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episode8. 아크 (1)
“참 고마운 소리네. 그런데, 얜 바다에서만 일어나나?”
[아, 저기 보세요.]
이렇게 위로를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작 듣고 나니 무심코 쓴웃음만 지어진다.
그렇게 잠시 일어나기 위해 땅을 짚자, 붉은 창이 눈이 들어왔다.
아깐 사람으로도 변하더니, 지금은 말 없는 평범한 창이 되어있었다.
멍하니 창을 쥐려 하니, ‘미카엘’이 손가락으로 그녀들이 향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머메이드들을 향해 마법을 쏘아대는 내 파티가 있었다.
땅이 울리자 머메이드들은 자세와 대열을 무너뜨렸고, 그 위를 나는 큐라가 브레스로 모두 태워버리고 있었다.
뭔가가 불타기 전에 재가 되어 사라질 정도로 강한 불꽃이 하늘을 갈랐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네.”
내 마나를 먹고 간 세라도 분발하려는 건지, 거대한 마기를 일으키더니 많은 새를 꽃가루 뿌리듯이 사방으로 흩뿌렸다.
내가 없는 이틀간, 마법에 대해서 뭔가를 배운 걸까.
세라가 흩뿌린 수많은 새는 총알처럼 바닥을 걸어 나오는 남은 머메이드들의 심장과 머리를 꿰뚫었다.
수천의 머메이드들은 결국 복수는 이루지 못한 채 해변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갔다.
해변에 있던 인근 주민들은 하나둘씩 죽어가는 머메이드들을 보더니, 겁에 질려 도망가던 것을 멈추고 내 파티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기는 어떡하지.”
[‘아크’.]
그새 모든 머메이드들을 몰살한 그녀들을 뒤로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성창을 봤다.
둘 다 두 손으로 사용하는 무기인데, 우리 팀에는 창을 쓰는 녀석이 없으니 이대로 들고 다니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턱을 어루만지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중, ‘미카엘’이 나지막이 성창의 이름을 불렀다.
[우, 우으, ‘미카엘’님…. 저, 저는 바다가 아니면 엄청난 마나를 써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알아. 주인님에게서 받은 마나를 줄 테니, 장신구로 변해줄래?]
‘아크’는 ‘미카엘’의 부름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크’의 푸른 머리카락은 파도치는 바다처럼 웨이브가 있었다.
낑낑거리며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을 보니, 바다에서 짓던 그녀의 활발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의문을 품을 지경이었다.
삭신이 쑤신 건지 자신의 온몸을 두드리는 ‘아크’는 칭얼거리듯이, 자신을 부른 ‘미카엘’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시 못 하고 튀어나온 이유는 그냥 상하관계에 있어서인가.
‘미카엘’은 씩 웃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아크’의 입에 꾹 밀어 넣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이건.]
[응, 팔찌면 좋겠다.]
[이만큼이면 됐어요! 이제 많으니까요!]
‘아크’는 ‘미카엘’에게서 마나를 받고 놀란 건지, 눈을 크게 치켜뜨더니 나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마나가 내 거라 해서 그런 거겠지.
‘미카엘’은 그 와중에도, 무슨 장신구로 변해야 내가 편할지 고민해주었는지 구체적인 장신구를 말했다.
‘아크’는 황급하게 손가락을 떼어 내더니 심호흡하듯이 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그리고는 몸에서 빛을 발산하고는 이내 붉은 팔찌가 되었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요?]
‘미카엘’은 팔찌로 변한 ‘아크’를 줍더니, 내게 건넸다.
아까는 진주 목걸이였는데, 별의별 걸로 다 바뀌는구나. 이런 재주가 있다면 인벤토리 능력에 견줄 수 있겠지.
나는 ‘미카엘’이 건넨 ‘아크’를 들어 왼손에 끼웠다.
뭔가 내 몸에 차는 게 뭔가 많아지는 기분인데, 반지와 팔찌라니, 평소 끼지도 않던 장신구들이 점점 늘어나니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자자,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돌아가다니, 집으로 가는 것이냐?]
“성하 씨. 괜찮나요? 근처에서 옷 한 벌 사야겠네요.”
“정말, 오랜만에 몸 제대로 풀어보네요.”
세라가 팔을 번쩍 들면서 기운차게 소리 지르자, 큐라도 돌아가고 싶었는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둘은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았다. 근데 나도 집에 돌아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하. 하고 힘없이 웃고 있자니, 거친 숨을 몰아 내쉬던 엘리샤가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마법을 너무 과하게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엘리샤는 자신이 쉬는 것보다 내 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내 옷을 꽉 잡아당겼다.
후두둑 쉽게 뜯어지는 내 옷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옷을 사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엘리샤의 뒤를 따라오던 리타는 스트레칭처럼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원을 그리듯 팔을 움직였다.
[흠. 그럼 이럴 땐, 내 로브를 주는 게 좋겠네요.]
멍하니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미카엘’은 임시방편으로 자신이 두르고 있던 새하얀 로브를 내게 건넸다.
펄럭, 하고 내 어깨에 가라앉은 로브는 따뜻하게 내 몸을 감싸왔다.
‘미카엘’에게 무심하게 건넸던 로브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냥 이번에는 감사하게 받는 편이 좋겠지, 몸의 노출이 너무 심하니까 임시방편으로 쓰는 게 좋고.
‘미카엘’의 몸에 걸쳐져 있어서 그런 건지, 하얀 로브에는 그 피투성이 싸움을 거쳐왔음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돌아가는 건 제가 해줄게요!”
“옷은 그럼 돌아가서 살까요. 역시 저도 집이 가장 마음이 놓이니까요.”
[여기 여관이란 곳은 그닥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먹을만한 게 나오는 것 빼곤 좋은 게 없더구나.]
‘미카엘’에게 받은 하얀 로브 덕에 감동하고 있을 무렵, 세라가 신나서 손을 들고 소리쳤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발언권을 얻으려고 일어선 학생 같았다.
리타는 세라의 말에 동의하듯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 큐라는 나 없을 때 묵었던 숙소를 불평하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아니, 나는 여기서 묵은 적이 없는데 벌써 돌아간다고?
[어?]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세라는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새를 만들고 있었고, 나머지 동료들은 세라의 뒤를 따라 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에휴. 뭐 일거리도 끝났다는데 더 있어봤자 할 건 없겠지만.
‘미카엘’의 손을 꼭 잡고 그녀들을 향해 가려고 했는데, ‘미카엘’이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멈춰 선 ‘미카엘’이 신경 쓰여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니, 아니에요. 손을 잡아주실 줄은 몰라서.]
“베르틱 때도 잡았잖아?”
[따뜻하네요.]
“그러냐. 난 춥다. 바다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미카엘’은 별 사소한 일 가지고 혼자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가끔 급할 때나, 기분 나쁠 때면 아무 데나 잡히는 대로 잡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평범한 걸 좋아하는 아이는 아닐지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은 지금 이 기분을 얼버무리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작으면서도 확실하게 전해져오는 힘이 은근 따뜻하게 느껴졌다.
“성하 씨. 그렇게 보니까 아빠랑 딸 같네요.”
“이렇게 젊은 아빠가 어디 있어?”
“여기는 있어요. 꽤 빨리 결혼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미카엘’을 데리고 세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엘리샤가 슥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엘리샤는 ‘미카엘’을 만지지 못한 채 거리를 두면서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은 엘리샤의 말에서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대체 그 반응은 뭔가 싶지만, 괜히 이런 걸 일일이 반응해줬다간 내가 피곤해진다.
젠장, 시간 개념이 없어지는 것 같잖아.
괜히 빨리 지나가 버린 시간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직도 생각할 게 많은데, 왜 시간은 이렇게 무자비하게 지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하 씨.”
“왜?”
“괜찮아요?”
“왜…?”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아니, 이건 그냥 쉴 새 없이 싸우고 와서 그래.”
순간적으로 시야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생각이 멈추고 초점은 흐려졌다.
엘리샤가 부르는데도 무미건조하게 반사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두 번이나 말을 걸어서야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중에 뭔가가 타고 내리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손을 가져다 대니, 코피가 손에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안 그래도 데자뷔 같은 능력으로 힘을 끌어오는 것은, 힘을 끌어다 쓰는 만큼 부작용이 심한데 너무 무리했다.
솔직히 너무 간절했던 마음에 있는 대로 죄다 끌어다 썼더니 이런 꼴이 난 것이다.
어차피 몸은 낫는다.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막 싸워댄 것 같았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점점 나는 나를 스스로 존중하지 않게 되고, 나를 소중히 하지 않게 되어간다.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음에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쿨럭! 컥!”
코피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코를 꽉 잡고 있는데, 내 몸은 그걸 기다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폐에서부터 뭔가가 조여오는 듯한 감각이 사로잡았다.
꾹 눌러 참으려고 해봐도, 참을 수가 없어 기침하는 순간 입에서 걸쭉한 선혈이 튀어나왔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에 시야는 혼란스러워졌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신체는 무너지듯 땅에 주저앉아 피를 토해냈다.
금방 낫는다. 어차피 금방 나아. 이 정도는 금방 몸을 치료한다.
“성하 씨!”
[주인님!]
가까이 있던 엘리샤와 ‘미카엘’이 내 몸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달려들 듯이 얼굴을 들이대며 걱정했다.
그것을 본 앞의 일행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흐려져 실루엣 말고는 뭐가 보이질 않아서 답답하다.
“성하?!”
“성하 님?!”
[성하! 괜찮으냐!]
“괘,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냥 준비 마저 해.”
나는 나를 걱정하러 와주는 애들을 향해 손을 뻗어 뒤로 물렸다.
어차피 나을 몸인데 이런 사소한 다침으로 괜히 걱정만 끼치면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안 그래도 이 파티에서 가장 약한 놈인데 괜히 지켜줘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면 서로 불편해질 뿐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손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보니 마음이 심란해진다.
코와 입을 가린 오른손에는 이 이상 가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하 씨. 괜찮아요? 진정이 안 되면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왕국 전속 의료진들에게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 거예요.”
“에, 엘리샤. 마음은 고마운데, 괜찮아. 그렇게까지 심각한 거 아니야. 나 알잖아? 금방 낫는 거.”
“아니요. 성하 씨 꽤 심각해 보여요.”
“피만 이렇게 흘려서 그렇지, 원래 세라한테 먹힐 때도 이 정도는 흘렸어. 괜찮아.”
엘리샤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서 돌아가자고 했다.
성에는 왕국의 전속 의료진이 있다면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어차피 내 몸이 이러는 건 능력을 끌어다 쓴 부작용일 뿐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피로해지는 것 이상으로 페널티를 받을 만큼 끌어 쓴 내 탓이었다.
죽지 않도록 스스로 치유하는 몸이 버티질 못하고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심각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세라 때를 들먹이면서 나는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주인님이 아픈 이유는, 능력을 끌어다 쓴 것도 있지만 아마 성창을 깨웠던 때도 한몫하는 걸 거에요.]
“성창? 그러고 보니, 붉은 창은 어디에…”
가쁜 숨을 몰아가며 겨우 몸을 진정시키고 있는 와중에,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나서서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내 등에 손을 올리고서는 내 상태가 진정되도록 뭔가 마법을 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샤는 ‘미카엘’의 말을 듣더니 천천히 시야를 옮겨 내 팔목을 바라보았다.
땅을 짚은 왼손의 팔목에 아름다운 붉은 색을 뽐내는 팔찌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주인님은 원래 마법을 쓸 수 없는 무능력자에 가까운 몸이에요. 그러니 주인님의 의도로 마법을 쓸 때면 대부분 주인님이 발산하는 형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흡수되는 형태를 보이게 되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조금씩 멎고,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미카엘’은 입을 열어 자신의 작은 손을 움직여 뭔가를 설명했다.
엘리샤와 나는 ‘미카엘’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주인님의 마나로 마법을 쓸 때는 과한 페널티가 적용되는 거예요. 강제로 흡수하는 것이 기본적이니까. 저는 그나마 부드럽게 먹는 편이죠. 하지만 ‘아크’는 달라요. 애초에 태어난 이유도 다르죠.]
‘미카엘’은 내 팔목에 있는 붉은 팔찌로 시선을 옮겼다.
‘미카엘’이 내 마나를 가지고 마법을 발산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나를 빨아먹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다.
애초에 내가 가진 것 중에 마나를 빨아먹는 무기는 ‘미카엘’밖에 없었으니 알 턱도 없었지.
심해에서 눈을 뜬 ‘아크’가 갑자기 깨서 나를 도와줬던 이유도 그럼 내가 깨워서인 건가?
바다여서 눈을 뜬 게 아니라 내가 깨웠던 거라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나를 헌납한 건가.
[‘아크’는 구 인류를 몰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창이에요.]
‘미카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붉은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