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episode5. 미카엘 (11)
*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니, 옆에는 엘리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한 번만 하고 그대로 잤던 것 같은데, 얜 자기 방으로 안 돌아갔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중간에 깨서 한판 뜬 것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으음… 성하 씨, 일어났어요?”
“어어.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좋잖아요? 누군가가 옆에서 잔다는 게.”
아무리 봐도 그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은데.
한숨을 내쉰 후,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피부에 차갑게 다가왔다.
“우와. 춥다.”
“아침이야. 의뢰도 있어서 빨리 나가야지.”
“큐라 씨도 있으니까 천천히 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일찍 가야 어느 정도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엘리샤는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자신의 몸에 끌어와 덮었다.
뭐 침대에서 일어난 김에 씻을까.
“침대가 조금 더러워지긴 했네요. 이불은 안 개도 돼요. 부하들 시켜서 깨끗하게 해 놓을 테니까요.”
“무슨 호텔 서비스냐…?”
권력이란 게 확실히 좋은 건지, 엘리샤는 당연한 권리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왕이나 귀족 정도가 되면 이 정도는 당연시하게 여기는 건가?
권력의 맛은 한 번 맛보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하던데, 정말 저렇게까지 편리하면 누구나 그럴 것 같았다.
이불을 더럽히면 내 빨랫감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부하를 부리면 된다. 라… 원래 세계에서는 호텔 서비스에서나 볼 법한 유료 서비스다.
“뭐 어때요. 이쪽이 편하잖아요?”
“…난 먼저 씻을 게.”
“네. 다녀오세요.”
그녀는 씩 웃으며 덮고 있는 이불을 톡톡 쳤다.
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뭔지.
*
“뭐야. 벌써 다 준비했어?”
씻고 나니 1층 거실에는 큐라가 새로운 옷을 받았는지 이리저리 자신의 옷을 둘러보고 있었다.
세라도 큐라처럼 새로운 옷을 입고서 총총 뛰어다녔다.
언제든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게 큐라는 펄럭이는 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세라는 몸에 달라붙는 타이츠와 몸의 윤곽을 가리는 두꺼운 반팔 반바지를 입었다.
생활하기는 편해 보이네.
“세라는 검은 옷이 마음에 들어?”
“네! 전 검은색이 가장 좋아요.”
큐라는 하얀 옷에 붉은 선으로 강조된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반면, 세라는 전과 비슷한 검은 옷을 입은 채 사뿐사뿐 걸었다.
둘 다 옷에 후드도 있다 보니, 이리저리 걸어 다닐 때마다 후드가 들썩였다.
[성하는 잠을 제대로 못 잤나?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럴 일이 있었지.”
“제대로 못 주무셨으면 제가 재워드릴게요!”
“아니 일단 짐 챙겨. 나가야지?”
그렇게 자신들의 새로운 옷을 만끽하는 큐라와 세라를 앞에 두고 미소짓고 있을 때, 큐라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눈에 다크서클이라도 생겼는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건지, 퀭하게 뜨고 있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한 번 둘러대려 했는데 세라는 팟. 하고 다가와서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떼고는 무기와 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님은 방치플레이를 선호하는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야 의식이 있는 검을 이렇게 덩그러니 놓고 다른 방에서 주무시잖아요. 전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요?]
“너도 자 그럼. 굳이 깨어있을 필욘 없는데.”
[너무해요.]
“됐고 검으로 돌아와.”
[너무해!]
방에 들어가니 ‘미카엘’이 금빛 눈을 나한테 고정하고는, 뚱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건지 팔짱을 낀 채로 리듬을 타듯이 바닥을 발로 쳤다.
내가 무심하게 가방을 먼저 챙기자,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혼자 두는 게 뭐가 그리 서러운지 별 이야기를 다 꺼내는데, 어차피 잘 시간이니까 혼자 둔 거였다.
게다가 집 안은 안전해서 굳이 머리맡에 무기를 쟁여둘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게 귀찮아져서 손을 내밀어 ‘미카엘’의 검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엑.]하고, 목이 꺾이듯 당겨진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검의 형태로 바뀌었다.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에는 어느새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꼴에 성검이라고 그립감 하나는 죽여줬다.
“에휴. 이런 것도 성검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내 가방을 챙겼다.
오래 이동할 것 같은데, 문제는 이동할 동안 먹을 건식이 없었다.
전에 육포 하나 준비했던 것 같은데 다 어디갔지.
“리타 있어?”
“성하? 뭔 일 있나요?”
“전에 사뒀던 육포 한 묶음 있지 않았어?”
“거기 없어요? 먹은 기억이 없는데.”
방 밖에 고개를 내밀어 리타를 찾았다.
밖에서 자신의 새로운 장비를 확인하던 그녀는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려 눈을 깜빡였다.
리타는 큐라랑 세라 옷 사주면서 새로 산 거라도 있는 건지, 소중하게 손질하던 장비를 두고 나한테 다가왔다.
그녀의 반응을 보면 육포를 다 먹은 건 아닌데, 대체 어디 간 거지?
[머, 먹으면 안 되는 거였나. 미안하다. 어제 배고파서 몇 개 집어먹었더니 금방 사라지더구나….]
리타랑 같이 턱을 어루만지면서 육포의 행방을 찾고 있을 때, 큐라가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방에 들어와 자수했다.
“아니, 그냥 챙겨두려는 거지. 가는 길에 먹어야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큐라 님, 가는 길에 하나 또 사면 되는 거니까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큐라를 향해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배고팠길래 그걸 다 먹은 거지. 내 팔뚝만큼 남아있었는데.
쉽지 않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방을 챙겼다.
일단 먹을 건 없으니까 가는 길에 건식 몇 개 챙길 수 있게 가방을 비워두고, 필요한 것만 챙겨야지.
다른 용사들은 인벤토리 능력도 있어서 가방 챙길 일이 없다는데, 참 부럽다.
우리 파티는 지금 당장에 가방이 세 개가 있는데.
“성하 씨. 짐 다 챙기셨나요?”
“어. 챙겼어.”
보호구까지 다 착용한 후,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멨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미카엘’을 들어 움직이니, 어느 정도 모험가 행색은 나는 것 같았다.
뭐, ‘미카엘’이라는 명품이 하나 있으니 S급 모험가처럼 보이지 않을까?
모험가 카드만 있으면 정말 좋은데.
그래도 나 빼곤 다 S급 모험가니까 신뢰도 하나는 죽여줄 것 같았다.
과대평가 받은 애들 없이 실력이 있는 애들이니 의심하는 사람도 없겠지.
“아 맞다. 엘리샤. 건식 챙겨가야 할 것 같아.”
“육포만 챙기면 되는 건가요?”
“으음, 그러지 않을까? 물은 챙겼으니까.”
가방의 짐을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확인했다.
안 그래도 오래 걸릴 여행이니까 이런 것이 중요하다.
괜히 도착한 마을에서 음식을 살 수 없게 되면 허기와 싸워야 하니까 곤란했다.
세라는 내가 몸 뜯어주면 되니까 괜찮고, 필요한 건 4인분 정도인가.
파티 동료들을 보며 또 뭘 챙겨야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다.
*
이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시장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아침 일찍 움직이는 모험가들에 맞춘 영업시간이겠지.
주 고객층이 아침에 우르르 몰려갔다가 며칠 후에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장을 보고 싶다면 이른 아침이 최적이었다.
집을 나선 뒤, 다른 녀석들은 필요한 거 알아서 챙기고 있으라고 떨어뜨려 놓았다.
오랜만에 혼자 다닐 수 있게 된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여러 가지 가게들을 바라보았다.
육포를 다량으로 구하기 위해 리타와 같이 다녔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육포 한 묶음 줄 수 있나요?”
“아아, 그 리타 씨 일행이시구나.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다행히도 리타랑 같이 다닌 전적이 있다 보니 구매가 수월해졌다.
무언가를 감싼 종이뭉치를 건넨 가게 점원의 앞에서 포장을 잠깐 뜯어보았다.
안에는 평소에 먹었던 육포의 덩어리가 있었다.
“근데 이건 뭘 말리는 거예요?”
“대체로 오크로 만드는 건데, 가끔 오크가 모자랄 때는 대체할 수 있는 몬스터를 그때그때 찾아서 말리기도 해요.”
“으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물건을 확인한 후에 포장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뒤 엘리샤에게서 받은 돈을 냈다.
돈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달까.
그보다 모험가라고 해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육포만 먹기에는 조금 고달픈 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호화롭게는 아니더라도, 가는 며칠 동안은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음식이 필요했다.
“아, 고소한 냄새.”
마침 다른 모험가들이 살기 위해 먹는 딱딱한 빵의 냄새가 아닌, 부드럽고 고소한 빵의 냄새가 났다.
당장에 빵을 굽는 건진 몰라도, 내 마음은 벌써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 빵집은 조금 비싸요.”
그렇게 빵집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읽기 위해 머뭇거리자, 점원이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내가 가격을 보고서 차마 빵을 고르지 못 하는 것처럼 보였나 본데, 나는 까막눈이라 이게 지금 얼마짜리 빵인지도 모른다.
빵의 이름도 읽을 수 없어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긴가민가해서 그냥 서 있는 거였다.
글자를 못 읽는다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이었던가.
빵 안에 건포도 들어가 있는 건 진짜 싫은데.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빵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런 빵이라면 이쪽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무난하게 빵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고르자.
조심스레 점원에게 가서 물어보자, 점원은 친절하게 반대편 진열대를 안내해주었다.
아까처럼 뭔가가 듬성듬성 들어있는 것 같은 빵을 보다가, 이렇게 겉면이 깔끔해 보이는 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빵 두 덩이 포장해 주세요.”
엘리샤와 리타라는 대주주가 있기에, 재료가 얼마나 좋아서 빵이 얼마나 비싸고 이런 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플렉스라는 걸까.
고소한 빵 향기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빵값을 지불하는데, 확실히 점원이 말한 대로 비싸긴 비쌌다.
어쩐지 여기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죄다 돈 많은 상인 같아 보이더라니.
귀족들은 아예 담당 요리사가 안에서 빵을 만들어주나?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귀족의 저택 안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성하 씨. 견과류 좀 샀어요.”
“잘 했어.”
그렇게 육포랑 빵을 사서 합류 지점으로 가고 있을 때쯤, 근처에서 장을 보던 엘리샤가 내 옆에 따라와 걷고 있었다.
그러고는 땅콩이나 아몬드 같은 것이 든 작은 봉지를 흔들면서 자신이 산 것을 보여주었다.
“나 그래도 가는 길에는 빵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어때? 먹어볼래?”
“빵이요? 좋아요. 먹여주세요.”
“혼자서 먹어….”
“제가 지금 손이 모자라서요.”
나는 빵이 들어간 봉지를 내밀면서 엘리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엘리샤는 깜짝 놀란 듯이 빵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씩 웃었다.
아차. 얘는 귀족도 아니고 왕족이었지. 이런 빵은 질리도록 먹었을 텐데.
그렇게 손을 내빼려 하자 엘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앙. 하고 벌렸다.
왜 나보고 먹여달라는 거지. 싶었는데, 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처음 보는 가죽 수통 같은 것이 있었다.
물을 담을 통은 따로 있지 않았나?
“아, 이거요? 이건 우유에요.”
“우유…?”
“최근에 어느 농장에서 소에게서 젖을 짜기 시작했다 하더라구요.”
“어어, 그런데?”
“마침 성하 씨가 빵을 사는 모습이 보여서, 저도 어울리게 우유를 가져갈까~ 하고 사 왔어요.”
그녀의 다른 한 손에 쥐어진 가죽 수통을 너무 빤히 쳐다본 것이 걸렸는지, 엘리샤는 “아.”하고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근처에서 쇼핑하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빵을 사는 모습이 보여서 그새 우유를 사 왔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냥 보고 있던 건가?
“살균하고, 차갑게 식혀서 맛있게 됐어요. 미지근하면 영 맛이 없더라고요.”
“으음. 그렇구나.”
나는 그런 엘리샤를 보면서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비싼 값을 하는 만큼, 빵은 부드러웠고, 고소했다.
입안에서 녹는 듯한 식감이, 이전 세계를 생각나게 했다.
여기 와서 먹은 빵들은 매일 딱딱한 것들이었으니까.
“저도, 아앙.”
“자. 먹어.”
“성하 씨는 우유 한 번 드셔보실래요?”
“좋아.”
내가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자, 엘리샤는 자신도 달라는 듯이 몸을 붙여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빵 한 조각을 떼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행복한 듯이 미소 짓고 빵을 우물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참 귀엽게 보였다.
왕족이라 먹고 싶은 것들은 뭐든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뭐가 그리 행복한 건지.
그래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엘리샤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나서는 내게 수통을 건네며 우유를 권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수통을 건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