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episode11 카보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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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라에게 탄 뒤, 이대로 동쪽 해안으로 날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거대한 골렘에게 잡혀 내동댕이쳐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져 내장을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격렬한 통증에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젠장.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성하. 사랑해.”
무슨 이변일까. 판단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샤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가 나를 잡기 위해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했건만, 나는 결국 일을 그르친 것인가.
엘리샤가 나를 깔고 앉은 뒤, 단검을 쥔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찬란한 빛을 내뿜는 저 유리 같은 칼날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브레이커’, 나의 심장을 도려내는 데 썼던 그 검이었다.
“에, 엘리샤…!”
이번에도 이렇게 무능하게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큐라도 한 번에 죽였던 마검을 내 손으로 막아낸다 한들 버틸 수나 있을까.
아니,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보다, 손만 꿰뚫리는 것이 나았다.
“네년이, 미쳤구나.”
푹. 찔리는 소리가 난 순간,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까득 깨물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아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싶어 질끈 감은 눈을 슬며시 뜨자, 마검을 손으로 막은 미카엘이 엘리샤를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엘리샤는 당황했는지 ‘브레이커’를 미카엘의 손에 꽂아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주춤주춤 물러선 엘리샤는 바로 휴대용 지팡이를 들어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성하, 성하만 주면 돼요. 성하만….”
“…이 검은.”
“…물러서세요. 미카엘 님.”
“성하. 어떡하느냐? 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엘리샤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 내 이름을 불러댔다.
미카엘은 멍하니 자신의 손에 꽂힌 검을 바라보더니 팔의 힘을 쭉 빼고 일자로 섰다.
엘리샤는 미카엘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미카엘은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꺼낸 말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뽀, 뽑아! ‘브레이커’가 문제인 거야!”
“뽑아봤자 사라진 마력은 돌아오지 않아. 성하, 성하만 내게 오면 다른 아이들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게. 나는 성하만 있으면 돼 알잖아. 성하가 바람만 피우지 않으면 나는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성하가 필요해. 제발, 다른 사람들이 이 이상 죽지 않기를 바란다면 투항하고 내게로 와. 알잖아. 회귀 능력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고, 성하는 일시적으로 전 회차를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란 걸. 나는 성하를 이해할 수 있어, 나만이 성하를 이해할 수 있고, 성하만이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해. 알 것 같아?”
미카엘의 손에 박힌 마검을 뽑아봤지만, 이미 미카엘의 몸에선 마력이 모두 사라졌는지 자력으로 치유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는 미카엘의 뒤로, 엘리샤가 벌벌 떨 듯이 말했다.
이미 미카엘은 늦었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엘리샤의 숨은 점점 거칠어지고, 초점은 흔들렸다. 내가 전 회차를 기억하고 있고, 자신은 회귀자이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나는 그런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성하를 죽이지 못할 거 같아? 힘도 없어진 미카엘, 정신 못 차리는 큐라 사이에서, 이 주변의 병사들을 제치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내가 자비를 베풀어주는 거야. 다 살 방법을 말해주는 거라고. 알아들어?”
점점 그녀의 목소리는 고조되고, 나를 향한 협박은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녀의 발밑에 있는 것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라, 큐라를 잡고 집어던진 골렘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불을 아무리 지펴봤자 당장에 골렘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저 골렘의 움직임까지 봉쇄하려면 무슨 마법을 써야 할까.
한숨을 내뱉었다.
“미카엘. 괜찮아?”
“…괜찮지 않습니다. 이래서는 단순한 마검도 될 수 없어요,”
“걱정하지 마. 큐라랑 같이 있어.”
“괜찮은 건가요?”
“그래.”
지팡이의 감촉을 느끼며, 정면을 응시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고,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회복한 큐라의 옆으로 미카엘을 피신시킨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말했잖아요. 성하가 먼저 시작한 이야기라고.”
“내가?”
“네. 성하가 먼저 시작했죠. 성하. 궁금한 게 많지 않나요? 성하의 능력이 지금 먹칠 되어있을 텐데, 본인의 능력에도 정말 궁금함이 없나요?”
“그걸 어떻게.”
나는 불평하듯이 엘리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지팡이를 휙 휘둘렀다. 골렘이 움직이고, 주변의 병사들은 엘리샤의 행동에 주춤거리는 듯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본심을 알기 위해서는 0회차부터, 그녀가 이 회차까지 오게 된 계기를 봐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한숨을 내쉬던 그때, 엘리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내 능력이 먹칠 되어 읽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가린 게 아니라 성하에게 그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결국, 성하는 용사가 되었어도, 용사의 특수 능력을 받지 못한 셈이죠.”
“…‘카보드’가 있잖아. 이게 그 능력인 거 아니었어?”
“아뇨? ‘카보드’는 원래 성하 거에요. 그것을 갖고 있다고 한들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냥 소유자일 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그녀는 내가 용사의 특수 능력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나도 넘치고, 마력도 드래곤에 견줄 정도로 강대한데, 이래서도 용사에 견주면 택도 없다는 소릴 듣는 걸까.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주변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이 몇 회차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박학다식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보드’에 대해 던지는 순간,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게 왜 내 것일까. 미카엘보고 찾아오라 했던 것이 왜 내게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자. 이야기는 단둘이 남았을 때 하도록 할까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부끄럽네요.”
엘리샤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굉음이 들려오고 대지가 쿠구구구 하고 흔들렸다.
제 몸 가누기도 힘들어진 병사들은 넘어지기 바빴고, 큐라는 날개로 무능해진 미카엘을 감쌌다.
정면에는 비바람을 맞으며 몸을 일으킨 골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니까 하늘을 나는 큐라를 붙잡고 내팽개쳤지.
“이, 이런 괴물을 부르면 다른 사람들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아, 커다란 골렘이 다른 민가도 부숴버릴까 걱정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성하만 남고 다 죽어도 저는 상관 없거든요.”
“미친….”
아파트 크기만 한 거구의 골렘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 먹구름이 낀 상태라 내 목소리가 조금은 더 잘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엘리샤는 도리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면서 골렘을 조종했다.
골렘은 팔을 휘두르기 위해 왼쪽 손을 뒤로 쭉 뺐다.
그녀에게는 지금 브레이크라는 것이 없는 건지 물러설 기미도,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지금 무력화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세상의 이치는 내 부름에 응하라!”
일변하는 마나의 흐름이 모두를 긴장에 떨게 했다.
간절하게 바라는 마법의 이미지를 그렸다.
“칫! 마나랑 마력이 넘친다고 그렇게…!”
엘리샤는 내가 마법을 쓰려 하자 혀를 차며 골렘의 손을 재촉했다.
건물이 내 앞으로 날아오는 듯한 공포.
차에 치이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는 다른 공포였다.
운석이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내 앞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라. 내 앞에 있는 것은 모두 적일지니.”
연상하는 것은 얼음, 그리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얼어붙는 것으로는 안 된다.
얼음 중에 날카롭다 하는 것은 고드름.
이를 까득 깨물고 손에 쥔 지팡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이미지하는 것은 얼음으로 만든 기둥들. 그것은 거대한 고드름이자, 적들을 얼어붙게하고, 꿰뚫을 나의 무기였다.
이거라면 골렘도 막을 수 있다.
“브리니클.”
비바람은 멈추었다. 하지만 추위는 더욱 강렬해졌다.
숨을 토해내면 입김이 흘러나왔다. 어두웠던 배경은 하늘을 천장 삼아 얼음 기둥이 다수 세워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골렘의 손은 기둥에 꿰뚫려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거대한 고드름에 꽂혀 부스러진 골렘의 몸은 이내 빠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겨우 살았다고 안도했다.
“젠장…! 어째서, 어째서 마법을 그렇게 잘 다루는 거야. 다른 회차의 기억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잖아? 어떻게, 어떻게 마법을 쓰는 걸 아는 거야. 마법은 단순히 보고 배운다 해도 통하지 않는 학문이라고! 용사 보정이 있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잖아.”
“미카엘 괜찮아?! 큐라는?!”
“괘, 괜찮습니다.”
[난 괜찮다… 그나저나 이 얼음 기둥들은….]
분해 보이는 엘리샤를 뒤로하고 미카엘과 큐라를 향해 달렸다.
미카엘은 힘을 잃은 뒤로 공손해진 모습을 보였고, 큐라는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얼음 기둥을 보며 탄식했다.
“왜, 왜 날 봐주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날 무시하고 봐주지 않아. 왜. 왜.”
“너 같은 녀석을 봐줄 틈은 없어. 저리 가.”
엘리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며 외쳤다.
검은 로브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암살자처럼 보여서 괜히 오싹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녀가 내게 손을 떼주었으면 좋겠다.
“전원! 저 세 명의 사람은 모두 역모죄. 국가전복죄에 해당하는 자들로 지정한다. 생사를 불문하고 상금과 지위를 내어줄 것이며, 그들의 사촌까지 모두 보상받도록 할 것이다. 나, 제3 왕녀 엘리샤 넬 테베레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들을 모두 베어 넘기거나, 살린 채로 내 앞에 헌상토록 해라.”
“엘리샤…!”
“성하.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어? 언제까지고 주도권은 내게 있었어.”
큐라와 미카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순간, 엘리샤가 소리쳐 병사들을 일깨웠다.
땅이 울리고, 도시 전체에는 거대한 얼음 기둥이 생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들을 일으켰다.
그녀는 검은 로브를 집어던지고, 손을 뻗어 소리쳤다.
내 목에 보상을 건 그녀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섬뜩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린 채로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이를 갈자, 엘리샤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미소지었다.
“자. 지금이라도 살고 싶으면 내게 돌아와. 당장.”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경한 목소리.
힘을 잃은 미카엘과 조금 아파 보이는 큐라를 생각하면 돌아가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돌아간다 한들, 지금의 그녀가 이 애들을 곱게 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애초에, 힘을 잃은 미카엘이 대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천계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녀는, 검으로 돌아가도 연구가치가 떨어지는 그녀는 무슨 대우를 받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큐라는 돌아갈 곳, 자신의 둥지가 있다 한들 결국 또 외톨이가 되어버리겠지.
결국, 나는 그 말에 따를 수 없었다. 나를 믿고 따라준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멈춰설 수 없었다. 돌아가는 일 따위 있을 수 없었다.
“지랄 마.”
나는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미카엘도 지금 힘을 잃었지? 큐라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 다 죽이고 나면, 성하만 남겠네. 성하는 혼자 남으면 나를 사랑해줄까? 아니면, 나를 증오해줄까. 뭐든 괜찮아. 처음에는 성하를 죽이고 다음 회차를 살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냥 난 성하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였어. 그니까 성하가 그냥 내 옆에서 나만 보고,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 살아주면 돼. 인형처럼 밥만 먹고 잠을 자고 나와 몸을 섞어주기만 하면 나는 그걸로 만족해. 나는 그렇게 성하와 살고 싶으니까.”
엘리샤는 점점 눈에 생기를 잃어갔다. 그녀는 회차를 거듭하면서 엄청난 힘을 쌓아온 것인지 힘을 잃은 미카엘은 제쳐두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하프 드래곤, 큐라도 이길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나선 꿈을 꾸는 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는 뭔가 다짐했는지 지팡이를 들고 마법을 쓰려는 듯 중얼거렸다.
콰륵. 엄청난 마나의 기류가 흘러나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마나의 흐름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성하! 지금 이곳에 있어봤자, 사방의 모두가 적일 뿐이다 난다!]
“우왓?!”
심상치 않음을 느낀 큐라는 빠르게 도망가기 위해 소리쳤다.
이미 큐라의 등엔 미카엘이 타고 있었고, 큐라는 소리침과 동시에 발톱으로 나를 꽉 잡으며 거대한 날갯짓을 했다.
“…저 암고양이들을 모두 죽이고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엘리샤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해. 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