진정시키고선 떨리는 두 손을 양쪽 관자놀이를 덮듯이 가져다 댔다.
나는 아직 0회차의 초반과 최후만 봤을 뿐이니 다른 것들을 더 봐야 했다.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약해져선 다른 회차의 기억에는 손도 못 댈 것이다. 강해져야만 했다.
다시, 의식을 저 기억으로 빠뜨렸다.
*
승리한 자에게는 그만한 영예가 따랐다.
성하는 10명의 마왕을 처리했고, 그만한 영광을 누렸다.
첫 마왕을 잡았을 때는 기억이 바뀌긴 했지만, 다시 고친 이후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 왕성에서 생활하게 된 성하는 화장실에 있는 거울 앞에 서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폐해졌고, 눈은 퀭해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조심히 다가가 성하를 달래기 위해 몸을 가까이 들이대자, 성하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정말, ‘용사’라고 선택받은 사람은 자신 스스로 가시밭길을 뛰어든다는 게 정말인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얼굴도 잘 모르는 다른 용사들까지 구원할 필요는 없어.”
“그런 것도 있지만, 만약 앞으로 내가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면… 이런 불안을 남겨둘 수는 없어.”
나는 성하를 말리듯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성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내 손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아닌가.
그의 불안은 다른 용사를 위한 이타심이 아니라, 나와의 생활을 위한 방책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기도 했어.”
성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고, 그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눈을 살포시 감아 그에게 안겼다.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다시 잃는 것이 무서워서… 돌아갔는데 만약 나 혼자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그의 불안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 성하는 분명 잃는 게 무서운 걸 거야.
살아있는 모두가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성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기뻤다. 나를 잃는 것이 두렵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그에게 있어 그만한 존재가 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성하를 사랑해.”
“나도 엘리샤를 사랑해.”
나는 성하의 품에 안겨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자 성하도 마찬가지로 내 몸을 꾹 끌어안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래서 싸우는 거야. 언제 어디서 마왕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정말 안심되네. 용사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성하는 비장한 목소리로 각오를 다진 말을 꺼냈다.
성하는 많은 용사에게 비난을 받아왔다.
99명의 용사. 72명의 마왕. 72명은 살 수 있었는데, 성하는 그 룰을 어겼다.
성하의 단독행위로 60명 정도만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성하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나와의 미래를 우선해주려는 거겠지.
“저번에 얻은 마법이 있어.”
“뭔데?”
“비밀이야.”
성하는 어딘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무슨 감정으로 말하는 건지 잘 몰랐다.
그저 성하가 무엇을 특전으로 받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전에는 잘 말해줬는데 이번에는 받았다고만 할 뿐, 알려주진 않았다.
“지금껏 세상은 진실을 어긋나게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
“어…?”
“이번에 종지부를 찍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성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나는 품에서 벗어나 성하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비장한 표정, 슬픈 목소리, 떨리는 몸짓이 눈에 들어왔다.
성하가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이 말하는 게 두려워서 성하의 손을 꼭 잡았다.
“모든 마족의 왕. 사탄을 잡을 거야.”
10명의 마왕을 잡고, 10개의 특전을 가진 성하가 무슨 풍경을 보는지 알 수는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사탄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성하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리샤는 여기 있어. 내가 하려는 일은 위험하니까.”
“싫어!”
성하는 화장실을 나오더니 내 어깨를 토닥이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성하의 뒤를 몇 걸음 따라가다 멈춰 서선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주먹을 아래로 휘두르며 말했다.
“엘리샤…?”
“왜 내가 여기 남아있어야 하는데?! 성하가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도 성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근데 왜 나를 이렇게 놓고 가려고 하는 건데?!”
“말했잖아. 위험하다고.”
“그런 위험한 곳에 혼자 가서 죽게 되면,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고 말해야 해?”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처음으로 고함을 질렀고, 성하도 놀랐는지 당황한 눈빛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감정을 토로했다.
가슴이 떨리는 기분에, 목소리도 함께 떨리는 것 같았다.
사랑을 속삭였고, 몸을 섞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성하는 나를 이렇게 두고 가려 하는 걸까.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두고 간다면,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걸까.
“죽을 때도 같이 죽어. 살때도 같이 살아.”
나는 당황한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성하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당장에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삼키며 성하의 눈을 응시했다.
“…너무하잖아. 만약 죽게 된다면, 누군가는 서로의 죽음을 봐야 한다는 게.”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래도 죽을 때는 같이. 라는 생각으로 있을 테니까.”
성하의 불안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남는 것이 더 두려웠다.
큐라도, 리타도, 세라도, 테스도, 모두 성하의 뒤를 따라 생사를 같이할 때, 정작 나는 위험하다고 빠져야 한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막연한 자신감을 가지고 나는 애써 괜찮다고 말하며 내 말을 포장했다.
정말 괜찮지는 않았다. 그 성하마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으니 오죽할까.
“사실 나는 내 능력의 이름이 왜 ‘용사’인지 모르겠어. 이 능력을 써본 적이 없어서 더 모르겠고.”
성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용사들의 능력을 들었을 땐 ‘번개의 창’ 이라던가, ‘거대한 바위’ 같이 명확한 형상이 그려지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성하는 그렇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능력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게 내 능력이 맞나 싶기도 하고, 설마 내가 갖고 있어서 막연하게 써진 건 아닐까 싶기도 해.”
“성하가 가장 용사다워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하하… 내가 가장 용사답다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
성하는 조금 착잡한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쓰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모든 마족의 왕을 잡는다고 한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능력을 아직도 활용할 수 없다니 불안할 만도 했다.
나는 그런 성하를 달래보려 했지만, 성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이건 오늘 주고 싶었는데… 미뤄야겠네.”
“뭔데?”
“내 마음.”
“뭐야… 그런 건 진작에 준 거 아니었어?”
성하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선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뭔가 전에 말했던 스테이터스 창을 봤을 때의 표정이었다.
내가 조심스레 묻자, 성하는 얼버무리려는 듯 싱긋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은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걸까. 나는 그런 성하에게 맞장구를 쳐주며 입을 비죽였다.
“사랑해.”
*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나는 엘리샤의 섬뜩한 표정이 떠올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리도 무서운 말이었던가.
0회차 때 엘리샤에게 건넨 ‘용사’라는 능력은 ‘회귀’로 변해 있었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도망칠 수 없었다. 죽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쫓아올 것이다.
엘리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기억을 보는게 끊겼다.
앞으로 더 이어질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의식이 돌아온 걸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광활한 초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붉은 드래곤과 ‘미카엘’의 모습이 풍경에 곁들여지니 화보라도 하나 나올 것 같았다.
[깼느냐?]
[잘 보고 왔어?]
“아니… 방금 도착했어?”
큐라와 ‘미카엘’이 내가 정신을 차린 걸 알아채고는 총총 다가와 상태를 물었다.
나는 갑자기 의식에서 돌아온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물었으나, 큐라는 [꽤 됐다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도착해서 깬 건 아니겠구나.
[언니.]
그렇게 멍하니 푸른 하늘을 눈에 담을 때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카락,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푸른 눈빛의 여성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
[…한낱 인간이 어떻게?]
‘가브리엘’의 이름을 부르자, ‘가브리엘’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시선을 돌렸다.
나를 응시하던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어째서 네가여기에…?]
[난 원래 이 나라 담당인데… 언니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한 번 나와봤어. 그런데 그 모습은 대체…?]
그것도 잠시, ‘미카엘’이 놀란 듯 몸을 일으키며 ‘가브리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왕도를 둘러싼 장벽을 가리켰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던 ‘가브리엘’은 입을 틀어막고 ‘미카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언니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거야…?]
[‘카보드’를 찾았어.]
[거짓말.]
[진짜야.]
‘가브리엘’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미카엘’의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는지 그녀의 미간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미카엘’은 덤덤하게 ‘카보드’를 찾았다고 했고, ‘가브리엘’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걸 찾았다면 언니는 이미 천계로 돌아갔겠지.]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 내 의지로 남아있는 것뿐이야.]
[의지? 언니가? 애초에 ‘카보드’는 대체 어디에 있던 거야? 무슨 형태를 하고 있던 거야? 아버지만이 알고 계신 것 아니었어?]
‘미카엘’의 말을 믿지 못하는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로 의심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럴수록 ‘가브리엘’은 휘둘리고 있었다. 결국 호기심에 진 그녀는 ‘카보드’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여기, 이 자가 그걸 가지고 있었어.]
[날 한눈에 알아본…]
‘미카엘’이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가브리엘’은 나를 경계하며 시선을 옮겼다.
[그렇구나. 나도 사실 언니처럼 잠시 곁에 둘 주인을 찾아서 말이야.]
[속죄는 잘 되어가?]
[그러게… 구 인류를 모두 처리해야 돌아갈 수 있는 건데, 될 지나 모르겠다. 신인류는 구 인류보다 약하게 만들어져서 조금 가망 없다고 생각해.]
‘가브리엘’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홱 돌렸다.
‘미카엘’이 속죄에 관해 물으니 ‘가브리엘’은 고개를 으쓱이며 비관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사탄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여기 천사들과 나뿐일 테니.
아니, 엘리샤도 있구나.
[어서 들어와. 내가 몸 담그고 있는 엘슈펠 제국에. 신분 보증은 내가 해줄게.]
큐라는 어벙해진 표정으로 내 뒤에 숨어서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가브리엘’은 왕성을 가르는 장벽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였다.
‘미카엘’, 큐라, 그리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제국의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