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episode10 집착 (1)
*
“여긴 어디지….”
“여기 잊었어? 우리 집이잖아. 너와 나만의 집.”
“…그런 집을 가진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자, 처음 보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엘리샤가 있었다.
세라는, 큐라는? 그리고, 리타는. ‘미카엘’과 ‘아크’는?
주변에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찾아야 할 것이 많았다. 나는 평소와 같은 농담을 던지는 엘리샤를 뒤로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게 많아서 지금 여기서 발을 묶일 수는 없었다.
희생자를 파악해야만, 구체적인 목표를 잡을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마.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그대로 쓰러지게 할 수 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
“‘미카엘’? 다행이다. 네가 죽을 것 같진 않았지만….”
엘리샤는 평소와 다른 말투로 내 허리를 감쌌다. 방금 정신을 차려서 못 알아채고 있었던 건지, 허리에는 ‘브레이커’가 박혀 있었다.
상처 부위는 움찔거리면서 ‘브레이커’를 꽉 쥐고 있었다.
엘리샤는 이를 씩 드러내면서, ‘미카엘’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미카엘’은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우물쭈물거릴 뿐이었다.
나는 ‘미카엘’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만지려 했지만, 엘리샤가 용납하지 않고 내 손을 붙잡았다.
“‘미카엘’에게 손대지 않는 게 좋아. 지금 저와 약속 하나를 했거든.”
“무슨 약속…?”
“네 몸에 있는 ‘카보드’를 넘기는 대신, 널 도와주지 않기로.”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흘러들어왔다.
이해할 수 없어서 두통이 계속해서 일었다. 마왕의 손에 세라가 죽고, 리타의 손에 큐라가 죽었다.
그런 상황조차도 이해하기 힘든데, 왜 엘리샤는 자꾸 내게 심술을 부리는 걸까.
슬슬 참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려 했다.
[죄송해요. 저는, 며칠간의 관계보다 천계가 더 중요해요.]
“‘미카엘’님. ‘카보드’를 드릴 테니 약속대로 천계로 얌전히 돌아가 주세요.”
[…응.]
“아.”
‘미카엘’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하더니, 엘리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샤는 내 옆구리에 박혀 있던 ‘브레이커’를 뽑아 심장에 꽂았다.
아파.
“‘카보드’. 처음 보시죠?”
[심장, 모양이라는 건 처음 알았어.]
“끄아아아아아악!”
‘브레이커’에 마나를 집어넣은 엘리샤의 표정이 어딘가 밝아 보였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괴롭다. 괴로워서, 당장에 손가락 하나조차 다 떼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온몸에 날뛰는 모든 마나가 뛰쳐나가려는 듯이 몸을 휘적였다.
내 심장에 박혀 있던 ‘브레이커’는 사용 횟수가 모두 소모되었다는 듯 가루로 돌아가 버렸지만, 엘리샤가 내 심장을 뽑아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심장을 잃은 나는 고통에 잠겨 바닥으로 쓰러졌다.
“자. 돌아가세요.”
[…그런데, 난 이미 심장이 있는걸.]
“여분의 심장은 성하에게 주시겠어요?”
[잠시나마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았어. 주인님으로 모셨던 건 진짜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자. 내 심장을 줄게. ‘카보드’를 지니고 있어 줘서 고마워. 이로써 평생 풀지 못할뻔했던 숙제를 풀었어.]
‘미카엘’은 자신의 심장을 내게 넘기고, 내 심장을, ‘카보드’라고 불리던 심장을 챙겼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일더니 그녀를 감싸고, 그녀는 점점 형태가 커졌다.
[…아!]
‘미카엘’의 모습이 성숙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아름다운 흑발. 빛나는 황금빛 동공이 나를 향했다.
나는 겨우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약속대로 난 갈게. 미안해.]
“잘 가요.”
엘리샤는 ‘미카엘’을 떠나보내고선 미소를 씩 지었다.
빛의 입자로 흩어져 사라진 ‘미카엘’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 어차피 줄 생각이긴 했으니 상관없나.
뭐, 며칠 잠깐 본 나보다, 자신을 만들어준 신이 있고, 몇천, 몇만 년을 살았던 천계가 더 그리운 건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단 둘뿐이야.”
“…농담은 그만둬. 다들 어디 갔어?”
연보랏빛 눈동자가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숨을 허덕이면서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밀쳤다.
점점 불쾌해진다. 이런 질 나쁜 농담은 한두 번으로 족했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왜? 왜 농담이라 생각해? 왜? 왜? 내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뭐야.”
“좋아한다고. 좋아해. 여태까지 꼭 숨겨왔어. 성하가 마왕을 잡을 때까지 바람피우는 것도 눈감아줬어. 어때? 나 착하지 않아? 마음 넓지 않아? 이제 성하 나랑 결혼할 수 있지? 이제 우리 아버지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거야. 좋지? 응?”
“왜, 왜 이래!”
밀쳐진 엘리샤의 눈빛이 돌변했고, 그 눈빛은 완전히 날카롭게 바뀌어 있었다.
온화한 그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딘가 질척이는 시선만이 남아있었다.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엘리샤는 들이밀 듯이 광적인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를 밀쳤다.
“왜? 왜 거절하는 거야…? 성하는 나 좋아하잖아? 나도 성하 좋아하는데, 왜…?”
“왜 이러는 건데! 다른 애들은 어디 갔냐니까? 세라는…, 큐라는…?”
“둘은 이미 죽었잖아. 용사 편에 붙은 마족을 마계에 데려가면 원래 그런 꼴이 돼. 큐라는 리타가 죽였잖아. 있을 리가 없지.”
“리타는 어디 갔는데?”
“아. 리타? 용사의 동료를 죽인 죄로 처형식을 올리기로 했어. 좀 있으면 공개처형 시작할 거야.”
엘리샤는 내가 아무리 밀쳐내도 무섭게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충격에 못 이겨 넘어진 내가 필사적으로 다른 애들을 찾자, 그녀는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그녀들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잘했지? 리타가 보고한 것 중에, 그년이 성하를 죽였다고 고해하는 거 있지? 그래서 괘씸하더라고, 그래서 공개처형식으로 죽이기로 했어. 무슨 처형이게?”
“미친 거 아니야?”
“아니? 성하가 먼저 바람피운 거잖아? 뭐, 리타는 성하에게 손대서 그랬고.”
“제정신이 아니야 너….”
엘리샤는 칭찬해달라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힘으로 이길 수 없어서 제대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리타를 공개처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입꼬리를 올린 채 형벌을 맞춰보라는 듯 말하는 엘리샤를 보자 몸이 떨려왔다.
그녀의 속내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광기가 느껴졌다.
나는 이를 까득 깨물고 엘리샤에게 화를 냈지만, 엘리샤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넘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성하와 나 사이에 방해물은 없어. 마왕을 물리쳐서 자격도 얻어서 내 남편으로 들어올 수 있어. 다른 여자도 없어서 결혼하기도 좋아. 바람피울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게 좋아. 다 죽어서 다행이야. 헤헤. 이제 우리 둘뿐이야. 사실 그거 알아? 여기 성하가 먼저 집을 산 곳이다? 나는 이런 집이 있는지도 몰랐어. 아 맞다. 저기 뜰 보여? 성하가 있어서 나는 정말 새로운 세상을 봤었다? 역시 나는 성하를 만난 게 행운이야. 성하, 왜 눈을 피해? 내가 싫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그보다 성하 여자들이랑 몇 번이나 몸 섞었더라? 세라랑도 자봤고, ‘미카엘’이랑도 했었지? 나 그때 정말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미카엘’은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바람피운 성하가 잘못했으니까, 성하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자. 다음부터 바람피우지 못하게 잘 막아야지.”
얼굴끼리 맞닿을 것같이 가깝게 들이댄 엘리샤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홍조를 띄운 그녀의 연보랏빛 동공에는 어딘가 모를 공포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내게 도망가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점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건지, 말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부터, 내가 산 집 이야기, 내가 몸을 섞은 여자의 이야기. 모든 걸 보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 했다.
그보다, 나는 내 돈으로 집을 산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정말 다른 사람이랑 헷갈려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난 내 돈으로 집 산 기억이 없는데.”
“내가 지금 사람을 헷갈릴 것처럼 보여? 유성하. 네 이름이잖아. 이 이름을 내가 잊을 리가 없지. 성하 같은 사람을 내가 헷갈릴 리 없잖아. 모욕이야. 자 성하? 이거 봐. 성하는 지금 아무런 능력도 없어. 성하가 죽지 않고 계속 부활했던 것은 ‘카보드’라는 심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야.”
“윽.”
내가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지만,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듯이 그녀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내 머리 옆에 콱 찍었다.
그녀는 혀로 내 입술을 핥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무섭기 짝이 없었다.
엘리샤는 단도로 내 볼에 자그마한 상처를 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달콤한 듯이 핥으며 내가 무능력자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내 능력의 원천이 ‘카보드’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나는 내 능력으로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일까.
“아, ‘아크’는 봉인했어.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한 풋내기 신기라 전에 ‘미카엘’을 빼 왔던 기관에 던져놨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세라랑 큐라는 찾을 생각 하지 마. 이미 마계랑 같이 시체도 사라졌거든.”
“…….”
“성하는 이제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면 돼. 이제 다른 년들은 없으니까.”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엘리샤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아크’의 소식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세라와 큐라의 시체가 마계와 함께 소실되었다는 소식도.
나는 그녀가 왜 나한테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잘못? 아니? 성하는 잘못한 거 없어. 오히려 반대야.”
“반대…?”
“성하는 날 사랑해주었으니까. 성하가 내게 이런 마음을 가져다주었으니까 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어. 미쳐버릴 뻔했던 그때도 성하가 있었으니까 미치지 않았고, 모두 포기했을 뻔한 그때도 성하가 있었으니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 성하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어. 성하가 없는 세상은 가치가 없어. 모두 쓰레기들이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다른 년들은 눈에 담지 마. 이제 나와 함께 내 방에서 생활하는 거야. 그럼 그동안 바람피운 것도 용서해줄게. 아니, 혼은 조금 내야 하나?”
엘리샤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첫사랑을 이야기하듯이 설레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나와 그녀가 그만큼 알고 지낸 적이 없는데, 왜 그녀는 나와 긴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평범하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위협하듯이 단검을 들고 내 목에 들이댔다.
날이 가까워지자 나는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자칫 저 단검에 죽을 수 있는 거다.
겨우 마왕을 잡아놓고 여기서 죽게 되는 것은 너무 개죽음 아닌가. 이럴 거였다면 동료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왕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 잠깐만. 이야기를 해보자.”
“응. 나 성하랑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 아들 이름부터 지을까? 딸 이름부터 지을까? 나 한 10명은 낳고 싶은데.”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럼 신혼여행지? 음, 여자들이 별로 없는 곳이 좋지만, 그건 권력으로 물리면 되니까 바닷가로 할까?”
틀렸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이미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야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을까.
자력으로 도망갈 수 없는 상대라 말로 설득해야 하는데, 말이 통하질 않으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그녀에게 묶여 살 게 뻔해서 두려웠다.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흐응~ 성하 눈알 굴린다. 생각이 많구나? 성하 잔머리 굴리지 마? 이미 성하 습관은 다 꿰고 있어. 손짓, 눈길, 표정 변화 하나에도 무슨 생각하는지 대강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미친.”
“우리, 왕성으로 돌아가자. 성하가 더 이상 다른 생각 하지 못하게 권력의 맛을 느끼게 해줄게. 돈도 펑펑 쓰게 해줄게. 여자는 마음대로 들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돈이나 권력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그런 거 필요 없어.”
“왜? 성하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냥 내가 싫은 거야? 내가 싫은 거지? 눈에 들여놓은 다른 년이라도 있어? 설마 ‘아크’랑도 관계를 맺으려 했던 건 아니지?”
엘리샤는 내가 잔머리를 굴리는 순간,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콧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미 다 꿰고 있으니 잡생각 말라는 듯 경고하듯이 단검을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그리 뻔한 사람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알아차렸다.
엘리샤는 나를 유혹하려는 건지, 내 배 위에 올라탄 채로 가랑이를 조금씩 비비며 권력과 재력의 제공을 약속했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당장에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이 무서워서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내 손바닥 한가운데를 단검으로 꿰뚫었다.
“끄윽?!”
“아아, 성하. 미안해.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성하가 바람피우려고 하니까 벌을 준 거야. 미안해? 하지만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해.”
이미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사랑해.”를 연달아 말했다.
“…….”
그리고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변한 엘리샤는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무서운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던 엘리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난 이렇게 사랑한다고 해주는데, 성하는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안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