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episode7. 수중도시 베르틱 (7)
흩날리는 물보라, 차오르는 파도가 점점 나를 수면으로 이끌고 있었다.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물고기 떼를 보내고, 해파리들을 보내며, 전에는 보지 못했던 해상 몬스터들을 마주했다.
“성하 씨…?”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을 마주했다.
수면에 일고 있는 거대한 물살을 탄 채로 고개를 들자 해변에서는 연보랏빛의 눈을 글썽이던 엘리샤가 있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진 않지만, 엘리샤가 여기 있으니 다들 근처에 있겠지.
정신을 차려보니 ‘아크’는 전처럼 붉은 창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행사하는 마법은 유지되는지 거대한 파도가 나를 해변으로 데려다주었다.
물속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내가 타고 있던 것은 하나의 물로 이루어진 고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다른 머메이드들이 튕겨 나가더라.
“어디, 갔었어요? 저, 정말 이대로 성하 씨를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단 말이에요.”
“사정이 있었어. 아래 수중도시 베르틱이라고 뭐가 있더라.”
“정말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다른 애들은 성하 씨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조사한다곤 했는데,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어요.”
엘리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에 물 없이 밟는 땅에 기묘한 기분에 잠긴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이 느껴졌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엘리샤는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내 너덜거리는 옷자락을 꽉 부여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책망하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이틀이요.”
“…이틀?”
“성하 씨가 물속에서 잡혀서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다니까요.”
물 아래로 휩쓸려간 나는 그 뒤로 잠 한 번 잔 적이 없는데, 이틀이 지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엘리샤의 왼손 약지에 있던 반지가 조금씩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걸까.
아니면, 베르틱이라는 공간 자체가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짧다고 생각한 시간 동안에도 애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구나.
그렇게 미안함을 담은 채,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있던 무기들을 내려놓은 채 엘리샤를 안아주었다.
사람의 체온이란 것은 이렇게 따뜻한 거였구나.
“어디도 가지 말아주세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었달까….”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고 생각하니 너무 괴로웠어요.”
“그렇게 걱정해줄 줄은 몰랐어.”
엘리샤는 내 몸을 꽉 끌어안고선 놔주지 않을 것처럼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대체 이럴 때는 뭐라고 반응해줘야 하는 거지. 이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는 머뭇거리며 엘리샤를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단어를 골랐다.
아무래도 전에 받았던 반지 덕에, 엘리샤가 이렇게 기다려준 것 같긴 한데 이렇게 진한 사이였나.
뭐, 몸도 섞고 했는데 보통 사이는 아니긴 하지.
[성하! 왔느냐!]
“어, 큐라다. 안녕?!”
[어딜 갔다 온 것이냐. 어딜 그렇게, 어딜.]
“자, 잠깐만, 나 옆구리 터졌어. 아파.”
[흥. 금방 낫지 않느냐. 날 버리고 간 벌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바다 위를 날던 검은 새에게서 뭔가가 떨어졌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하프 드래곤은 하늘에서 날아오는가 싶더니 내 이름을 외치며 반겼다.
뭔가 ‘미카엘’이 자신을 받아달라고 할 때 같아서,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반가운 건 둘째치고, 이틀 동안 사라진 내가 미웠는지 울먹이는 목소리와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내게 안겼다.
동시에 그녀의 매서운 발톱이 내 옆구리를 가격하는 바람에 옆구리가 뜯겨나갔다.
큐라는 일부러 그런 것이었는지 콧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켰다.
“성하 님!”
“성하!”
참, 얘네들도 뭐라고 나를 이렇게 반겨주는 건지.
전에 만났던 음침한 모험가들과는 다른 화목함이었다.
이렇게 훈훈한 건 정말 어느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내용인데, 내가 사람 복이 좋은 걸까.
그렇게 마법으로 만든 검은 새가 착지하더니, 세라와 리타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성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성하 덕분에 인근 마을은 머메이드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어요.”
“성하 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리타는 내 몸을 살피더니 내 주변에 놓인 ‘미카엘’과 ‘아크’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한 일은 유추할 수 없으니 이렇게 물어보는 거겠지.
그 와중에 세라는 마나 결핍 증세라도 보이는 건지, 애타는 목소리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바들거리는 작은 손을 보니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베르틱이라는 머메이드가 사는 수중도시가 있는데, 잠시 그곳에 다녀왔어.”
“이 무기는 예사 무기가 아닌 것 같은데… 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이건 성창 ‘아크’야. ‘미카엘’이랑 족보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친척뻘?”
나는 그곳에 있던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힘은 없어서 대충 말했다.
리타는 내 옆에 놓인 붉은 창을 보더니 긴장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크’도 성이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붙는데, ‘미카엘’처럼 신이 만든 작품인 걸까?
‘아크’에게 주인으로 인정을 받는 법도 모르거니와, 얘가 어떨 때 인간으로 변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사람으로 변하고, 말하는 애를 내가 제대로 알 턱이 없어서 더 이상 물어봐도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성하 씨… 그런데, 그 옷이랑 갑옷은 어떻게 된 거예요? 싸운 건가요?”
“그게….”
그렇게 내 이야기를 긴장하며 듣고 있던 리타 뒤로, 엘리샤가 내 몰골을 유심히 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내 몸을 두르던 가죽 갑옷이 사라지고, 옷은 누더기처럼 내 살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으며, 반지를 가리던 장갑마저 헤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좋은 꼴을 보고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몰골에, 엘리샤의 말을 들은 나머지 애들도 내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베르틱에서 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이야기했다.
나는 체감상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 그리 많이 말할 것도 없었다.
머메이드의 수장이 다른 용사와 결탁해 내 ‘미카엘’을 노리던 것, 그리고 그 수장과 용사를 죽이고 베르틱을 침몰시킨 것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고 나니 그녀들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정말, 성하한테는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네요.”
[시간이란 게 원래 각자 다르게 적용되는 거였나?]
상대성이론이었나. 잘 알지도 못하는 이론인 데다가, 판타지 세계에서 물리학자를 데리고 오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지.
나는 큐라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나도 잘 모른다는 것을 몸을 표현하고는 지친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는 것은 좋지만, 이런 모래사장에서 뒹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옷도 다 찢어져서 따가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빠르게 모래를 털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베르틱의 원수.”
“수중도시 베르틱은 멸망했다.”
“베르틱의 여왕 에리얼은 그의 손에 죽었다.”
쿵.
쿵.
물거품이 일고, 파도가 흉악하게 일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기를 바닥에 찍으며 다가왔다.
그들이 이루는 박자감은 공포감을 조성했다.
내가 끌려갔을 때와는 달리 엉성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집을 잃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모든 주민이 찾아 올라온 것 같았다.
그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우리들의 집을 부순 그를 원망하라.”
“우리들의 안식처를 깨트린 그를 책망하라.”
“우리들의 왕을 죽인 그를 처형하라.”
그들은 구호를 맞춘 건지, 대열을 맞추고 두 발로 걸어왔다.
인어의 몸일 때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나.
[저들의 몸은 왜 저러는 것이냐?]
“그러게요. 물거품이 사라지질 않네.”
큐라와 엘리샤의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다시 머메이드의 군단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말을 하기 시작한 그들의 몸에는 물거품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이것은 바다에서 올라오느라 묻은 게 아니라, 그들의 몸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었다.
머메이드의 몸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말을 하게 되면 얻게 되는 페널티인 걸까.
에리얼만이 그 페널티를 극복했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성하. 저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정말 성하의 말이 진짜인가 보군요.”
“뭐, 베르틱을 침몰시킨 건 내가 아니라 ‘미카엘’의 의견이었으니까.”
[앗. 칭찬 고마워요!]
“아니, 지금 상황 안 보여? 검으로 빨리 돌아와.”
[히잉. 네에~]
수천의 병사들을 보며 긴장한 리타가 자신의 갑옷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른 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리타의 말에 볼을 긁적이며 ‘미카엘’이 했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카엘’이 하늘로 높게 날아간 것도 자신이 쏠 힘의 목표지점을 설정한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말을 하고 있자니, ‘미카엘’은 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해맑게 웃으면서 드레스가 살랑이도록 몸을 흔들거렸다.
귀여운 모습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급박한 만큼 좋게 봐줄 수가 없어 그녀의 머리를 툭 때렸다.
“아니요. 성하 씨는 이제 쉬고 계세요.”
‘미카엘’이 다시 검으로 변신하려고 할 때, 엘리샤는 그것을 제지하더니 성큼성큼 머메이드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나와 ‘미카엘’은 멍하니 앞으로 지나가는 엘리샤를 바라보고 멍하니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후열에 서는 마법사인데 왜 앞으로 걸어가지?
그렇게 생각할 무렵 그녀의 영창 한 번에 모래사장이 들썩였다.
“저들 때문에 우리가 못 볼뻔했다는 거네요.”
쿵.
머메이드 병사들이 땅을 밟을 때보다 더욱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모래사장이 바다처럼 파도치듯이.
“에리가 가는데, 저도 가야겠네요. 성하 씨는 이틀 동안 고생했으니 조금 쉬세요.”
리타는 자신의 장갑을 꽉 당겨 끼고는 내 옆을 저벅저벅 지나갔다.
내 몰골이 이런 모양이라 걱정해주는 건가.
하지만 내 몸은 멀쩡하다. 나는 생채기가 나도 금방 나으며, 죽어도 금방 되살아난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몸에 쌓인 피로감은 죽고 나면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버려두고 싸우면, 나는 왜인지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괴로웠다.
“성하 님. 죄송해요. 한 입 먹게 해주세요.”
“응… 윽!”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배고프게 지내왔을 세라를 보니 조금 마음이 걸렸다.
세라는 내가 베르틱에 끌려갔다 온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 없었으니 뭘 제대로 먹은 것도 없었겠지.
나는 해진 옷 너머로 보이는 팔뚝을 그대로 내밀었다.
그러자 세라는 이런 순간에 밥 달라 했던 것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쩍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피부를 꿰뚫고 살을 파먹었다.
산 채로 먹히는 것은 역시 좋은 경험이 아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싸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라도 도움을 줘야 했다.
[성하. 네가 쓸모없다는 게 아니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라.]
과다출혈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던 와중, 큐라는 내 앞에 다가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내 표정에 다 드러나 있는 건가.
나는 성인이면서, 어른이 되지 못했구나. 표정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그런 모습을 얼버무리듯, 큐라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큐라가 갑자기 내 몸을 당겼다. 중심이 무너진 내 몸은 그대로 큐라에게로 쏠렸다.
[괜찮다.]
내 머리를 끌어안은 큐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세라와 함께 리타의 뒤를 따라 수천의 머메이드들을 향해 걸었다.
내가 괜히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애들이 귀찮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미어졌다.
[주인님, 말 그대로예요. 너무 자신을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미카엘’은 검으로 변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와서는 내게 말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내 볼을 어루만지는 ‘미카엘’의 모습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대체 네가 왜 슬픈 표정을 짓는 거냐.
[주인님이 아니면, 저를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신님뿐일 테니까요.]
나는 멍하니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