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episode4. 승급심사 (6)
“그런데, 엘리샤는 이런 모습으로 마을에 내려갈 수는 없는데.”
“내 거 로브 있어요. 빌려드릴게요!”
[마족인, 거냐? 어려 보이는데도 어찌 그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턱을 쓰다듬으며 큐라의 옷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뭐, 내가 그녀를 동료로 삼을 줄은 몰랐으니 어쩔 수 없나.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방법도 있으니 괜찮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던 그때, 세라가 자신의 로브를 펄럭이면서 내밀었다.
머리카락 색깔도 바뀐 세라에겐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라가 앞으로 나와 큐라에게 로브를 내밀자, 큐라는 세라를 빤히 바라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큐라는 생물에게서 뿜어나오는 마나가 보이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도 머리카락의 색을 바꾼 세라를 보고 마족이라는 것을 단번에 맞추었다.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다니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성하 님이 주신 마나예요. 알아보시겠나요?”
[호오. 성하는 그런 것이 가능하던가?]
“아니, 가능하다랄까. 마족의 특성으로 그냥 먹고 큰 거지.”
세라는 요염한 미소를 띄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것을 본 큐라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씨익 드러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날 잡아먹으려는 애가 둘이나 늘어나면 많이 힘들어지니까 마족의 특성이라고 못을 박아두었다.
“성하. 굳이 먹지 않아도 전에 성하가 썼던 방법이면 가능할 거에요.”
“아니, 리타?!”
“성하 님. 로브도 양보했으니까 오늘은 마나를 듬뿍 주세요.”
리타는 뒤에서 내 퇴로를 막아버리려는 듯이 말을 던졌고, 세라는 그 와중에 눈치가 없는 건지 순수한 건지 입맛을 다시며 손을 잡아 끌었다.
세라에게서 로브를 받아 든 큐라는 묵묵히 후드를 뒤집어 쓰면서 붉은 눈을 빛냈다.
“성하 씨는 인기가 많네요. 하렘 왕국이라도 차리시려는 걸까….”
“엘리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마왕만 처치하면 너네랑은 쫑이니까.”
[쫑이라니?]
“쫑?”
“성하?”
엘리샤가 무심한 듯이 말을 던졌다.
애초에 내가 뭐 여자랑 한 번 자보겠다고 모은 것도 아니니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나는 내 삶만 되찾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운 좋게, 라고 해야 할지 겨우 얻은 기회를 멍하니 있다가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버텨왔기 때문에 단호하게 말했다.
인연이고 자시고 없다. 나랑은 악연으로 묶인 애들뿐이니까. 이 마왕 토벌이 끝나면 나랑은 모두 작별이다.
엘리샤는 리타랑 소꿉친구 놀이하러 가고, 세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큐라는 새 친구를 찾으면 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을 산다.
그런 생각으로 단호하게 입을 연 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변한 것 같았다.
“왜. 뭐,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엘리샤는 입을 꾹 닫고 있었고, 큐라는 당황한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세라는 내 말의 의미를 못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고, 리타는 내 이름을 부른 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자신들도 나랑 악연으로 엮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안 되겠네요. 동료애가 부족해요. 성하 씨는.”
“그러게요. 성하는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하네요.”
“성하 님…. 정말 우릴 버리는 건가요?”
[허. 성하는 그럴 생각으로 나를 끼워준 건가?]
엘리샤를 선두로, 리타, 세라, 큐라가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아니, 큐라. 마왕을 잡으러 가는 기간은 엄청 길잖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 동안 친구로서 같이 다니자는 거지, 그 사이에 네 친구도 구하고.”
[그런 건가. 나만의 친구를 구하는 여정인가?]
“그런 거지.”
일단 방금 영입한 큐라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두면 어느 정도 이해해줄 것이다. 라는 기대처럼, 큐라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컥!”
팟, 하고 날아오른 큐라는 내 목을 붙잡고서 벽으로 밀어붙였다.
인간을 초월한 완력이라 그런지, 한 손으로도 사람의 목을 쉽게 조르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설득에 실패한 걸까.
[마왕을 잡은 이후에는 우리는 안중에 없다 이거 아닌가? 내 고독을 이해해주던 그대가 아니었던가. 내 착각이었나?]
“끅.”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기껏 입발린 소리를 지껄이며 그녀를 들여놓고서, 필요가 다 했으니 팽개치겠다는 소리를 해 버린 내 잘못이었다.
제길,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다. 이래서는 큐라에게 미움을 사버릴 뿐이었다.
[내 고독을 가지고 기만한 것이냐. 그런 것이냐. 정말로, 이번에도 나는….]
아아, 이대로는 그녀가 인간 불신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말 좀 하게 놔줬으면 좋겠다. 변명할 목까지 붙잡아 둔 걸 보니, 대화를 원하는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
큐라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슬픈 목소리로 슬픈 말을 뱉었다.
“성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잠시 놔주시겠습니까?!”
[아, 그렇군. 목이 막혀서 말을 하지 못하던 것이었나.]
리타가 조심스레 큐라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입을 열었다.
그러자 큐라는 깜빡했다는 듯이 내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갑자기 목이 졸리는 바람에 다리의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큐라 뒤에는 리타, 세라 그리고 엘리샤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무슨 청문회라도 온 기분이었다.
“혹시 제가 성하 씨를 죽음으로 몰아서 그런 건가요? 역시 저 같은 건 보이기만 해도 민폐인 공주인 거겠죠…”.
“아무리 제가 잘못을 했었다지만, 이렇게 팽개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성하도 조금 그렇지 않나요?”
“성하 님… 저는 버려지는 건가요? 역시, 오빠 일 때문에 저를 버리는 거죠?”
[살기 위해서 마왕을 토벌하고 나면, 나를 버린다면 그게 바로 토사구팽 아닌가. 나는 내가 도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만.]
이제는 아예 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고 작정을 했구나.
돌아버릴 것 같았다.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신적으로 타격이 들어왔다.
벌써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들어봐. 우리는 조금 악연으로 이루어진 사이잖아? 솔직히 여기서 내 죽음이랑 연관 안 된 사람 있긴 해?”
나는 다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내가 뱉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짓을 하며 그들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그녀들이 이해할만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렇게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는 마왕을 처치하면 내 모험은 거기서 끝이야. 나는 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라고. 분명 힘들긴 했어도, 나는 거기서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그래.”
내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릴 때면, 좋은 기억이 없던 것 같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관계로 얼마나 오래 가기를 바랄 수 있을까.
[나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가장 앞에 서 있던 큐라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의 붉은 눈이 눈물에 흐려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돌리니, 리타도, 세라도, 엘리샤도 말만 하지 않을 뿐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녀들이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긴 하겠지.
“…….”
[뭐라 말 해보란 말이다. 내게 말했던 것들은 그저 나를 홀리기 위한 말이었던 것뿐이냐.]
“미안해. 네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녀의 슬픈 목소리에 내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래곤 씨?”
[큐라로 좋다. 큐라라고 불러도 좋다.]
“그럼 큐라 씨. 조금은 진정해주시겠어요?”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엘리샤가 큐라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를 말려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큐라가 화내지 않도록 하려는 건지, 그녀의 언행은 조심스러웠다.
[…성하가 날 버리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는데,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큐라는 엘리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주먹을 말아쥐었다.
사람 같았던 손이, 어제 봤던 것처럼 붉은 비늘로 둘러싸였다.
점점 격앙되어가는 감정이 내게 스며들어왔다.
[마왕을 잡고 떠나나, 마왕을 잡지 못해 죽나, 내게는 모두 같은 상황이다. 네가 사라지지 않는가.]
“그렇지….”
[그렇다면, 적어도 내 눈앞에 시체는 남겨두겠다.]
오. 이게 무슨 신박한 소리지. 원래는 그리워하겠다. 그런 말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요새 하도 죽어대서 그런지 내가 상식을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말을 잘 골라야 할 것 같았다.
까딱하면 오늘도 저 주먹에 배에 구멍 날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그녀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말을 들어줄까.
상황을 지켜보자니, 다들 은근히 큐라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 이렇게 위험한데, 말려주지도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큐라. 잠깐만.”
[뭐냐. 생각이 바뀌었나?]
“혹여 내가 없더라도, 친구는 생길 수 있잖아? 네 옆에도 벌써 세 명이나 있는데.”
[글쎄다. 너는 네가 아닌가?]
큐라의 마음이 변치 않는 듯, 몇 번을 말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있기를 바라는 걸까.
“그럼 알았어. 남도록 할게.”
[…진작에 그럴 것이지,]
“성하 씨. 우리 위험했어요. 알죠?”
“성하, 말은 상대를 골라가면서 하는 게 좋아요.”
“성하 님…. 저도 큐라 님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지금 당장에는 계속해서 내 의견을 밀어붙여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그녀들이 이 사실을 먼저 알아뒀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말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녀들이 경계하게 만드는 악수가 되어버렸다.
항복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차분하게 말하자, 큐라는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펴고 다시 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던 붉은 비늘이 공기 중에 분해되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엘리샤, 리타, 세라가 말을 얹었다.
대체 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날 가만히 두질 않는다.
“하아.”
이게 그 플래그란 건가. 어떻게 꽂아야 이렇게 정신 놓은 것처럼 잘못 꽂은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내 세계에서 죽고 싶지 않았고, 이 세계로 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 턱이 없는 세계로 불려와서는 생존권을 가지고 다투라고 붙여놓는데, 이런 세상에 고운 시선 하나 보내기도 어렵지.
마왕이 72명이나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다 죽이면 전원 생존이 아니니 더 화가 날 뿐이었다.
여러모로 정이 가지 않는 세계다.
“성하 님. 저 배고파요.”
“아니, 너 어제… 설마 또 다 썼니?”
“꽤 멀리 날아갔다 와야 해서, 많이 썼어요….”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쯤, 옆에서 다가와 내 어깨를 만지는 세라가 있었다.
위압감을 뿜어내는 애들 때문에 눈치를 계속 보고 있었던 건지, 우물쭈물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마을이 멀었다고 했던가. 왕복에 세라의 마법을 모두 쓴 거라면 마나를 다 쓴 것도 이해가 갔다.
아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구나. 어제 급하게 준 거라 일부분만 먹인 거였는데.
여기가 여관도 아니니, 섹스로 마나 보충해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보다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전에도 리타가 구경 왔을 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죽었었나.
“성하 니이이임.”
“아니 가만히 있어 봐. 줄게.”
결국, 세라의 애원에 이기질 못한 채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고 팔을 내밀었다.
원래 아픈 방법은 지양하지만, 이렇게 트인 공간에서 섹스 한 판 뜨자고 할 수는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
[호오. 마족의 식사 장면인가. 처음 보는구나.]
입을 쩍 벌린 세라가 내 팔을 강하게 물었다.
그 광경을 본 엘리샤는 굳은 표정으로 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리타도 전까지는 마족이 어떻게 밥을 먹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겠지.
그리고 옆에서는 큐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면서 세라가 뜯어먹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하를 뜯어먹었을 때 엄청난 마나가 느껴지긴 했다. 그걸 주식으로 삼는 거겠지?]
“뭐, 그런 거지. 근데 너도 인간 먹니?”
[뭐, 먹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정말 급하게 마나가 필요할 때는 먹는다.]
“그러냐….”
세라의 모습을 보고 마족의 식성을 추리하던 큐라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내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맥을 뜯어먹은 건지 피가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큐라는 그래도 주식이 인간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또 현기증이 난다. 피가 모자라서 어지러움을 느끼게 되는 건 언제 느껴도 적응이 안 됐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고, 온몸이 무기력해지고, 숨은 가빠진다.
과다출혈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적응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시야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