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episode5. 미카엘 (6) (36/98)



〈 36화 〉episode5. 미카엘 (6)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광장이었다.
고정된 통나무에 묶여 고개를 들어보니,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들은 둘만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왕성의 위엄과 명예를 실추시켰다! 용사 유성하는 용사의 위치를 남용하고, 테베레스 왕궁의 제 삼녀, 엘리샤 넬 테베레스를 꼬드겨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나누는데 시간을 들여, 마왕을 처치해야 하는 용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했음을 명시 하는바. 용사 유성하에게 화형을 선고한다.”

내가 엘리샤를 꼬드겼다고?
뭔 말도  되는 소리야?

“미안해요. 성하.”

같이 옆에 묶인 엘리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게 사과하고 있었다.
왜 사과하는 걸까.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내가 잘못한 거잖아.

“그리고 테베레스 왕국의 제 삼녀, 엘리샤  테베레스는 자신이 한 나라의 왕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용사와 사랑에 빠져 공정함을 잃고,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테베레스 왕께서는 엘리샤 넬 테베레스를 왕녀에서 박탈하고, 없던 신분으로 만들도록 조치하도록 한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옆에서 처형을 준비하던 병사는 두루마리를 펼치고 더욱 많은 사람이 들을  있도록 큰 소리로 광장을 메울 만큼  목소리로 외쳤다.
 말을 들은 엘리샤는 좌절한 듯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 병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시체를 보여주는 것보다,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니까 더 괴로웠다.


“따라서, 엘리샤는 이내 왕녀가 아닌 것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용사 유성하와 함께 화형에 처하도록 한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상황을 인지하기 위해 병사의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말만 들으면 내가 꼬드겼다곤 하는데, 왜인지 엘리샤가 계속해서 사과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병사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둘만의 다른 무언가가 있던 거였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은 미래인 걸까. 아니면 없는 허상인 걸까.
 수가 없으니 더욱 무서워질 뿐이었다.
미래라면 나는 앞으로 지킬 것이 많아진다.
엘리샤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되고, 세라를 혼자 둬선 안 되며, 큐라와 리타가 싸우다가 죽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눈물을 흘리는 엘리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찮아.”

지금이 허상이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샤를 향해 미소지었다.


“집행!”


나와 엘리샤 아래로 널린 장작에 병사가 횃불을 무심한 듯이 던졌다.
 타지 않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장작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장작을 삼키는 불이 점점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 열기를 뿜어 시야를 가렸다.
화락, 화락, 아름답게 피는 아지랑이 꽃이 사람들의 표정을 가리고 엘리샤와 단둘이 남을 수 있게 커튼을 쳐주었다.
덥다.가 뜨겁다.로 바뀔 때까지, 나는 엘리샤와 눈을 지긋이 맞추었다.

“엘리샤. 미안해 하지 마.”


지금 이 상황이 미래를 암시하는 거라면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해주겠다.
이 세상이 지금 허상일 뿐이라면, 내 불안을 고조시키기 위해, 내 마음을 꺾기 위해 존재할 뿐인 세계라 할지라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나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앞에 나와 친했던 모두의 시체로 길을 만들더래도, 나는 굴하지 않겠노라고 눈을 치켜떴다.

“미안해. 나만 아니었으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하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샤는 눈물을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그녀를 달래기보다, 그녀가 들을  있는 사이에  말을 전하는 것뿐이겠지.
이 허상에서는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다 한다면 그 말을 전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녀가 당장에 허상이라 해도 편히 눈 감을 수 있도록.


“괜찮아. 나는 네가 있어 다행이었어.”
“성하…?”
“너와 함께여서 다행이었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자, 그녀는 눈물을 멈추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뚫어지듯 나를 보던 엘리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은 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네가 있어서 나는 모험을 즐길 수 있었어.”


그녀가 해주려고 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그것들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리타에게, 세라에게, 큐라에게는 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 그나마 전할 수 있는 상대에게 모아서 답했다.
눈앞에서 죽거나, 죽어있던 그녀들 대신, 엘리샤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며 진심을 담았다.
진심을 전한다는 게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이었던가.
말을 하는데도 숨을 들이쉬는데 떨림이 느껴졌다.


“성하. 나도, 성하가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뜨겁다.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릴 때쯤, 불은 우리를 시기하는지 점점 우리를 삼키려 했다.
불이 몸에 휩싸일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참으려고 애써야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버틸  있는 걸까.
불에 타 죽는  가장 괴롭다고들 하는데,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성, 하. 너무 아파. 너무 뜨거워. 너무 힘들어.”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

엘리샤의 눈물도 열기에 말라붙어버릴 정도로 불이 거세게 우리를 삼켰다.
엘리샤는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나는 그 와중에도 차분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아, 성하가 옆에 있구나.”

안심한듯한 엘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시야가 다시 어둡게 물들었다.



*



[어떤가? 동료들의 죽음을  것이?]
“이건, 미래야? 아니면… 허상이야?”

새하얀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존재가 허공을 의자 삼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거만한 제스처를 취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리타와 큐라의 죽음을 보여주고, 잔혹한 광경을 펼쳐주었다.
세라의 죽음을 보여주고, 잔악한 민심을 보여주었다.
엘리샤의 죽음을 보여주고, 가혹한 시선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나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것들이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면 나는 대처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밖에 없었다.


[지금이 그 미래고, 너는 과거를 본 것이다.]
“뭐?”

그럴 리 없어.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인 건가?
그럴 리 없어. 다들 정말로 죽었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야! 죽지 않았어! 아직 살아있을 거야… 네가 보여준 건 허상이나 미래일 뿐이야…!”
[미래? 그런 걸 네놈들에게 보여줄 리가 없잖은가?]


일말의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아 마왕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앞의 존재는 그런 나의 마음 하나 짓밟으려는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허상. 그러길 바라는 네놈의 마음은 알겠지만, 일어난 일들이다.]
“대체, 그러면…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대답을 내게 들려줘. 넌 왜 내 앞에 있는 거지?]
“네가 부른  아니었어?”
[기억나지 않는가? 네가 날 찾아왔었다.]

그녀는 확인 사살하듯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쐐기를 박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주먹을 꽉 쥐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라고 던진 물음에,  앞의 존재는 다시 내게 되물었다.
그것은 내가 부름에 날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왔다고 한다.
나는 마왕을 찾으러 간 적이 없는데, 운 좋게 날아갈 리가.

“‘미카엘’?”
[드디어 내 이름을 불렀군.]
“네 이름이라고? 너는 마왕이 아니라….”
[그래, 나는 성검 ‘미카엘’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의자 삼아 앉아 있던 검은 모자이크가 서서히 걷히듯이 그것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나랑 비슷한 크기로 보였던 모자이크가 휘날리자, 세라보다 작은 크기의 소녀가 뚱하니 있었다.
검고 긴 생머리, 금색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을 ‘미카엘’이라 소개한 그녀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다시 허공에 등을 기대듯 앉았다.


[이름을 부른 것은 칭찬해주지. 그런데 나는 네가 내 주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세 번의 이야기를 봤음에도, 너는 뚜렷한 대의라는 것 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걸 보여야 하나?”
[쿡. 성검을 다루려고 하는데, 대의 하나 없이 쉽게 휘두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미카엘’은 손뼉을 치며 나를 칭찬하더니 다시 표정을 굳히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름을 알아낸 것과는 별개로 내게 대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모습에 실망한 듯이 보였다.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실격이야. 너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 나를 다룰 자격 같은 것 어느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야.]
“됐어. 그런 이야기는.”
[뭐?]
“너 같은  성검이라면, 나는 널 필요로 하지 않아.”


‘미카엘’은 싸늘한 얼굴로 나를 평가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통보했다.
자격 미달이라고 몇 번이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감정 있는 무기는 나도 사양이다. 게다가 이런 악독한 취미를 가진 무기라면 더더욱.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미카엘은 아까 같은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서 검을 후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지금 인간인 모습인 그녀를 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깨물어라.”

큐라의 날개가 뜯어져 지면으로 떨어져 머리가 깨져 죽는 것을 봤다.

[끅?! 나, 나를 때려?!]
“한 대로는  끝나지.”


리타의 몸이 세로로 2등분 된 것을 보았다.
어찌나 잔혹하던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그런 것들을  년이 지어냈다고 생각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코, 코피… 이건 내 내면인데…? 내가?]
“왜, 그런 짓을  놓고  앞에 나타나면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면의 세계인데 어째서 내가 당하는 거지?]


주먹질을 계속해서 하자, ‘미카엘’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시선을 옮기며 당황하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자기 영역에서 처맞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겠지.
그러면서, 맞아 죽은 세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보여주는 건지, 대의가 궁금했으면 다른 방법이 있었잖아?”
[큭?! 네, 네놈은 이런 모습인 나를 때리는 건가?]
“이런 모습이 뭔데?”

어린 소녀의 모습을  ‘미카엘’은 흐르는 코피를 막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몇 번이고 얻어맞은 그녀는 뭐라도 해서 내 폭행을 막을 생각인 것 같은데, 나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미카엘’이고, 생김새는 그저 단순한 형상일 뿐이다.
나와 이야기 하기 위해 만든 가짜 형태인 그녀를 때리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나 주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화풀이만 하고 갈게.”
[끅. 잠깐만….]
“나도 너 같은 무기 필요 없으니까. 어차피 제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미안해. 잠깐만, 살려줘. 날 놔줘…!]
“네 영역이잖아? 네가 해제하든가. 그때까진 내게 얻어맞게 되겠지만.”


허공을 의자 삼아 앉던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계속했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고정해 몇 번이고 주먹질했다.
그녀의 코뼈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가라앉고, 이가 빠져 그녀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그녀의 영역이라 그런지 고통을 받은 후에는 어느새 원상복귀 되었다.
나랑 비슷한 몸인가, 그럼 더 편하게 때릴 수 있겠네. 싶어 아까보다  강하게 힘을 실었다.
그렇게 얼마나 때렸을까. 필사적으로 비는 그녀가 있었다.

[당신 때문에 내 영역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왜 나 때문이야?”
[몰라! 날 좀 놔줘! 미안해… 내가 사죄할게!]

빈약한 소녀의 모습을 한 ‘미카엘’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발치에 엎드려 빌었다.
그리고는 소리치면서 자신을 놓아달라 외쳤다.


“그러냐. 그럼 계속 맞으면 되겠네.”
[이, 인정할게! 주인으로 인정할게! 제발 날 놔줘!]
“난 너 같은 무기가 싫다니까?”
[어째서… 난 누구나 가지고 싶다 하는 성검일 텐데… 애초에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시련이라 하면서 좋아라. 하며 시험에 도전한단 말이다! 내 주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참여하는 시험인데! 어째서 너는…!]

나는 그런 ‘미카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냐오냐. 봐주니까 콧대가 높아져서 모두를 낮잡아보는 지고의 검.
그런 검을 가지고 있어봤자 성가시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료의 죽음을  번이고 보여준 그녀에게 보답만 하고서, ‘미카엘’을 손에 쥐는 건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다시 주먹을 말아쥐는 순간에, ‘미카엘’은 서럽다는 듯이 입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고함쳤다.

[인정할게…! 네가 그 누구보다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그런  필요 없는데. 그냥 조용히 맞아주면 안 되나?”
[웃.]


그리고는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보려는 듯이 자랑스럽게 소리쳤는데, 지금은 그녀에게 평가질 받아봤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싸늘하게 목소리 낮춰 말하자,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안색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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