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episode10 집착 (3)
*
“헉!”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다.
눈을 뜬 곳은 내가 취업준비를 하던 작은 원룸의 매트리스 위였다.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니, 뭔가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모두, 꿈이었나?”
뭔가 거대한 모험에 휘말린 것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정말로 내가 뛰었던 것 같았고, 내가 경험한 것 같은 감각에 손이 떨렸지만,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니 이내 손의 떨림은 진정되었다.
모든 게 꿈이라는 생각이 드니, 바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숨을 내쉬고 달력을 보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7일, 전? 아니, 다 꿈인가.”
날짜를 보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는데, 스마트폰에는 내가 한강에 갔던 날보다 7일이나 거슬러있었다.
뭔가 시간 역행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예지몽을 꾼 것 같기도 해서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복권 번호라도 꾸준히 볼 걸 그랬다. 라는 생각을 하며 메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적셨다.
“리타… 세라, 큐라.”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현실감이 짙게 느껴지는 감각이라 마냥 꿈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뿐이었다.
익숙한 이름들을 입에 담을 때면, 뭔가 손끝에 저릿함이 감돌았다.
대낮부터 일어나 혼잣말을 내뱉는 나는 정신이상자로 보일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말 못 할 감각, 상담하려 해도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취업준비 하다가 미쳐버렸나.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
처음에는 이상한 감각이었을 뿐이라고 넘겼던 것들이 하나둘 퍼즐처럼 맞춰졌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날씨를 예측했을 때는 감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예측에 가까운 행동을 취할 때마다 단순히 감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평소처럼 한강에 서서 강의 공기를 쐬고 있었다.
전과는 조금 다른 심정으로 강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다리를 훑어보았을 때는 누군가가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
난, 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체는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실루엣만이 눈에 들어왔지만, 발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마음 한구석에서, 저 사람을 구하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구할 수 없다. 나만 같이 죽을 뿐이다. 그 감정에 쉽사리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뭐,”
갑작스레 내 쪽을 향해 발산하는 빛.
그리고 동시에 울리는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거세게 울리는 빠아앙. 소리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반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
“환영합니다. 용사님들…!”
이건, 내가 알던 광경이다.
내 꿈에서 봤던 그 장면이었다. 그저 꿈이라고 같잖게 넘겼던 것들이, 모두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제한적인 데다가, 나는 꿈에서 무능한 놈이었다.
“세상에는 마왕들이 세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용사님들께서 이 마왕을 모두 처리해주신다면….”
앞에서 평소에 봤던 신하와 첫째 공주가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뭔가 이야기를 꾸려나갔다.
용사에게 동기를 불어넣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과 나라에서 제공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용사가 되기 위한 이야기를 꺼냈다.
“용사님께서는 스테이터스 라는 특수한 능력을 쓸 수 있다고 전해져 옵니다. 이는, 용사님만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꿈에선 이 능력이 없어, 용사가 아니라 판단 되었고 무능한 놈이라고 낙인찍혔다.
그래. 나는 낙오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꿈과 다르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을 허공에 올렸다.
“스, 스테이터스.”
제발. 이라고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간신히 입을 떼고 난 후엔 다른 용사들처럼 홀로그램 같은 화면이 내 앞에 떠올랐다.
꿈과는 달랐다. 나는 용사가 될 수 있었다.
해냈다. 나는 낙오자가 아니었어. 이것만은 꿈과 달라서 다행이야.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엄청나게 기뻐했다. 이제 안에 있는 내용만 확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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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번째 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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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뭘까. 번호 옆에는 이상한 글자가 뭔가 먹칠을 한 듯이 가려져 있었다.
대체 뭐가 쓰여있던 걸까. 용사마다 자기만의 개성 넘치는 능력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가려진 글자가 내 개별적인 능력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읽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흠이었다.
“잠시, 제3 왕녀님 납신다고 합니다.”
“엘리샤가 갑자기? 이런 일에 흥미 없다고 하더니….”
잠시 스테이터스 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건물 안쪽에서 어떤 신하가 급하게 뛰어와 제1 왕녀에게 내용을 읊었다.
그러자 첫째 공주는 깜짝 놀라는 듯 거대한 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신하를 물렸다.
그렇게, 거대한 문 사이에서 연보랏빛 모습의 그녀가 보였다.
꿈에서, 나를 붙잡으려 했던 그 여자였다.
그때의 꿈은 그저 꿈이었을까. 아니, 예지몽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나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손을 떨었다.
“…젠장!”
“뭐야?!”
“어?”
불길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춤거리던 발걸음은 조금씩 보폭이 커지고, 나는 점점 뒷걸음질 치다 이내 고개를 팍 돌려 그대로 거대한 문을 향해 달렸다.
나 외에 소환된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엘리샤 넬 테베레스.
꿈의, 내 생생한 기억의 마지막을 장식한 여자.
“뭐, 뭐냐! 요, 용사님?!”
“출구는 어디입니까.”
“이, 이쪽입니다만.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쾅! 거대한 문을 박차고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를 눈에 담았다.
그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놀란 목소리로 고함쳤지만, 이내 내가 용사 중 하나라는 걸 눈치챘는지 병사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빠르게 그에게 출구를 알아내고 그대로 정면을 향해 달렸다.
일주일 전. 그저 허상이라고 생각했던 꿈들은 모두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지금의 내게 경고등을 표시하고 있었다.
다른 용사들처럼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 용사를 잡아!”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살벌한 목소리.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열심히 달려 왕성을 빠져나갔다.
넓은 부지를 가로질러 화려한 장식물들을 거쳐 거대한 성문으로 다가가 커다란 나무 문을 바라보았다.
“열어!”
“…누구냐!”
“용사다. 지금 당장 열지 않으면 마왕이 당장 이곳을 침략한다!”
“앗! 네… 용사님! 열겠습니다! 수, 수고하십시오!”
소리쳐 문지기들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
급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경계하던 그들이었지만, 한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그들을 속였다.
당장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과 마주치면 나는 잡히겠지만, 그들은 갑옷 때문에 느려서 그런지 아직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왕을 처치한다면 자네들의 공도 치하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용사님의 공에 발을 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두 문지기는 내 임기응변에 따른 거짓말에 얼굴을 붉히며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절도있게 움직였다.
거대한 성문을 빠르게 빠져나 왕도를 바라보았다.
이 나라는 위험하다. 내게 안전한 곳 따윈 없다. 그 기억이,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다. 쉬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금화 한 푼 가지고 있는 것은 없었지만, 꿈과는 달리 용사라면 모험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세계에 명하노니.”
나는 익숙하지 않은 주문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입에는 익지 않은 주문이었지만, 귀로는 많이 들었던 것 같은 중2병 걸린 주문들.
어느 정도 달려 왕도 길 한복판에 서서 손을 활짝 펴 바닥에 겨누었다.
이미지 하는 것은 엄청난 공기를 압축해 나를 한 번에 위로 튕기는 것.
“바람이여! 내 모든 마나를 줄 테니… 나를 위로…! 윽?!”
쾅!
귀를 찢을 것만 같은 거대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고 시야를 뒤집었다.
아무런 확증 없이, 되기만 하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용한 것이었는데, 기억과는 달리 나는 용사였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상황을 되살펴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떠 상황을 지켜보려 했지만, 새하얀 공간에서 뭔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구, 구름?”
순간적으로 흰색 공간에 남겨져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내 내 몸은 바람을 맞으며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제야 나는 흰색 공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폭발음에 내가 실패한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날아올랐다. 이래서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착지는 제대로 할 수 있겠지?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무조건 죽을 것 같은데.
“저게, 바람으로 일으킨 충격인 건가?”
구름에서 벗어나자, 방금까지 내가 딛고 있던 왕도가 눈에 보였다.
내가 일으킨 바람 폭발 중심으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고, 주변 건물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무 강한 풍압에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며 우르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법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당장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전능감이 몸을 뒤덮었다.
푸르른 하늘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낙하산을 이미지 하며 손을 뻗었다.
“저건 뭐지. 거목?”
그렇게 공중에서 도심을 벗어나가, 울타리 같은 국경을 넘어갔다.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주변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한참을 가니, 멀리서 봐도 커다랗게 보이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게 생긴 거목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울타리처럼 펼쳐진 숲은 그 평야와 거목을 지키는 것처럼 감싸고 있었다.
“누구냐…?!”
“인간?”
“인간이 아무것도 없이 하늘을 난다고?”
“마법사구나!”
낙하산처럼 하늘하늘 내려온 나는 잔디밭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주변에 인기척이 들리더니 경계하는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나를 재는 듯한 모습으로 시선을 위아래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뭐라고 입을 털어야 그들이 이해해줄까. 내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저자세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저,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어딘지 물을 수 있을까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하늘로 발을 디딘 것이냐?”
“죄송합니다. 제가 원해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서요.”
“수상하군.”
고개를 꾸벅 숙여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과 동시에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내가 밟고 있는 평야에 발을 디뎠다.
그들의 귀는 머리 위에 달려 있었고, 그 귀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긴장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르미야 거목의 중심지. 수인들의 평화구역이다.”
“르미야…. 아, 그 모험가 카드의 재료.”
개의 귀를 가지고 있는 사내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내 뒤에 자리하고 있던 르미야 거목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거목을 한 번 바라본 나는 입을 슥 벌리며 예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특이한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모험가 카드를 떠올리며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나무들보다 크기는 월등히 커서, 빌딩만 한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속셈이 있는 거겠지?”
“아니요. 혹시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을까요…? 제가 길을 잃어버려서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르미야 거목이고 나발이고, 문화가 짐승과 다름없는 아인들 사이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단 테베레스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다른 나라로 떠야 하는데 다른 나라가 무엇이 있고,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몰랐다.
지도를 하나 구하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틈도 없이 도망쳐 나왔으니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지도가 있긴 할까. 불안감이 도졌다.
“…저기로 쭉 달리면 엘븐이 있고, 조금 틀어 이쪽으로 달리면 다이센 왕국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경계하는 사내들 뒤에서 갑자기 어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틀었다.
여기 더 있다간 진짜 수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받고 위험인물로 찍히면 곤란하니 빠르게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