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9화 〉episode8. 아크 (5) (59/98)



〈 59화 〉episode8. 아크 (5)

*

눈을 뜨니 어느 방이었다.
전에도 봤던 것 같은 방에서 눈을 뜨니 옆에는 엘리샤가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요새 자꾸 정신을 잃으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네.”

눈을 비벼 초점을 뚜렷하게 하고 나니, 엘리샤의 개인 주택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수 있었다.
엘리샤는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만졌다.
많이 걱정했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험한 걸  것도 아니고 그저 ‘미카엘’의 과거사나 ‘아크’의 과거사를  것뿐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문을 보니 이미 한밤중이   오래인 것 같았고,  침대 한쪽은 ‘미카엘’이 차지한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왼쪽 팔목에는 ‘아크’가 팔찌인 채로 잘 있으니 안심이었다.

“성하 씨.”
“응?”
“저는 성하 씨가 좋은데, 성하 씨는 왜 자꾸 멀리 가버릴  같이 말하는 건가요?”
“…그야.”


내가 엘리샤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엘리샤가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엘리샤는 자신의 가슴을 꼭 움켜쥔 채 호소하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그녀가 받아들여 주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고향에서 그리 나쁘게 살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계셔. 지금쯤 부모님은 날 걱정하고 계실 거야.”
“…그런, 가요. 여기서 새롭게 출발하려는 용사님들은 많은데, 성하 씨는 역시 돋보이시는 분이시네요.”
“걔네 과거사를 일일이 알 수는 없잖아.”
“돈과 권력, 명예의 맛을 알아버린 자들은 자신의 밋밋한 세계로 돌아가 평민이 된다는 것은 꿈도   없는 일이죠. 이건 성하 씨가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성하 씨도 그런 맛을 느껴보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엘리샤는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잠깐 숙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돈, 권력, 명예를 앞다투어 차지하려 하는 용사들의 이야기를 읊으며 나 또한 그러지 않냐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는 동감한다. 나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고, 권력 좋아하는 흔해빠진 평민이다. 명예는 다른 사람이 나를 추앙한다는 데 있어 더 바랄 것도 없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세계는 결국 나에게 있어 환상이고, 돈은 가치 없는 금속 덩어리일 뿐이며, 권력은 소꿉놀이의 역할에 불과하다. 명예 또한 뒤 닦을 휴지 나오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나는 결국 돌아갈 것이고, 이 세계는 내게 있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경험을   있는 터전으로 삼고 돌아가길 기원했을 뿐이다.
이걸 속내 그대로 말한다면 전과 같이 험한 꼴을 당하겠지.

“나도 돈이랑 권력, 명예 뭐든 좋아해. 싫어할 사람이 없지. 풍족하게 살며, 누군가의 환대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걸 마다할 사람도 없어.”
“그렇다면…!”
“그런데 난 이 세계가 싫어.”


나는 솔직하게 그녀가 말한 것들이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엘리샤는 그런 내 틈을 파고들려는지 몸을 일으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엘리샤의 말을 막으며 차갑게 말했다.

“용사가 아닌 소환자는 낙오자일 뿐이며, 그런 낙오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교회에 맡겨지는 것.”
“…그래서 모험을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원래 그런 혜택은 없어. 그냥 네 변덕이나 사심이 있었을 뿐이야. 원래라면 그런 혜택 같은 건 받지 못한  바닥을 뒹굴다가 그대로 죽었겠지 나는.”

나는 용사가 아니라고 판명 난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불과  달 전쯤의 이야기인데도, 벌써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는 기분이었다.
비웃는 소리를 가로질러, 낙오자라는 명찰을 달고 교회로 맡겨지는 그때의 기분은 아직도 역겨웠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깔보는  같아서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교회에서 방탕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잊기 위해, 나도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험을 자처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뿐이었다.

“미안해.”


나는 상대방에게서 느낀 모멸감들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왕궁에서 용사라고 불린 녀석들을 포함해 나를 소환한 귀족들과 첫째 공주의 표정을 잊을  없었다.
안내를 받아 교회를 가도, 리타를 따라 모험을 나서도, 길드에 가도 나는 언제나 뒤따라오는 혹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 일이 쉴 새 없이 반복되고 나니, 나는 어느새 나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게 나야. 나는, 버틸 수가 없어서… 더는 있고 싶지 않아.”

나는 엘리샤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도 내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추악한 본성이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만큼, 자격지심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만큼 더럽고, 쓸데없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자각할 때마다 방향을 잃고, 나아갈 힘조차 잃어갔다.
이 세계는 나를 그런 상황에만 몰아넣어 괴롭게 했다.


“…괴로웠겠군요. 나도 그 기분 알죠. 한낱 공주로 태어나 그런 감정을 어찌 아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성하 씨를 잘 아는 만큼, 성하 씨가 무슨 기분인지도  알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
“제 남편이 되어주신다면, 그런 시선 하나 없게 해드릴게요. 성하 씨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뤄드릴게요. 성하 씨를 위해 제가  수 있는 거라면 모두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성하 씨를 사랑하는데,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잖아요. 자, 보세요. 성하 씨는 뭐 때문에 괴로운가요? 사람 때문인 거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위치에 따라 상대의 반응이 달라요. 성하 씨가 휘말린 소환자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걸 거에요. 하지만 성하 씨가 저의 남편이 되어준다면, 성하 씨를 깔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 것 같나요?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성하 씨가 일군 것들이 확실히 남아있죠. 그러니까  생각해주세요. 제가 성하 씨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샤는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던 나를 꼭 끌어안았다.
머리가 그녀의 품에 안기자, 왜인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누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했다면 울컥했을 테지만, 왜인지 그녀가 말하니 정말로 이해받는 것만 같았다.
이런 편안한 기분, 좀처럼 없었는데 이 기분이 나를 계속해서 안정되게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품에 안긴 채 그녀의 목소리에  기울였다. 엘리샤도 그걸 아는지 내가 침묵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남편이 되면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혜택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생각하는지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사람들의 시선과 대우 때문에 힘든 것이다. 나를 멸시하고 낮잡아보며, 천대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엘리샤는 계속해서 그런 일들은 없게 할  있다면서 나를 설득함과 동시에 내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긴 했다. 당장에 베르틱만 갔다 왔는데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것을 보면, 내 원래 세계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돌아갔는데 이미 몇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떨리는 몸을 엘리샤가 진정시켜주려는 듯 꼭 끌어 안아주었다.
이렇게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막상 위로받고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듣고 나니 혹하기도 했다.


“성하 씨가 그리 약속해주신다면, 제가 결혼반지도 예쁜 것으로 챙겨올게요. 식은 리타가 소속되어 있던 대성당에서 치르도록 하죠. 많은 사람을 불러, 성하 씨가 이제 저의 남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하 씨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고, 저는 성하 씨와 사랑을 나눌 일만 남는 거죠.”
“사랑이라니…. 내가 그렇게 좋아? 난 아직도 모르겠는데.”
“…저는 성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성하 씨만, 성하 씨만이 저를 채워주는 감각이에요. 아세요? 당신의 이름만이, 모습만이 저를 구원해준다는 감각을요.”
“전혀 모르겠어. 나는 연심을 품을 틈도 없었거든.”


엘리샤는 몸을 떼더니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어루만지더니 이내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어 눈을 마주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얼굴을 보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지 계속해서 결혼할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엘리샤는 손을 맞잡은  침대로 슬금슬금 올라와 내 다리에 올라탔다.

“제가 가진 부, 권력, 명예를 드릴게요. 제게 와주실 수 있나요?”
“그런  탐내고 인생을 맡기진 않잖아?”
“저는 성하 씨가 좋아서 뭐든 해드리고 싶거든요. 탐내고 인생을 맡기셔도 돼요.”

엘리샤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준다며, 누구라도 혹할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마음이 이끌리긴 하지만, 확실히 거절해야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반박하자 그녀는 내 몸을 밀어 침대에 눕게 했다.
엘리샤가 위에서 나를 덮치는 자세를 취한  나를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 건데, 어째서 나한테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거야?”
“저는 성하 씨에게서 모든 것을 받았으니까요. 처음 보는 저를 구해주시려고 목숨을 내던진 사람에게 마음을 품기도 하는   있는 일이죠. 저는 성하 씨야말로 용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사람을 구하려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그녀의 심중을 알 수 없어 물어본 답에 돌아온 말은 그때의 죄책감이 아닌, 그 상황에 대한 연심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그녀가 여기서 살아온 동안 품었을 연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건가.
이러니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다르지. 나는 그녀를 구했던 일을 떠올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옆에서 뭐 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미카엘’님. 저 잠시 성하 씨랑 몸  섞고 싶은데 자리  비켜주시겠어요?”
“안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서 ‘미카엘’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깬 것 같아 미안했다.
나도 솔직히 엘리샤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몰라서 ‘미카엘’의 물음에 대강 대답했다.
그 와중에 엘리샤는 ‘미카엘’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다니 대체 무슨 마음가짐인지는 몰라도 ‘미카엘’을 나가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전처럼 또 짜이면 괴로울 것 같으니 여기서 ‘미카엘’이 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성하 씨. 거절하시는 거예요?”
“강제로 하는 건 싫거든.”
[맞아. 나가도록 해. 왕녀. 하고 싶다면 주인님이 하고 싶도록 어필하라고.]
“…아쉽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둘까요. 성하 씨. 잘 자요.”

엘리샤 입을 비죽이며 나와 ‘미카엘’을 번갈아 보았다.
마냥 싫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강제적으로 하는 건 싫어서 엘리샤의 눈을 슬쩍 피했다.
그러자 ‘미카엘’이 손가락으로 엘리샤를 가리키면서 나가라고 말했다.
엘리샤는 ‘미카엘’의 눈치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방을 나갔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주인님은 인기가 많네요. 주변에 다 여자고.]
“그건 내 의지가 아니야.”
[흐응. 그런가요? 파티 리더는 주인님이 아닌가요?]
“울보야. 조용히 해.”
[주인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침대에 편히 누워서 쉬려는데 이번엔 ‘미카엘’이 얼굴을 내밀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쪼그만 팔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래저래 말하는데, 솔직히 파티 구성원이 모두 여자인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의식하고 여자만 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진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미카엘’을 밀어내기 위해 울보라고 하니 ‘미카엘’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이건 악수였나보다. 어쩌다 보니 ‘미카엘’이랑 힘자랑을 하게 됐는데 뒤질  같다.
몸은 작은데, 힘은 어찌 이리도 센지 모르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