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episode4. 승급심사 (7)
“읏. 아직도 먹어…?”
의식이 꺼졌다가 켜지듯 시야가 밝아졌다.
원래라면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욱신거림만 남아있을 텐데, 지금은 괴로웠다.
내 팔을 계속 뜯고 있는 세라를 나무라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을 때 옆에서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안하다. 맛있어서 그만.]
세라는 이미 식사를 다 했는지 리타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피곤했던 걸까.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흘렀을 때, 옆에 누가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위험해. 나 이렇게 시야가 좁았던가?
엘리샤가 옆에서 다리를 끌어안고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샤는, 식인 취향 있는 거 아니지?”
“저는 뭐든 좋아요.”
난 엘리샤에게 뭐 하나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리 친근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나. 싶어 큐라가 뜯어먹은 팔의 모습을 보았다.
이빨이 날카로워서 그런 건지 내 팔이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세라를 보다가 군침이라도 돌았는지 자신이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 같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몸을 뜯어먹었던 게 미안했는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큐라, 괜찮아.”
“성하 씨는 관대한 사람이군요.”
“쪼잔한 사람인데.”
어쩔 줄 몰라서 내 눈치만 보는 큐라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옆에서 엘리샤가 빤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 마디 붙였다.
대체 어떤 일을 봤길래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지 난 알 수 없던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돌아가면, 길드부터 엎어버릴 거야.”
“…그건.”
“성하. 길드를 엎는 건 조금 무리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만.”
돌에 등을 기댄 채 앞으로의 일을 다짐하며 크게 숨을 내쉬자, 엘리샤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세라의 등을 토닥이고 있던 리타도 엘리샤의 말을 거들었다.
“뭐가 무린데?”
“그건 전력의 문제도 있고… 아. 그, 아무튼 안 됩니다.”
그녀는 다섯 명 밖에 안되는 파티가 길드를 엎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그녀는 이내 내 한쪽 팔에 붙어있는 큐라를 눈에 담았다.
당장에 내 몸의 마나를 양껏 들이키면 세라도 길드 하나 엎는 게 가능할 것 같은데, 큐라는 어떨까.
뭐, 나도 정말로 가서 물리적으로 엎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길드가 없으면 돈을 구할 곳이 없어진다. 리타의 자금에 의존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위협은 줄 거야. 정말 엎지는 않을 게.”
“그, 런 문제라고 해야 하나.”
“위협 정도면 괜찮아요. 길드를 엎으면 나라에서 미움을 사게 되어 버려요.”
아무리 그래도 나라를 상대로 적대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을 조절할 생각이었다.
뭐, 그것도 내 힘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죽을 뻔했던 걸 떠올리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가자.”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죠? 세라는 피곤한지 졸고 있는데요…?”
마음을 굳게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세라가 리타의 옆에서 졸고 있었다.
리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손을 머뭇거렸다.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당장 깨워서 출발하자고 하면 어디 하나 꼴아박고 다 같이 황천길 가는 건 아닐까? 졸음운전은 금물이니 세라가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내가 하도록 하지. 먹은 것도 있으니.]
한숨을 쉬면서 세라의 머리에 손을 턱 하고 얹자, 뒤에서 큐라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이 거대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날 수 있었구나. 세라의 사역마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었구나.
*
한참을 날아 내가 다니던 길드에 도착했다.
큐라의 거대한 모습에 길에 있던 많은 사람이 혼비백산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길드 안에 있던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다들 뛰쳐나왔는지 이쪽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쿵. 하고 광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큐라는 인간으로 변한 뒤 로브를 둘렀다.
“드래곤?!”
“뭐냐, 무슨 수작이냐!”
드래곤의 모습에 흥분한 모험가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이밀며 해명을 원했다.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되니 배제하려는 모습일까. 하지만, 내겐 정당성이란 것이 있었다.
길드, 그리고 마법사협회에 한바탕 난리를 쳐주지 않으면 수지가 안 맞는다.
[감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냐.]
내가 앞장서서 동료들을 지키듯이 팔을 펼쳤다.
큐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날을 들이미는 것이 불쾌했는지, 으르릉대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도 내 팔을 쳐내고 뛰쳐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길드 마스터를 불러주세요.”
“길드 마스터 님이 네 따까리냐? 나오라면 나오게?”
“…테베레스 왕국의 제 삼녀. 엘리샤 넬 테베레스의 명입니다. 길드 마스터를 불러와 주세요.”
큐라를 진정시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하지만 방금까지 봤던 큐라의 모습에 반발심에 불이 붙은 그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세를 잡는 순간에, 엘리샤가 뒤에서 슬쩍 나와 명령을 내리듯이 말했다.
조곤조곤하면서도 힘이 실린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왕녀는 왕녀구나 싶었다.
그보다, 권력 최고다. 내가 말할 때는 들을 생각 채 안 하더니, 엘리샤와 리타의 모습을 보고서 우물쭈물 길드로 들어가 길드 마스터를 불러오려는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어… 공주님 어쩐 일이십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왕녀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피가 말리는지 길드 마스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길드 마스터의 뒤에는 부 마스터가 같이 따라 나와 내 파티와 마주하고 있었다.
뭐, 길드 마스터에게 볼일 있는 건 엘리샤가 아니라 나다.
“제가 할 말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무슨… 동료인 그, 낙오자…?”
엘리샤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는 듯이 눈을 살포시 감고 뒤로 물러났다.
참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이런 것이 미덕인 건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필요한 일만 딱딱 해주고 있었다.
내 마음이 알기 쉬운 걸까?
일단은 이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말을 꺼냈을 무렵, 길드 마스터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길드 마스터의 말로 주변의 분위기가 난잡해졌다. 아무래도 낙오자가 드래곤을 타고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거겠지.
“어제, 세라의 승급 심사를 보러 하이오크를 처치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시험장이 한 드래곤의 둥지였더군요. 지금은 괜찮지만, 어제까지는 제 파티가 전멸할 뻔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그런… 심사장은, 마법사협회에서 연결해주는 것이라 저희도 잘….”
“그럼 협회장님 불러주세요.”
세라의 승급 심사를 보려다가 큐라와 만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내가 죽지 않아서 그녀와 동료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죽었다면 그대로 파티 전체가 전멸했을 것이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차근차근 앞뒤를 나열해 설명했다.
늘 있던, ‘이건 저희 관할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해봤자 내게 소용없었다.
방아쇠를 잡은 것은 나였다.
“잠시만요… 마법사협회장은 아무나 막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가 직속 관할이라니까요?”
“불러와 주세요. 제가 지금 참을성이 없거든요. 그리고 칼 좀 치워주시겠어요? 저희 애가 다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모두 무기를 치워라! 일단, 진정하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드래곤의 둥지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아무런 차질 없이 심사도 잘 치러왔으니 확실합니다.”
길드 마스터는 정말로 마법사협회장을 부를 수 없다는 듯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애원하듯이 말해도 지금 내가 그걸 들어줄 아량까지는 없었다.
나라의 공주, 고위 성직자, 마족, 하프 드래곤으로 구성된 파티를 상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검을 겨누고 있는 놈들을 둘러보며 부탁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길드 마스터는 식겁한 표정으로 주변의 모험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잘못이 없어요? 그럼 이 드래곤은 제가 어디 동굴에 가서 납치해왔나요?”
“드래곤이라니….”
[내 둥지에 핏자국을 남기던 놈들이 네놈들이렷다? 뭐, 성하를 만나게 된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만 그 전의 일들을 떠올리니 가만둘 수가 없구나.]
“힉.”
말도 안 되는 확신을 늘어놓는 길드 마스터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를 뻔했다.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리고 진정하자고 말하면서 큐라의 등을 슥 밀어서 내 옆으로 데려왔다.
그러자 큐라는 후드를 슥 넘기고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과 눈을 보여주었다.
귀가 인간의 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길드 마스터와 부 마스터는 숨을 삼켰다.
[뭐, 내게 검을 겨눈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고 나와 새 둥지에서 사는 것도 좋지 않겠나?]
“안 좋아. 그러지 마.”
[내 둥지에 가면 돈이나 지위 같은 것도 필요 없다만.]
“큐라 씨. 그러지 마세요. 지금 그런 상황 아니에요.”
[쳇.]
큐라는 갑자기 이 살벌한 분위기를 깨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몰살 선언으로 들린 나머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몇몇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주춤거리는 무리를 보던 큐라는 슬쩍 내 팔에 붙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건 상대를 향한 협박이 아니라 나랑 같이 자기 집에서 살자는 이야기였다.
엘리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나의 팔을 끼고 있던 큐라를 떨어뜨리면서 조곤조곤 말했다.
자신의 어필이 먹히지 않아서 분한 건지, 큐라는 혀를 차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로브의 후드를 썼다.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해 드려야… 사죄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마법사협회장 보고 싶다고 했는데요. 제 말이 들리질 않나 봐요.”
“그건,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뭐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공주님도 죽을 뻔했고, 성직자 하나도 죽을 뻔했는데, 보상할 수 있을 만한가요?”
용사도 되지 못한 나나, 마족의 목숨은 그리 귀하지 않다.
하지만 파티에 엘리샤와 리타가 있는 것만으로 파티의 가치는 상승한다.
아무리 저울질해봐도 일개 길드 마스터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목숨이 둘이나 있다.
당연하게도 내 말을 들은 길드 마스터는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길드에서 쉬고 있던 용사 나부랭이들도 보이고는 있었지만 내 행동을 말리지는 않았다.
내 행동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지금 이곳에서 드래곤을 데리고 있다는 문제보다, 엘리샤가 죽을 뻔했다는 문제가 더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실 건데요?”
입을 쉽사리 떼지 못하는 길드 마스터를 바라보며 재촉하듯이 입을 열었다.
뭐, 상대도 해줄 수 있는 일에 한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만큼 했으면 알아서 내가 조금 낮춰줘도 될 것이다.
큐라의 모험가 카드는 필요할까. 세라에게도 S급 모험가 카드를 달라고 하면 될까.
더 얹어서 피해 보상금을 달라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엘리샤나 리타를 보면 돈에 쪼들리는 성격은 아니고, 세라나 큐라를 보면 지위에 매달리는 성격도 아니다.
뭐가 필요하다고 말할 사람이 파티에서 나뿐이라니 나만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제, 제가 어떻게 해야… 제 가족만큼은….”
“아니, 죽으라고 안 했어요. 그냥 모험가 카드 두 명 S급으로 발급해주시고, 보상금만 얹어 주시면 입 다물고 있을게요.”
“성하 씨. 그래서는 안 돼요. 제 목숨보다, 당신이 당했던 것을 떠올리세요.”
“아니, 나는 안 죽잖아.”
벌벌 떨며 자신의 가족은 어떻게든 지키려는 가장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조금 약해진다.
하긴, 지금 당장 너 때문에 공주가 죽었다고 소리치면 길드 마스터뿐 아니라 관계자나 그들의 가족은 몰살당할 것이 분명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엘리샤는 자신이 죽을 뻔한 일보다, 내가 죽느라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라 했지만 그런 걸 들먹여봤자 앞으로 같이 다닐 큐라만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미안하다.]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엘리샤의 말을 들은 큐라는 한껏 위축되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에리. 아니 엘리샤 공주님. 공주님 생명에 우리 파티 전원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것은 기억해주세요.”
“아니, 나는 괜찮아. 실제로 다친 곳 하나 없고.”
리타는 사람들의 신경을 쓰는지 존댓말을 쓰며 엘리샤에게 뭔가를 이르듯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나는 이게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봐봐. 길드 마스터도 엘리샤가 나서니까 더 무서워하잖아.
“제가 마법사협회장을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앞에 나선 엘리샤는 살벌한 미소로 길드 마스터에게 통보했다.
주변의 표정과는 다르게 길드 관계자들의 표정은 굳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