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episode7. 수중도시 베르틱 (5)
순식간에 퍼져나오는 바람.
“…….”
그렇게 조용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지금 당장 무방비인 용사를 쳐야 한다.
상황은 빠르게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발걸음을 옮겼다.
피를 머금은 옷이 잠시나마 무겁게 느껴졌지만, 창에 갈가리 찢긴 탓에 내 살이 보이긴 해도 몸 자체는 가벼웠다.
“대체, 어떻게… 용사님! 일어나보세요! 용사님!”
“…일어나질 않네.”
“어째서 일어나질 않으시는 거지?”
“시험은 강제로 종료되는 게 아닌 건가?”
에리얼은 빠르게 자신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황급하게 깨웠다.
지금 내가 성검을 쥐었으니 당연히 급박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고, 불길해 보이는 반응에 뒤에 있던 병사들이 수군거리며 불안함을 입 모아 말했다.
“일어나 있는데? 폐인이 된 채로 말이야.”
나는 그런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조롱하듯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미카엘’은 상대방이 그만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전한 악의를 가진 듯한 시험을 치를 뿐.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미카엘’을 마주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진전 없이 자신만의 지옥을 봐야 했다.
자기 맞춤형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지.
나는 손으로 가리켜 이름이 경석이라고 하는 용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초점은 흔들리고 있었고, 손과 발은 조금씩 경련하듯이 움직이더니 주인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일어나봐요! 제발!”
“뭐, 이렇게 된 이상 곱게 내보내 줄 것 같진 않으니까. 직접 나가야겠네.”
“누가 내보내 준다 했어? 경석 씨를 원래대로 돌려놔! 그 ‘미카엘’이라면 가능할 터!”
“난 네 허락을 받은 적 없어. 막으려면 막아보던가.”
나는 소리치는 에리얼을 뒤로하고 스트레칭을 하며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일부러 들리라고 한 말이었지만, 에리얼이 씩씩대며 몸을 일으켰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용사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건지 검을 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능력이 뭐였는지 몰랐던 내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싸우지 않아도 하나 처리한 셈이 되는 데다가 ‘미카엘’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저놈의 목을 치면 평생의 부를 약속하겠다. 그러니, 당장 저놈의 목을 내 앞으로 가져오라. 이것은 베르틱 모든 주민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는 베르틱의 적이 되었다.
수중도시 베르틱. 낭만 있어 보이는 이름에, 시선을 빼앗는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렇지만 마냥 탐욕스럽다고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용사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진 이가 죽지 않도록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할애해주는 그녀는 분명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아.”
나는 조용히 한숨을 입에 담으며 자세를 잡은 채 발을 내디뎠다.
검을 뒤로 숨기는 것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앞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정면은 똑바로 응시하는 것과 동시에 내 온몸의 힘을 손에 쏟아부었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감각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 세계에서 자라 그런 윤리관을 배웠기 때문일까.
“죽어!”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익숙해져 버린 걸까.
검과 창을 들고 달려오는 머메이드 병사들 뒤로 손을 곧게 뻗은 채 명령하는 에리얼이 눈에 비쳤다.
그리고 더 뒤에는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뭔가를 죽인다는 감각이 익숙해지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자 정말 돌아가야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끄억!”
“저건 대체 무슨 검….”
부드럽게 정면을 향해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공간을 가르는 검은 날이 상하지도 않은 채로 머메이드들을 베어갔다.
사람과는 형태가 먼 몬스터들을 죽일 때보다 죄책감이 심하게 든다.
하나, 둘씩 내 뒤로 차가운 시체들이 늘어갔다.
“젠장, 젠장! 일어나주세요. 용사님!”
전방에 있던 몇십의 병사들의 몸을 베어 가르고 정면을 응시하자, 에리얼은 다급하게 용사에게 다가가 그를 깨우려 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괜히 용사에게 휘말려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뭐, 죽이고 뺏으려고 했으니 상관없나.
“에리얼. 그걸 이리 주면 살려 줄게.”
“…어? 서, 성창을? 아, 안돼. 이게 무슨 물건인지는 알잖아.”
“응. 알아. 그러니까 내놔. 너도 내게서 뺏으려 했잖아.”
“그, 넌 이미 ‘미카엘’이 있잖아. 주인으로 인정도 받았잖아.”
“어차피 그 용사는 못 쓰잖아.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얌전히 내놔.”
나는 동강 낸 시체들을 짓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저앉은 에리얼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검을 겨누어 협박했다.
우두머리가 굴복하면 대부분 굴복하기 마련이니 이렇게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베스트였다.
더 이상 살생하지 않아도 되고. 아니, 이만큼 죽여놓고 살생의 수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나.
점점 내가 무감각해지는 살인귀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안돼! 이건 안된다고!”
“…결렬이네.”
하지만 에리얼은 곱게 주려는 생각은 없는지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창을 빠르게 내밀었다.
콰직하고 창이 나의 시선 아래를 꿰뚫었다.
목이 꿰뚫렸다는 걸 깨달은 건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입에 피가 차오르고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꿀럭거리는 소리가 목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온다.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숨을 쉬기 위해 폐가 헐떡이는 소리였다.
시야는 붉어지고, 숨을 쉴 수 없다는 고통과 함께 몸에 힘이 빠져갔다.
[주인님!]
창을 쳐낼 힘도 없어 그대로 주저앉으려 하는 순간, ‘미카엘’이 내 손에서 흘러내렸다.
동시에 사람으로 변한 ‘미카엘’은 빠른 손놀림으로 목에 박힌 ‘아크’를 쳐냈다.
목의 반절이 찢겨나가는 바람에 시야가 덜렁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몸에 창이 빠져나갔다는 사실만으로 다행이었다.
“어, 어째서. ‘미카엘’은 사람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거야?”
[흥. 주인님은 원래부터 평화로운 세계에서 오신 분인 데다가, 용사의 힘 같은 강력한 건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역시 네년이 쉽게 이기는구나.]
“자, 잠깐만. 미, ‘미카엘’님. 이야기를.”
[뭐, 됐어. 이렇게 나를 어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미카엘’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엘’의 등장에 에리얼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과다출혈로 천천히 시력과 청력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단편적인 대화는 들렸다.
동굴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선명하게 들을 수는 있었다.
퍽.
영화처럼 어느 타격음을 슬레이트 삼아 내 필름도 동시에 끊겼다.
*
“‘미카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손으로 오른쪽 목을 만졌다.
잘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미카엘’을 찾았다.
[일어나셨어요?]
그렇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미카엘’을 중심으로 엄청난 참상이 일어나 있었다.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내가 한 것은 수십의 병사를 베어 넘긴 것이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수백의 병사들이 무언가에 의해 터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목을 잃은 신체였다.
에리얼은 마지막까지 성창과 자신의 남편을 손에 꽉 쥔 채로 머리가 터진 것이었다.
그렇게 피로 얼룩진 내 시야 속에서도, ‘미카엘’만은 피 한 방을 묻지 않은 채 고고하게 서 있었다.
“응.”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서 시체와 피로 물든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네가 한 거야? 라는 단순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게 아닌 이상, 그녀 말고는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저 잘했나요?]
“…응.”
‘미카엘’은 고양이처럼 몸을 비벼대며 칭찬을 요구했다.
만약 고양이었다면 그릉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그런 ‘미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가 터진 에리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져가야겠지.”
그렇게 몇 분을 보고 있었을까.
역시, 성창이라고 불린 이상 놓고 가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여기 에리얼도, 경석이라 불리던 용사도 죽어버렸으니 막을 사람도 없고.
“…!”
[왜 그러세요?]
“아니, 엄청 단단하게 쥐고 있어서.”
에리얼의 손에서 성창을 떼어내려고 허리를 숙였다.
물건을 뺏듯이 손을 당겼지만, 죽은 이후에도 그녀의 완력 탓에 성창을 들지 못했다.
사후경직인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하나의 집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그녀의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가며 성창을 감싸 쥔 손을 풀었다.
[흣. 저, 저도 한 번 꺾어주시겠어요?]
“뭐, 손가락을?”
그 와중에 ‘미카엘’은 뒤에서 그걸 빤히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볼에 홍조를 띄운 것을 보니 손을 꺾는 것도 그녀의 수비 범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공격 범위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SM 플레이에도 손 꺾는 건 없다고.
손가락 반대로 꺾으면 되게 아플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네. 하, 하나만 해주세요.]
“뭐 이런 이상한 성검이 다 있어.”
[끅. 끄으윽. 흑. 흐읏, 아흣?]
어린아이 같은 작은 손을 꽉 잡으니 정말 죄책감이 들었다.
뭔가 당한 직후라면 쉽게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내 복수심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듯 쉽사리 꺾지 못했다.
그런데 ‘미카엘’이 계속해서 재촉하듯이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며 기대하듯 내 얼굴을 보니 안 하겠다고 하기도 좀 그랬다.
결국, 나는 투정을 부리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그녀의 손을 꺾었다.
‘미카엘’은 손이 꺾이는 순간, 격통에 휘말리는 건지 눈을 위로 치켜뜨며 꺾인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픔에 신음하듯 괴로워하는 목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시체와 피 웅덩이 위를 뒹구는 데도 그녀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검 자체의 특성이 그녀의 몸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격통에 의한 신음은 어느샌가 흥분에 의한 신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어? 잠깐만, 지리는 거냐?”
[지, 지리지, 않, 아요?! 아읏.]
‘미카엘’은 뭔가 절정에 다다르는 건지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몸은 나랑 비슷한 성질인 건지 반대로 꺾였던 손가락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그 순간의 통증은 흥분으로 바뀌었는지 계속해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가랑이에서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시오후키도 하는 거냐…. 됐고, 가자.”
[자, 잠깐만… 잠깐만, 요 주인님.]
“지금 시간 없어. 저년이 뭘 했는지 몰라서 빨리 돌아가야 해.”
[가혹, 해요 하읏?!]
조수를 내뿜는 ‘미카엘’을 보니 김이 다 빠져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몇 분 지켜보는데 근처에서 발걸음과 말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였지.
상황은 계속해서 나를 쉬지 못하게 하려는 듯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갔다.
나는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계속해서 절정 하는 ‘미카엘’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세다고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에서 절정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나는 ‘미카엘’의 머리채를 잡은 채 질질 끌 듯이 복도를 걸었다.
“검으로 돌아와.”
[넷.]
‘미카엘’을 사람의 몸으로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 결국 다시 검으로 되돌려야 했다.
그녀는 풀린 눈으로 내게 질질 끌려다니더니 내 명령에 바로 따라 검으로 변했다.
내가 잡아당기던 머리카락은 이내 칼자루가 되어 손에 감기듯 들려왔다.
왼손에는 성창 ‘아크’, 오른손에는 마조 성검 ‘미카엘’이 있었다.
뭔가 양손에 성창과 성검을 동시에 쥐고 있으니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