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episode5. 미카엘 (13)
엘리샤는 능청스럽게 내 손을 잡고 반지를 끼우려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내빼고서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왼손 약지면 결혼반지 끼우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성하 씨에게 도움이 될만한 반지이고, 성하 씨는 이걸 껴야 하니까요.“
”무슨 능력인데? 들어나 보자.“
”위치 추적 능력이요.“
”아니 수상쩍은 냄새만 나는데.“
”성하 씨나 제가 어딘가 큰일이 났을 때 서로에게 알림이 가도록 설정해뒀어요.“
엘리샤는 아쉽다는 듯이 눈을 힐끔 돌리더니, 다시 내 손을 꽉 잡고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끼는 곳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게 수상쩍은 것 천지였다.
거의 남편 불륜 현장 급습하기 위해 들여놓은 반지 같달까.
내가 계속 경계하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꼭 필요한 거라고 어필했다.
”마계 들어갔을 때, 서로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건가요? 우리에게 연락 수단은 이런 것밖에 없어요.“
”알았어…. 끼면 되잖아.“
계속 설득하는 엘리샤의 모습에 지쳐간다.
솔직히 능력 자체를 들어보면 전투할 때는 또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니, 모험할 때만 잠깐 착용하면 되겠지.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반지를 끼우고 장갑을 착용하면 어찌어찌 되지 않을까.
참, 별별 물건들이 다 있네.
”성하 씨가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각자 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주인님은 왜 여자한테 약한 거예요…?]
”아니 여자가 아니라, 그냥 얘네가 센 거야.“
[뭐. 우리 주인님은 힘보단 정신력이니까요! 악! 아파요오오….]
엘리샤를 두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듯 다시 장갑을 꼈다.
설마 ‘미카엘’이 보여줬던 화형식이 이것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
그보다 반지를 처음 꼈더니 뭔가 적응이 안 된다. 불편하달까.
장갑이 벗겨지지 않게 장갑을 벨트로 고정하는데 ‘미카엘’이 옆에서 기웃거렸다.
하얀 로브가 마음에 드는지 이리저리 망토처럼 잡고 설치길래 머리를 한 방 때려주었다.
안 그래도 화형식이 떠올라서 속이 안 좋아지는 시점에 ‘미카엘’이 얼굴을 들이미니까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달까.
[성하.]
구우웅. 하고 큐라의 등 위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하고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큐라의 부름이었다.
”왜?“
[저기, 뭔가가 있다만.]
출발 한지 얼마나 지났더라.
몸을 일으켜 큐라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엄청난 광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큐라의 몸집과 날개 탓에 주변 환경이 잘 안 보였는데, 조금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서니 멋진 경치가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벌써 바다가 눈에 보였다.
[저기가 우리가 도착할 곳인데 불타고 있다.]
”불?“
그리고 그 해안가에 인접한 건물들은 불에 삼켜지고 있었다.
뭔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한 두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거 마차 타고 출발했으면 며칠씩 걸렸을 테니, 큐라가 아니었으면 전소된 마을을 맞이할 뻔했다.
”내리자.“
[어디로?]
”바닷가. 물 싫어하진 않지?“
[물 좋아한다. 그럼 내려가도록 하지.]
큐라는 입에서 푸르륵. 하는 소릴 내더니 빠르게 활공했다.
순간적으로 붕 뜨는 감각에 놀란 나는 그녀의 목을 꽉 잡고 몸을 떨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으억.“
[내리게 해주마.]
철퍽 하고 파도를 일으킬 것 같은 충격으로 바닷가에 착지했다.
큐라는 우리를 태워줬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모래사장에 내려줬다.
아무리 드래곤을 타고 직선으로 날아갔다지만, 하루 반나절 만에 왕도에서 바다로 올 수 있다니 기분이 색달랐다.
뭐 이래저래 준비과정이 많은 비행기보다 빠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붕 뜨는 감각에 놀랐네요.“
리타는 그런 말을 하고서, 자신의 장비들이 담긴 나무 상자를 등에 이고 메이스를 잡았다.
”후우. 놀랐잖아요. 성하 씨, 이런 건 우리한테도 좀 같이 말해줘요.“
엘리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지팡이와 가방을 챙겼다.
옆에 있는 세라는 말없이 리타가 쓰던 가방을 등에 메고 총총 뛰었다.
[이제 됐느냐?]
찰박거리는 파도 위에 꾸득거리는 소리를 내던 큐라는 이내 드래곤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라와 비슷한 작은 체형을 자랑하듯, 또 나체로 변신해서 나한테 걸어왔다.
그녀의 엉덩이 균열 위에 있는 꼬리가 왠지 만져보고 싶었다.
”자 여기 큐라 옷.“
[의복이 불편하긴 하다만….]
”그거 안 입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 곤란하니까 입어.“
[알았다. 읏?! 뭐냐! 뭐냐!]
리타에게서 건네받은 큐라의 옷을 건넸다.
요염하게 걸어오던 큐라는 내게서 옷을 받아들더니 귀찮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큐라가 옷을 안 입으면 공연음란죄로 내가 잡혀가잖아.
큐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옷을 받아서 입으려는 찰나, 그녀의 뒤로 가서 꼬리를 살짝 만졌다.
드래곤일 때랑은 다르게 작아진 꼬리는 기분이 신기했다. 비늘도 작아졌고, 만지기 편했달까.
그렇게 그녀의 꼬리와 등의 연결 부분을 만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큐라의 약점이었지.
”미안, 역린이 여기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네.“
[나, 나랑 하고 싶은 거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야?“
[그럼 왜 거길 만지느냐. 약점이기도 하지만 성감대란 말이다. 당연히 칼로 찍으면 흥분될 리는 없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큐라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설마 드래곤끼리는 이런 곳을 만지면서 상대에게 구애하는 건가.
이런 생태계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걸 이렇게 알게 되네.
큐라는 옷을 입다 말고 내게 달려들어선 항의하듯이 주먹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퍽, 퍽, 하고 가볍게 치는 것 같은데 왜 아프지.
”미안해. 큐라, 원피스가 아직 목에 걸려있어. 제대로 내려야지.“
[흥.]
하얀색 배경에 빨간 강조 색이 예쁜 원피스를 제대로 내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안쪽이 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속옷 하나 안 입고 있는데 이거 괜찮은 걸까.
뭐 어떤 미친놈이 이런 꼬맹이 같아 보이는 애 나체 한 번 보겠다고 목숨을 걸까 싶지만.
”자. 여기 네 로브.“
[성하는 참 짓궂구나. 어떻게 드래곤의 역린을 쉽게 만질 생각을 하는 건지 원.]
”미안해.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냥 꼬리를 만지고 싶었달까.]
[다른 드래곤에겐 성하를 주면 안 되겠구나. 언제 자신의 것이라고 가져갈지도 몰라.]
“아니, 그럴 일 없으니까 굳이 그런 다짐 안 해도 돼.”
큐라에게 붉은 로브를 건네자, 큐라는 콧방귀를 뀌더니 무심한 듯 가져갔다.
그러고는 기분은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원피스 위에 붉은 로브를 둘렀다.
그러고 보니, 다들 같은 로브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디자인들이 다 다르구나.
색깔만 다른 줄 알았는데.
멍하니 다른 애들의 로브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큐라가 내 손을 꽉 잡으면서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귀여운 듯 요염한 미소를 짓는 큐라의 볼을 만져주었다.
애교라도 부리는 작은 동물 같았다. 실상은 큰 동물이지만.
“성하 님! 왜 큐라만 해줘요? 저도 해줘요!”
소동물은 여기도 있었네.
큐라의 볼을 찰떡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조물거리고 있자, 세라가 샘이 났는지 총총 걸어왔다.
어쩔 수 없이 세라의 볼도 몇 번 만져주고 나서야 본분을 깨달았다.
“아 맞다. 이럴 때가 아니지.”
[주인님?]
정신을 차린 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리샤가 큐라와 세라를 떼어준 덕분에 손이 자유가 된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해안에 인접한 건물들을 올려다 보았다.
옆에서는 가만히 하얀 로브를 두르고 있던 ‘미카엘’이 말을 걸어왔다.
“저 불 끌 수 있어?”
다른 애들을 뒤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물에 관련된 마법을 쓸 수 있는 애는 엘리샤 정도뿐일까.
아니면 큐라나 리타도 쓸 수 있는 걸까.
세라나 ‘미카엘’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라도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가능해요.”
엘리샤는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조심스레 들었다.
“저도 미약하지만 가능해요.”
[뭘 그런 걸 일일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아니냐?]
리타도 엘리샤를 따라 대답한 순간, 큐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세게 굴렀다.
겉으로 보이는 체형과는 달리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지, 그녀가 모래사방에 발을 굴렀는데도 그녀를 기점으로 모래가 파도치는 것 같았다.
[세상의 이치는 내 부름에 응하라.]
쿠구구구. 하고 공기가 떨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전에 그녀가 자신의 둥지에서 내질렀던 그 마법의 첫 구절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때 쓰는 주문은 일종의 자기 암시라고 하던데, 저건 큐라의 전용 주문인 듯했다.
[대기는 내 명을 받들라. 파도는 내 말에 귀 기울여라.]
“저것이, 드래곤의 마법인가요.”
리타는 감탄하듯이 도와준다 했던 것도 잊은 채 큐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샤는 큐라를 몇 번 보고는 빠르게 세라를 챙겼다.
나는 ‘미카엘’을 챙기려 했는데, 뭐 겉모습만 저렇게 조그만 것뿐이니 알아서 잘 사리겠지. 싶어 내버려 두기로 했다.
[블리자드.]
“잠깐, 블리자드?”
큐라의 읊음에 엘리샤가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마법에 젬병인 나라도, 게임에서 몇 번 본 게 있는지라 나도 내 귀를 의심했다.
블리자드는 얼음 마법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큐라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마법진이 회전하더니, 이내 엄청난 빛을 뿜으며 그녀의 부름에 답하듯 엄청난 소리가 일었다.
“이런, 거대한 마법은….”
‘인페르노’라는 마법을 쓸 때도 봤었지만, 큐라는 광역기만 쓸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불타고 있던 건물들을 모두 얼리고, 지금이 겨울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추위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큐라에게도 시선을 줬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불타고 있으면 물로 꺼야지, 왜 얼려서 불을 끄는 거냐고.
[훗. 역시 이 몸인가. 불을 모두 꺼 버렸군.]
“다 얼리면 어떡해! 사람까지 얼려버렸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흥. 불길이 저렇게 치솟는데 안쪽에 남아있다면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자랑스럽게 뿌듯하다는 듯 씩 웃으며 한 건 해결했다는 표정을 짓는 큐라를 붙잡고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다.
이러다가 인간들 다 얼리고 다닌다는 악명이 퍼지기라도 하면 어디 가서 활동하기도 힘들어진다.
이거 어떡할 거야. 하면서 그녀의 로브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큐라는 다른 인간들에겐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뭐 대수롭지 않은 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아무리 네가 드래곤에 가깝다지만 너무하다 야….”
[인간 같은 건 솔직히 알 바 아니다.]
큐라는 얼어붙은 마을을 바라보며,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려버린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인간에게 당했던 것들이 생각난 듯했다.
500년이나 살았다 했으니 뭐, 그럴 법도 하겠지.
[흥. 뭐 인간에게 당한 게 대수라고, 그런 거에 연연하는 자일수록 내 시련에는 버틸 수 없게 된다.]
[…나보다 오래 살았다고 어른인 척하는 건가?]
[아니, 정신적으로 많이 어리다는 뜻이다. 혼자 살면 그렇게 되지.]
[그런 건 성하가 있어서 어찌 되든 괜찮아질 거다.]
큐라를 보고 있던 ‘미카엘’이 큐라를 비웃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큐라는 이를 갈면서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지만 자신을 비웃은 ‘미카엘’에 대해 가만히 둘 수 없다는 뜻이겠지.
반짝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자, ‘미카엘’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 이리 사연 있어 보이는 놈들이 많은 거야.
“자, 자. 이미 저질렀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냥 원인이나 찾아보러 가자.”
[으악! 저 녀석이 저지른 일에 내가 뭐라 한 것뿐인데 왜 절 때리는 거예요?]
[성하. 괜찮은 거냐?]
“몰라. 안 괜찮을 것 같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제길, 저건 어떡해야 하냐. 너무 생각 없이 얼려버린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겠지?
나는 앞에 있는 커다란 얼음을 보고 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녀들의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라고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들이 자꾸 나한테 의지해주는 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 파티에서 제일 무능한 놈이라고.
입지나 돈, 명예와 함께 힘과 지식을 두루 갖춘 리타나, 마법에 대한 지식과 함께 왕족이라 하는 혈통을 갖춘 엘리샤, 마나를 먹는 대로 사용하는 마법의 힘이 강대해지는 세라, 강대한 마법과 드래곤이라고 하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는 큐라처럼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나였다.
죽지 못해 살아있는 수준의 능력일 뿐인 내가 그런 기대를 받아봤자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 채 주변을 둘러보고,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