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episode10 집착 (4)
# # #
성하가 급하게 빠져나간 왕성 안.
그곳에서는 엘리샤가 이를 갈며 덩그러니 열려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샤. 왜 그래?”
“언니. 나, 가야 할 곳이 있어.”
“갑자기? 어디로?”
“도망간 용사를 잡으러.”
엘리샤의 큰 언니 레니아는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안부를 물었다.
엘리샤는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레니아에게 통보하듯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엘리샤의 말에, 레니아는 당황하며 주변의 용사를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용사들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그들을 밖으로 보냈을 시간인데, 갑작스레 엘리샤가 등장하고 그와 동시에 한 용사가 자리를 급하게 빠져나가서 혼란스러운 레니아였다.
“왜? 갑자기 도망간 용사를 네가 잡으러 갈 이유가 있어?”
“응.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아니야. 그런 건 아버지에게 상소문을 올려서 따로 수배하면 돼. 그냥 성에 있어.”
“아니. 이건 꼭 내가 해야만 해.”
레니아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모습을 한 엘리샤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인지, 그녀는 엘리샤의 소매를 잡고 그녀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말했지만 엘리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열린 문에 고정하고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급해. 성하는 아무래도….”
“서, 성하가 누구야?”
“아니, 혼잣말이야. 못 들은 거로 해줘.”
엘리샤는 떠나가버린 성하를 보며 초조한 듯이 손톱을 깨물었다.
레니아는 많은 용사의 앞에서 예의 없이 손톱을 뜯는 엘리샤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녀의 말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떨리는 초점을 허공에 두고 몸을 움직였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그녀는 방황하는가 싶더니,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가기 위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건지,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뜨려 했다.
레니아는 처음 들어보는 이국적인 이름을 듣고서 엘리샤를 붙잡으려 했지만, 엘리샤는 레니아의 말을 잘라버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죄, 죄송합니다. 용사님들. 갑작스레 소환된 분들이라 혼란스러운 분도 있으신 거겠죠. 자리를 벗어나신 한 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드릴 수 없지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는 국고를 열어…”
엘리샤가 떠나간 수많은 방에는 24명의 용사가 있고, 병사들 사이로 레니아가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이내 용사들을 향해 사죄하듯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용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돈과 지위를 주고, 동료를 구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말로 그들을 현혹했다.
그들이 마왕을 잡을 수 있는 용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내, 내가 이세계의 용사?”
“이게 내 능력인가 본데.”
“스테이터스!”
레니아의 말이 끝나고, 용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거나, 받은 금화를 확인하는 등, 자신이 이세계에 왔다는 실감을 받기 위해 별의별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초조해진 엘리샤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성하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한 그녀는 앞으로 성하가 무슨 움직임을 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처럼 계속해 왔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다들 물러가도록 하거라.”
“넵!”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샤는 자신의 화장대 앞에 두 팔을 쾅. 소리 나게 얹은 후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회귀했음에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역시 기억이 돌아온 거겠지…. 대체 어째서.”
엘리샤는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앓듯이 신음하던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손으로 찢듯이 벗어던지고선 거대한 옷장에 숨겨져 있던 로브를 챙겨 입었다.
엘리샤는 원래 모험가를 할 때 입던 것과는 다르게 검은색을 자랑하는 로브를 둘렀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키만 한 지팡이가 아닌 30센티는 되어 보이는 날렵한 나무지팡이를 꺼냈다.
“르미야 거목으로 만든 지팡이, 그리고….”
엘리샤는 움직이기 편한 차림과 로브를 둘렀다.
마법사보다는, 탐색꾼에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성하에게 달라붙는 해충을 죽이기 위한 마검.”
그녀는 ‘브레이커’까지 챙기고서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왜 여기까지 와서 성하가 기억을 되찾은 거야? 나를,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성하는 필요 없는데, 죽이는 건 너무 괴로워. 흑, 성하는 너무해. 왜 내 마음도 몰라주고 자꾸 도망만 치는 거야.”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엘리샤는 입을 비죽였다.
점점 차오르는 감정에 주체할 수 없던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던 마검을 땅바닥에 팽개치던 던지고선 무너지듯 주저앉아 오열했다.
회귀하면, 회귀자를 기점으로 모든 사람의 행동이 변한다.
회귀자가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같은 행동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기억을 받은 성하는 엘리샤를 두려워했고, 도망쳤다.
그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했지만, 점점 받아들인 엘리샤는 결국 눈물을 머금었다.
성하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 기껏 새로운 세계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원하는 상황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지금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어.”
눈물을 닦은 그녀는 각오를 다지며 ‘브레이커’를 손에 쥐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엘리샤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는 일은 없었다.
“이번 생의 성하는 죽이는 데 전념해야겠네. 이건, 전 세계를 기억하는 성하 탓이야….”
비틀거리듯 몸을 일으킨 엘리샤는 깊은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을 나섰다.
“공주님?! 어디 가십니까!? 대체 그 차림은….”
“…아버지껜 잘 말해줘. 도망간 용사는 내가 잡는다고.”
방을 나서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경악하며 그녀를 불러세웠다.
밝은 계열을 모두 팽개치고 검은 로브를 둘러싼 그녀를 본 기사는 당황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엘리샤는 기사를 진정시키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전언을 남기고는 휙 떠났다.
“호위는 필요 없어.”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그녀는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여기서 사라졌다니까?”
“터진 거겠지.”
왕성을 나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하가 마법을 쏴 날아간 그 자리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고, 그것이 엘리샤의 눈에 들어왔다.
크레이터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 크레이터를 두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입에 담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하 짓이네. 하아. 낙오자일 때는 잡기 쉬웠는데 용사가 되어버렸네. 다른 나라로 갔다고 생각해야겠다.”
크레이터를 본 엘리샤는 단박에 성하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흘깃 다른 곳을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반갑습니다. 제3 왕녀 엘리샤 넬 테베레스 님.”
“그런 딱딱한 인사는 됐습니다. 퀼튼 경.”
“…공주님께서 메자드 성 교회에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만, 연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메자드 성 교회의 고위 성직자 리타 라니아를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엘리샤는 빠르게 리타가 있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 내부 중앙에는 노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고위 성직자 퀼튼은 눈을 슬쩍 뜨더니, 행색이 다름에도 엘리샤를 알아보고 입을 열어 그녀를 환대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의 환대에 반응하지도 않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롤라. 가서 리타 님을 모셔오렴.”
“네. 대주교님.”
퀼튼은 고개를 돌려 한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던 수녀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명 받은 수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교회 정원 내부로 달려나갔다.
엘리샤는 지금 이 순간도 아깝다 생각하고 있었다.
“에리…, 아니 엘리샤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짐 싸 들고 따라와. 가야 할 곳이 있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다이센 왕국.”
리타는 엘리샤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며 다가갔다.
엘리샤는 그런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더니 본론을 말하고 발길을 옮겼다.
리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엘리샤에게 물었다.
엘리샤는 차분하게 성하가 갈 곳을 고민하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답했다.
“적국과 동맹하는 나라에 대체 왜 가시는 겁니까?”
“…성하를 찾으러 가야 해.”
“성하…? 그게 뭡니까?”
“명령이야. 빠르게 짐 싸서 교회 앞으로 나와.”
다이센 왕국으로 간다는 말에, 리타는 혼란스러웠는지 시선을 이리저리 두더니 타들어 가는 입술을 핥았다.
엘리샤가 말하는 성하가 뭔지 모르는 리타는 다시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엘리샤는 그녀와 말씨름 하는 시간이 아까워 보다 빠른 방법을 사용했다.
“…공주님. 어디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예. 그러니, 리타 라니엘 좀 데려가겠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시겠죠?”
“하하. 이단 처형 부대가 달리 업무가 있겠습니까?”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퀼튼 경.”
퀼튼은 리타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데려가려 하는 엘리샤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짐을 싸러 간 리타의 등을 보면서도 초조해하는 엘리샤는 그의 말에 단호하게 답했다.
날카로운 연보랏빛 눈빛에 조금 움츠러든 퀼튼은 멋쩍게 웃으며 엘리샤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주었다.
아무리 나라의 정세와 깊이 연관이 있는 교회라고 한다지만, 왕국의 힘이 나날이 커지는 이 순간은 퀼튼이 엘리샤보다 지위가 낮았다.
“모험가 카드, 무기, 갑옷, 그리고 여벌의 옷과 금화. 모두 챙겼습니다.”
“가도록 하지.”
가방과 갑옷을 담는 나무 상자를 들고 온 리타가 확인차 입을 열어 엘리샤에게 보고했다.
나는 이 정도 챙겼지만,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엘리샤는 그런 그녀의 질문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홱 돌렸다.
“그렇게 중요한 건 하나밖에 없어.”
성큼성큼 교회를 걸어나간 엘리샤는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르게 마차를 수배하도록 리타를 시켜놓고, 자신은 성하가 어디로 갈지 예측하듯이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에리. 근데 왜 갑자기 다이센으로 가는 거야?”
단둘만 남자, 리타는 조심스레 엘리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에리샤는 까득 손톱을 깨물더니 초조한 듯이 지도를 훑었다.
“성하가 도망갔어.”
“성하?”
“성하가 도망갔어. 내가 싫은 건 아니겠지? 내가 질렸, 아니… 그렇게 헤어졌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기억이 돌아와 버린 성하가 이번에 죽인다고 다음에 기억을 가지고 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하지만, 이번 생의 성하를 죽이면 이동하는 건가? 아아, 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으으, 그럼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으면….”
리타가 모르는 이름을 입에 담은 엘리샤는 안절부절 얌전히 있지 못한 채로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불안은 어느새 입안에 가득 차 있었고, 그 불안을 들은 리타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성하만으로 가득 찬 그녀의 뇌에는 오직 성하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대체 성하라는 사람이 뭘 했길래 그런 거야?”
“아.”
리타는 심각해져가는 엘리샤의 상태를 빤히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리타에게 대답을 들려주기는커녕 머리를 쥐어뜯으며 떨리는 입을 벌렸다.
“죽이지 않으면 안 돼.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성하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우게 놔둘 수는 없어.”
그녀가 회귀한 만큼, 성하 또한 죽어갔다.
그것이 그녀의 자의든 타의든, 성하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야 회귀하는 엘리샤는 도망가버린 성하를 보고 계속해서 초조해졌다.
불안함에 휩싸인 그녀는 이미 주변의 시야가 멀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성하만을 생각하고, 오직 성하만을 바라보고, 오직 성하만을 입에 담았다.
엘리샤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 성하를 놔둘 수 없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성하는 필요 없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곧바로 회귀하지 않고 성하를 찾으러 나섰다.
“에리! 너 상태 안 좋아.”
“그래? 그럼 성하 좀 같이 찾아줘. 다이센으로 갔을 거야.”
“…알았어. 이제 도착했으니까 마차에 타도록 해.”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엘리샤가 걱정된 리타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잡고 소리쳤다.
엘리샤는 이제야 그녀의 말에 반응하고는 눈에 초점을 맞추었다.
눈에 빛이 돌아온 엘리샤는 천천히 시선을 옮기더니 다이센이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타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엘리샤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