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episode7. 수중도시 베르틱 (1)
“성하 씨? 왜 그러세요?”
엘리샤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정말로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저렇게 마왕을 잡은 기억도 없고요.”
“그, 그런 거야? 다행이다. 설마 저렇게 날조 당한 건 아닐까 하고….”
“설마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기쁘네요.”
엘리샤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엘리샤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엘리샤는 뻘뻘 거리며 눈을 맞추더니 내게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아까 한규상은 마왕을 잡은 기억은 있었지만, 그동안의 여정에 그가 함께 했던 동료들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환된 기억도 잊은 채, 자신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이곳을 선택하면 저쪽 세계의 기억은 지워버리는 거냐.
나는 그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엘리샤는 기쁜 듯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아니야. 기억을 잃잖아? 이래서는 마왕을 잡는다고 해도….”
이렇게 되면 아무도 죽지 않도록 싸우고 나서, 소원을 빌 때 기억을 잃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빌어야 하는 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내 기억도 지워버릴 것 아닌가.
욕심을 부린다면 기억을 잃지 않은 채, 다음 마왕을 처치해 다른 소원을 비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용사들의 생존권을 대신 뺏어가는 그림이 되겠지만.
“성하 씨. 괜찮아요?”
“아니, 잠시만….”
[아니, 그럴 때가 아니다. 이동해야 한다.]
엘리샤의 물음에 나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큐라는 내 말을 막은 채 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하늘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쿠구구구.
마계의 주민도, 왕도 없는 곳에서 마계가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흩어지려 했다.
“세라!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해!”
리타는 다급한 목소리로 세라를 찾았다.
세라는 리타의 목소리에 놀란 듯하면서도 침착하게 손을 벌렸다.
45번째 마계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45번째 마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설령 인간계에 남아있더라도 돌아갈 터전을 잃은 것이다.
“열었어요!”
세계가 붕괴한다.
그 문장 그대로 하나의 세계가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주인을 잃은 세계가 울부짖는 것처럼 흉악한 소리를 내며 세계는 무너져갔다.
그렇게, 내 시야도 검게 물들었다.
*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야를 확보했다.
돌아온 시야를 부여잡고 주변 상황을 먼저 살피는 데 힘썼다.
리타, 세라, 엘리샤, 큐라, ‘미카엘’ 전부 있다.
아무것도 놓친 게 없어서 다행이다.
괜히 그런 거 구경하다가 죽을 뻔했던 건가.
자동으로 내보내주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런 것에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세계가 무너지는 곳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잘 왔네요. 다행이에요.”
[하지만 아까 그놈의 모습은….]
엘리샤도 조금 긴장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큐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까 있던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나도 큐라의 말에 동감이다.
한규상이라는 놈은 생존권을 얻고, 카밀라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기억을 지불했다.
자신이 어느 세계에서 태어났고, 왔는지를 모두 잊어버린 채 자신은 원래 이곳의 주민이라고 믿고 있었다.
막타를 치는 것에 계속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됐다.
잊고 나면 속은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 전에 알게 된다면 충분히 피해야 할 사안이었다.
“나는 기억을 잃는 것이 싫어.”
아무리 살고 싶다고 해도, 기억을 대가로 주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원하는 게 있다면 그만큼 마왕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
솔직히 기억을 잃으면 되찾기 전까진 내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기억을 잃을 수는 없었다.
“저도, 그런 건 싫어요.”
엘리샤도 두려운 것이 있는 건지,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얹은 손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뭐,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란 건 당연히 있는 법이니까.
[난 상관없다. 난 괴로운 과거뿐이니까.]
큐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내 소매를 잡았다.
[그래도, 넌 아니다. 널 잊고 싶진 않다.]
그리고서 슬픈 눈으로, 애절한 눈빛을 하고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렇게 올려다보면 반칙이지.
“알았어. 꼭 너희를 기억하게 해달라고 할게.”
나는 눈을 꼭 감으며 큐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원래 세계를 돌아가더라도 이 여정을 잊을 수는 없다.
한규상의 모습을 보고 나서 그런가, 파티 분위기도 많이 침울해져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떼써서 마왕을 잡았더라면 주인님이 저렇게 됐겠네요.]
‘미카엘’은 자신이 아까 시간을 정체시켜놓고 이야기했던 것에 죄책감을 들었는지, 인간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사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미카엘’의 양 볼을 꼬집으며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아바바바. 아파여어어.]
[흥. 그새 또 수작질을 부렸던 게냐?]
[어린 녀석이 어른의 심중을 헤아릴 수는 없지.]
엄살을 부리던 ‘미카엘’은 큐라의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눈을 빛냈다.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던 ‘미카엘’은 큐라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한 채 고고하게 말했다.
근데 몸집만 보면 가장 어린놈들인데 어째 연장자 1, 2위를 다투고 있다.
이게 판타지 세상의 묘미인 걸까.
“세라. 피곤해?”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마계를 찾는 것부터 마계와 인계를 이동할 때마다 세라에게 부탁했더니 세라가 걱정이 됐다.
큐라와 ‘미카엘’이 으르릉대는 것은 차차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세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파티 구성원이 너무 한 번에 불어나서 그런가, 신경 쓸 사람도 많고 지친다.
오히려 리타랑 둘이 있을 때가 더 느긋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머메이드다!”
“인어들이 파도를 몰고 나타났다!”
“역시 저놈들의 짓이구나!”
마계에 들어가기 전에 머메이드 어쩌고 한 것이 들렸는데, 그게 정말 오늘 나타나는 거였나.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 사태를 살피기 위해 얼어붙은 건물들 쪽으로 다가가 해변을 바라보았다.
겉 피부에 푸른 비늘을 두른 사람들이 보였다.
손과 발 마디 사이에는 오리발처럼 막이 있었고, 그들은 삼지창을 든 채로 마을로 다가왔다.
“오… 심상치 않은데.”
저놈들의 숫자를 세고 있자니, 쟤네는 아예 군대를 데리고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파도가 철썩하고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머메이드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근데 시발 왜 인어인데 다리가 있어요? 이거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
하반신은 물고기여야 어떻게 이야기가 돌아가는 거 아닌가.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살다니, 인간들도 참 지독한 생물들이다.
“‘미카엘’.”
‘미카엘’의 이름을 부르자, 내 손에서 무기로 쥐어져 있던 아름다운 검은 우웅 하고 진동으로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머메이드 군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야기를 좀 해서 돌려보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저기, 죄송한데. 왜 갑자기 이곳으로 몰려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젠 대놓고 말까지 씹네.
“저기요? 물어볼 게 있다니까요?”
그리고 그 머메이드 부대는 삼지창을 꼭 쥔 채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을 열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은 채로 빤히 바라보았다.
좀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왜 오는지만 말해주면 내가 이해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멍하니 몇 초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모든 머메이드의 군대가 나 하나 때문에 전진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관심을 끌 생각은 없었는데 큰일만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야. 수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갸웃거리던 머메이드 족들은 갑자기 삼지창을 팔 쪽에 끼우더니 손으로 뭔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걸 본 다른 머메이드는 뭔갈 알아들었는지 똑같이 손을 움직여 뭔가 대답하는 것 같았다.
얘네들 수화도 할 줄 알아?
그보다, 목소리가 없는 거라면 머메이드 족은 물속에서만 말할 수 있는 걸까.
“근데 난 수화 못 하는데.”
그들은 뭔가 내게 말하고 싶은 건지 내게 손짓을 해가며 뭔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수화를 배운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가끔 종교 행사 같은 데서는 노래를 수화로 한다고 하던데, 나는 종교도 없어서 그런 기본적인 지식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다른 머메이드에게 시선을 몇 번이고 돌리자, 그들은 어쩌지란 반응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머메이드를 불러 삼지창을 치켜세웠다.
다른 머메이드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이 내게 손짓을 하며 진정시켰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격하는 줄 알고 검을 치켜들 뻔했는데 그래도 완전히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어. 어어? 어어어?!”
“성하!”
열댓 명이 내리친 삼지창에 거대한 빛이 일었다.
마법인가? 하고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바다에 있던 파도들이 썰물이 진 것처럼 쏙 빠져나갔다.
왜 갑자기 해수면이 낮아졌지. 싶어 고개를 바다로 돌렸다.
철썩. 처음 치는 파도는 발목을 덮쳤다.
철썩. 두 번 치는 파도는 무릎을 덮쳤다.
칠 때마다 조금씩 올라오는 수위에 당혹스러워하는 순간, 지면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깔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 타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뒤에서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구해주겠다! 불을 머금어서….]
“성하 씨! 어서 이쪽으로 달려요!”
“성하 님! 지금 매를 보낼게요?!”
가만히 있으랬는데, 내가 하도 걱정이 되었는지 내 모습 확인도 해주고 정겨운 파티다.
제길,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거 아닐까.
이 파도는 딱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인위적인 파도였다.
큐라는 입에 불을 머금고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샤는 지금 당장에 마땅히 쓸 마법은 없는지 소리만 치고 있었고, 세라는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짜내 빠른 매를 만들어 날려줬다.
정말 고마운 애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은 이 순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제길.”
내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내 눈앞에는 장벽이 펼쳐지듯이 물이 모든 것을 막았다.
큐라가 입으로 뿜어낸 불도 바닷물을 몇 번 지지더니 이내 화력이 약해졌고, 세라가 보낸 매는 파도의 힘을 이기지 못해 형체까지 일그러졌다.
파도를 탈 때, 이런 광경은 자주 볼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많은 양의 바닷물은 가라앉아 바다로 빠지면서 나의 무게중심을 잃게 했다.
“!”
“이런 아가미가 없는 인간이라 그런가, 벌써 괴로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구나.”
바다에서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치켜뜨고 물속을 훑어보았다.
솔직히 민물에서는 맨눈을 떠도 그리 아프진 않았는데, 바닷물에서 눈을 뜨니까 더럽게 아프다.
그렇게 눈물을 바닷물에 녹이며 주변을 바라보자 아까까지 내 옆을 메우던 머메이드 족이 일제히 나와 같이 바다에 쓸려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숨을 꼭 참고 머메이드 족 거의 전부 다 나를 따라왔는지 확인해야 한다.
인간 하나만 데려가면 철수하는 거였나?
물속에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찰나 머메이드 족의 하반신이 물고기처럼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반칙이지. ON OFF 기능이라도 있는 거냐?
“하지만 숨을 쉴 수 있단다. 네게는 이미 마법을 걸어 뒀으니 그렇게 숨을 참지 않아도 된단다.”
물속에서는 유창해지는 놈들의 목소리에 어이없어서 웃음을 토하던 그때, 내 옆을 지키던 머메이드는 조심스레 내게 숨을 쉴 수 있다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근데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다고? 아무리 죽지 않는다지만 익사는 괴로운데.
전에 경험해본 바로는 솔직히 너무 괴롭다. 더는 겪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다.
물속에서 숨을 쉬어본 적이 없으니 쉽사리 숨을 쉬라고 해도 될 리가 없지.
‘미카엘’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쥐고서 천천히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뗐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물이 들어올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르게 공기만이 입에 오갔다.
“어?”
“그래, 적응이 빠른 아이구나. 벌써 말도 하게 될 줄이야.”
“아니, 이건 대체….”
너무 놀란 나머지 새된 목소리를 입에 담자, 머메이드는 삼지창을 앞으로 휘두르며 나를 칭찬했다.
그가 내지른 삼지창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듯 수많은 기포들이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다.
근데 내 파티는 지상에 있는데 어떡하지.
나 없는 동안에 내가 없어서 좀 더 편하게 다녔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걱정을 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바닷속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