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episode10 집착 (2)
엘리샤가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내 등줄기는 서늘해져만 갔다.
뭔가 잘못 걸렸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째서, 왜 나인가?
왜 나한테 그러는 걸까. 외모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거니와 능력적인 부분에서조차 모자란 부분투성이였다.
잘난 곳 하나 없는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살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광적인 집착이 소름돋게 무서울 뿐이었다.
“…아, 알았다. 그새 여자를 만든 거구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입꼬리를 쭉 내리더니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힘이 센지, 배를 깔린 나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힘을 주면 쥘수록 그녀의 힘이 더 강해졌다.
나는 ‘미카엘’이나 ‘아크’ 같은 신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머저리라는 걸 엘리샤가 직접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여자에게 구애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데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아니, 내가 널 사랑할 이유도, 네가 날 사랑할 이유도 모르겠어.”
“괜찮아. 이제 하나씩 알려줄게. 자 일단 왕성으로 돌아가자. 아버님께 허락을 받아야 식을 올릴 수 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엘리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진심인 걸까.
나는 잠시 고뇌하다가,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 말에도 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부터 알려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엘리샤는 몸을 일으키고는 내게 손을 건넸다. 이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았지만, 잡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장에 나는 엘리샤보다 약했으니까.
“진작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거든.”
“…이런, 큰 마차가?”
엘리샤가 타는 마차는 전에도 봤지만, 그때와 다르게 가까이서 눈에 담으니 화려하고 거대했다.
집 앞에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부는 자신의 중절모를 벗어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그런 중년 아저씨에게 인사하듯,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까딱거렸다.
나는 마부에게 목을 조금 숙여 인사하고는 엘리샤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엘리샤가 중간에 방심하는 그 기회를 노려야만 했다. 당장에 도주한다고 해봤자, 금방 잡혀서 경계만 더 심해지면 곤란했다.
한 번에 성공해야만, 지금 손발이 자유로울 때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왕성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호위 안에 싸여 나가지도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참. 이 마차는 광장을 지나갈 거야.”
“…근데?”
“거기에 리타가 있거든. 보고 가면 좋겠다 싶어서.”
리타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은 후 마차 안에 있던 커튼을 한쪽으로 치워냈다.
그녀의 말이 너무 뜬금없어 퉁명스럽게 반응했지만, 이내 그녀의 말이 섬뜩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개처형이랬는데, 그걸 지금 당장 한다고?
아니, 지금 며칠이나 지난 거지? 하루 만에 이런 일들이 벌어날 수 있는 걸까.
이래서는 마치,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준비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곧 도착해. 리타는 성하의 목을 졸라서 한 번 죽였다고 했었지?”
엘리샤는 미소를 지으며 창문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쿡쿡 웃으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광기 어린 표정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누군가, 정적도, 정치범도, 범죄자도 아닌, 그녀의 친구인 리타를 죽인다 하는 그녀의 표정은 섬뜩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똑같이 한 번 죽여주기로 했어.”
“그, 그럴 필욘 없어. 이미 기어스도 걸었고 나는 걜 용서했었으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왜? 리타 좋아해? 리타랑 결혼하고 싶었어? 나 말고 리타였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왜 꼭 그런 이야기로만 흘러가는 거야?”
“내가 말하고 있는데 리타 걱정만 하고 있잖아. 이게 리타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야?”
입꼬리를 올린 엘리샤에게 순간적으로 압도당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그녀를 용서했고, 나는 괜찮다고 어필해 보지만 엘리샤는 가만두지 않았다.
이미 말이 제대로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듯,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가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랗게 뜬 눈동자는 나를 사로잡는 것 같았고, 나는 그 기백에 짓눌려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알았어.”
하지만 이내 엘리샤가 꼬리를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지만, 광장에 도착한 엘리샤는 마부에게 멈추라 손짓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사형을 중지하라.”
“엘리샤 왕녀님! 네! 알겠습니다!”
“엘리샤 왕녀님….”
우아한 자세로 급조한 사형대에 다가가 사형을 중지시킨 엘리샤는 다른 주민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걸었다.
사형 집행관들은 엘리샤의 말에 빠르게 움직여 리타의 목에 걸려있던 밧줄을 빠르게 풀어 그녀를 해방시켰다.
리타의 머리에 씌워진 검은 천이 풀리고, 리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 자를 나무 기둥에 묶어 돌을 맞게 하라.”
“네!”
“에, 에리….”
“무엄하다!”
“윽!”
그녀를 풀어주리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안일했다. 엘리샤는 광기에 사로잡힌 미친 년이었다.
엘리샤는 손짓하며 처형의 내용을 바꾸었고, 리타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를 애칭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내 옆에 있던 사형 집행관에게 구타당했다.
손에 땀이 쥐어진다. 지금, 나 혼자만 이 마차에서 저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리타의 처형을 엘리샤가 주도하는 이 순간, 나는 혼자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천천히 자리를 옮겨 사형대 반대 풍경을 비추는 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한 번이라도 행동에 걸림이 생기는 순간, 나는 잡히고 말겠지. 모든 것은 실수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너무 긴장한 탓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땀이 맺혔다.
“자, 잠시만요!?”
쾅!
문고리를 내린 순간 발로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뛰어올랐다.
아무리 내가 힘이 일반인의 범주라 하더라도,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능력의 보정을 받지 못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운동을 열심히 해왔다.
문을 박차는 순간, 마부의 당황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거하게 굴렀다.
낙법 정도는 터득했다 생각했는데, 마냥 잘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지금이라면 내가 도망치는 모습이 마차에 가려질 테니, 엘리샤가 나를 쫓는 데도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당장 마부가 엘리샤에게 보고한대도, 어느 정도의 유예는 있으니까 빠르게 골목 사이로 숨어들어야 했다.
“왕녀님!”
마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부의 목소리가 저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는 생각은 나를 점점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고, 몸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쿵. 하고 건물 모서리에 박아도 아픈 부분을 문지르고 있을 새가 아니었다.
“성하!!”
뒤에서 비명처럼 들려오는 엘리샤의 목소리에 한이 담긴 것 같았다.
공포가 따로 없었다. 나를 향한 그녀의 목소리는 칼같이 날카로웠고, 얼음같이 차가웠다.
내가 순순히 따를 때는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나를 대하다가도, 내가 그녀를 거스르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험악해지고, 흉악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감금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다.
“허억, 헉. 헉…!”
지구력 싸움이다. 아니, 이건 심리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마법은 쓸 수 없다. 다른 나라로 도망가자니 당장에 쥐고 있는 돈도 없고, 신분증도 없다.
전에 들고 다니던 가방에 금화를 모아놨는데 아마 엘리샤가 의도적으로 뺐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동료가 죽었다면, 신분을 보증해줄 사람도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뭐에 매달려 살아야 할까. 어디에 정착해 살 수 있을까. 엘리샤의 눈을 피해 이 나라에서 정착한다니 그런 게 가능할까.
국경을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고 싶었다.
“꺄악!?”
“뭐야!”
“죄, 송 합니다!”
골목에서 떠들고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둘을 밀치고 앞으로 돌진했다.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지만, 그들에게 서서 사과할 틈은 없어서 급하게 고개만 돌려 소리쳤다.
“여기까지면 되겠지…?”
나는 닭살이 돋은 피부를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골목을 아무렇게나 달려 숨어들어왔으니 이곳에서 나를 찾는 것은 힘들 것이다.
잠시 숨을 돌리다가, 이대로 한 방향으로 계속 달려, 보초가 서지 않은 국경을 넘는 것이 이 상황에 가장 좋은 방안이었다.
여기가 만약 화려하게 발전한 시대였다면, 국경을 맨몸으로 뛰어넘는 것은 자살행위겠지. 하지만 중세시대의 국경이라면 눈을 피해 어떻게든 돌아다닐 수 있다.
모험가라는 신분이라면 어떻게든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신분증과 돈이 없는 게 가장 큰 흠이지만, 당장에 위험한 이 나라에서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조금만 지체하면 지천에 병사가 깔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
혀를 차고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점점 속도를 올렸다.
갈수록, 내가 무능한 놈이었고 동료의 덕을 봤다고 세상이 일러주는 것 같아 너무 불쾌했다.
상처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는 불사의 몸은 ‘카보드’의 덕이라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없이, 마나도, 마력도, 용사의 선택도 받지 못한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역할도 받지 못할 무능한 놈이라는 것이다.
당장에 소리치고 울고 싶었다. 어디에 대고 한탄하고 싶었다. 이럴 거라면 나를 왜 이런 세상으로 끌고 온 건지도 의문이었다.
“으아아아!”
골목을 뛰쳐나와, 도시를 빠져나와, 초원으로 달렸다.
몬스터가 언제 들이받아도 모르는 평지에서, 소리치며 달렸다.
폐가 아파 왔다. 아파도 상관없었다. 통증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며칠이고 달려 국경에 닿았으면 좋겠다.
“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성하. 도망가?”
“…어떻게.”
“내가 묻잖아. 도망간 거야?”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내가 묻고 있는 말은 안 들려? 지금 나한테서 도망간 거야?”
벌써 다리가 풀렸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뒤를 슬쩍 돌아보는 순간, 병사를 이끈 엘리샤가 차근차근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따라온 걸까.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걸까. 골목에서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 잡혀가는 건가. 싶은 감정보다도, 어떻게. 라는 감정이 앞서서 떨리는 입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광기 어린 눈으로 나를 날카롭게 내려보고 있었다.
“성하. 나는 마음이 아파. 나는 성하를 믿었는데, 왜 성하는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해? 나는 성하만 있으면 되는데, 성하는 다른 여자도 있어야 해? 바람피우는 건 용납 못 하는데, 다 죽여버릴 거니까 성하는 첩 못 만들어. 처는 나뿐이야. 성하, 도망친 벌은 돌아가서 받자? 자.”
“…오지 마!”
“…뭐?”
“오, 오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엘리샤는 가련한 목소리로 상처받은 듯한 사람의 몸짓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는 분노가 쌓여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잡혀가면 안 된다. 이대로 잡히면 내 인생은 속박되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녀가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심장은 크게 뛰었다.
엘리샤와의 거리가 10미터 정도 됐을 때,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소리쳤다.
“…….”
“난 진심이야.”
“이번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 왜 맨 처음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거야? 왜? 왜… 성하는 왜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난 성하가 이렇게 좋은데, 성하가 살아나면 날 좋아해 주지 않아. 성하가 날 좋아할 때면 죽어버려. 왜. 왜 그러는 걸까. 나는 성하랑 평생을 살고 싶은데, 같이 지내고 싶은데 왜 그러는 걸까. 죽지 마. 죽으면, 안 되잖아. 생명을 소중히 해. 나는 성하가 좋아. 그런 성하가 죽으면, 죽으면 나는….”
“알겠으니까, 다가오지 마.”
“괜찮아. 성하가 죽으면 나도 죽어줄게.”
엘리샤의 침묵을 보고 느꼈다. 이건 먹힌다.
나는 못을 박듯이 이빨에 혀를 가져다 댔다. 당장에 날붙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쉽게 흘러가겠지만, 맨손이라 혀를 깨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엘리샤는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을 쥐어뜯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이를 까득 깨문 그녀는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먹혔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위협하듯 혀를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