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episode4. 승급심사 (4) (24/98)



〈 24화 〉episode4. 승급심사 (4)

*

“제길.”

몇 번이나 죽었는지 점점 모르게 되어간다. 그냥 상황을 보고 내가 죽었구나. 하고 짐작해야 한다.
의식을 잃은 것과 죽은 것을 스스로 분간할 수 없게 되어갔다.
그렇게 되니, 결국 내 안에서 죽음이 가지는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깊이는 얕아졌다.


“성하?!”
“성하 씨!”
“성하 님.”


리타, 엘리샤, 세라와 마주쳤다.
길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는지, 아까 도망친 그대로 산을 타고 내려온 듯했다.
그보다, 나는 나체인데 그녀들을 만나게 된 것이 조금 껄끄러웠다.
누군가에게 나체를 보여주는 취미는 없는데….


“옷이 다 타버린 건가요?!”
“그래. 아직 싸우는 중이야.”


엘리샤가 자신의 키만 한 지팡이를 짚고서 내 모습을 살폈다.
공주로 자라 남자의 성기를 보는 것이 처음인지 얼굴을 붉힌 채로 시선을 조금씩 보내왔다.
따끔거릴 정도로 시선이 잘 느껴진다.


“성하, 님.”
“세라는 가만히 있어. 성하.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하는  아닌가요?”



“가! 어서!”
“대체 무슨 일이…!”
“가라고! 길드로 가서 이야기를 전해줘!”
“그럼, 아직 도망친 건 아닌 건가요?”
“그래, 가. 드래곤이 돌아오기 전에.”

지금은 이 인원으로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상대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할  있는 최선은 그녀들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여기가 무슨 나라의 어느 산인지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지인인 리타나 엘리샤가 있다면 어떻게든 돌아갈  있을 것이다.
드래곤에게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상황을 물으려는 리타를 다그치고, 내 상황을 확인하는 엘리샤의 말을 긍정한 채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내가 더는 고통스러워서 못하겠다고 어리광을 부린다면 지금 당장엔 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나는 후회하게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수 없는 주제에, 나 혼자만 남는 선택을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세라. 어서 리타와 엘리샤를 데리고 돌아가. 내 몸을 먹게 해줄게.”
“…성하.”

리타의 품에 겨우 안겨있던 세라에게 팔을 내밀면서 말했다.
리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런  신경 쓸 때가 아니었기에, 팔을 내밀었다.

“…….”
“먹어. 좋아하는 거잖아. 늦기 전에 먹어. 그리고 날아가서, 도움을 요청해줘.”


콰직.
드래곤에게 한창 죽었을 때라 그런지 고통이 덜했다.
마나 고갈 상태의 세라를 깨우고, 빠르게 사역마를 소환시키게 하는 것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었다.
같이 도망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늘을 배회하는 것이 눈에 띄는 순간 다 같이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들을 보내고 나는 다시 드래곤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
하아, 더는 아프고 싶지 않은데….


“다 먹었어요.”
“됐으면 이제 가. 한참 뛰다가 충분히 멀어진 뒤에 날아가. 그리고, 엘리샤는 여기다가 시선 끌기 용 마법을  번 써주고 가면 좋겠어.”
“성하 씨. 그래도 되는 건가요?”


사태가 심각한 걸 아는 건지, 세라는 어느 정도 먹은  꿀꺽 삼켰다.
전처럼 과하게 삼키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엘리샤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끌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이렇게 미끼가 되고 나면, 그녀들이 다른 사람을 구해올 때까지 여기서 드래곤과 싸워야 했으니까.


“괜찮아. 이제 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가 뱉은 말과는 반대로 나는 괜찮지 않았다.
드래곤을 타도할 수 있는 파티를 구성하려면 길드 단위나 국가 단위로 움직여야  텐데, 나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몸은 몰라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려 달려가는 그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그 드래곤의 흉포한 외침이 귀를 찢는 듯이 들렸다.
나를 찾는 건지 이 일대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바위산 아래는 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진 숲이어서 다행이었다.
저 멀리 달려가는 그녀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자, 엘리샤가 시간차로 걸어둔 시선 끌기  마법이 발동했다.
폭죽이 터지듯이 찬란한 빛이 공중에서 터지는 것과 동시에 굉음이 들려왔다.


“아. 이거, 놓고 가줬네.”


깜빡하고 말  했었는데, 리타가 용케도  무기를 놓고 가주었다.
그리고, 여분의 나이프. 15센티 밖에 안 되는 짧은 날이었지만, 그래도 이걸로 충분했다.
마법사하고 격투가 겸 성직자 상대로 이런 나이프라도 있는 게 어딘가. 하며 감지덕지 해야 했다.

[질긴 녀석.]
“여어.”


드래곤의 목소리에 나무들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위엄을 풍기며 날아오는 드래곤의 거구를 응시하며 자세를 잡았다.
봉을 쥔 손을 꽉 붙잡고, 정면을 응시하며 경계태세를 갖추자 드래곤은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

무슨 생각인 걸까.


[하아. 역시 커다란 몸으로는 인간을 상대하기 까다롭군.]

그런 생각이었나. 나도 그녀가 인간일 때가 가장 상대하기 쉽다.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싸워볼까.”
[…흥.]


*




봉을 휘두른다. 봉의 한 가운데를 잡고, 원심력을 이용해 강력하게 휘두른다.
그것이 봉술의 기초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제대로 통하지도 않은 채, 나는 눈을 감았다.

“…….”

세라처럼 몸을 뜯어먹는 그녀를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밤이 되도록 그렇게 싸웠는데도, 나는 이길  없었다.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회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눈을 굴려봤지만, 일단 그녀의 나체를 보아하니 정면에는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지 못한 곳이라면 결국 등이란 건데, 그녀가 나를 뜯어먹는 와중에 날개뼈 부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본 기억이 없으니 그럼 허리일까.


[네놈. 단순히 죽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꽤 맛있는 몸을 갖고 있구나.]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내 살을 뜯어 먹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섬뜩했다.
안 그래도 붉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데, 내 피까지 뒤집어쓰니 피부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빛나는 눈은 내 몸을 응시했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꽤나 신중한 타입인 것 같았다.
나이프를 깔고 누워서 보이지 않게 숨긴 것이 어느 정도 다행이라고 할까.

“끄윽, 허억, 허억.”

 엄청나게 많은 양의 피를 흘린 탓에 현기증이 몰려온다.
한  죽고  후에 도박으로 그녀의 허리를 찔러야겠다.
실패하면, 난 여기서 증원 부대가 올 때까지 그녀의 밥이 되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만, 그녀를 타도할 방법이 이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윽?! 너, 그…!]


깜빡.
의식을 잃고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깔고 있던 나이프를 빠르게 꺼내 휘둘렀다.
내가 한 것이었지만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정도라면 역린이 아니더라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까득 깨물고, 그녀의 허리 뒷부분을 칼로 찍은 채 그녀를 끌어안았다.
 피로 범벅이  그녀의 신체를 끌어안자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 나를 반겼다.


“크헉!”
[그아아악! 그아아아아아아아아!]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는 내 목을 조른 채 이곳저곳으로 내치더니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잠시 뇌진탕이 온지라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이프를 뽑았지만, 그곳은 마냥 치유할 수 없는 건지 울부짖으며 뒹굴기만  뿐이었다.

[으아아아! 내! 내 역린을 어떻게…!]
“허억, 다행이다. 통했구나.”

사실 나는 봉술보다 검술에 더 소질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차라리 암살같은 것에 특화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봉술을 쓸 때보다, 나이프를 쓸 때 손놀림이 월등하게 달라지는 기분이 드니까 뭔가 묘했다.
날이 상하지 않는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나도 검을 쓸 텐데.


[…죽일 셈이냐? 죽여도 된다.]

공기가 서늘해진 밤. 그녀는 울부짖다가 지쳤는지 결국 고통에 숨을 허덕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뽑아낸 나이프를 잡고 그녀를 내려다 볼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서 마무리를 지으러 온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포자기한 상태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숨을 끊을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따지면 그녀의 집을 더럽힌 것은 나였고, 나는 죽지 않았을 뿐이었다.
남의 집을 흙 묻은 신발로 더럽혀놓고 상대방이 화를 냈다고 복수하는 그런 철면피는 아니었다.

[…?]

한참을 지나도 내가 그녀를 찌르지 않고 숨을 쉬기만 하자, 그녀는 실눈을 떠서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찌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눈을 온전히 떴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럼 대체 왜.]
“미안해. 내가 먼저 잘못한 거니까.”
[…….]
“네가 다른 용사나 마족들에게 무슨 원한이 쌓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일에 대해선 사과할게. 그러니까 조금은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무작정 죽이기만 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아.”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입안에 가득 맴도는 피 맛을 느끼며 기침을 토해냈다.
그렇게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이상한 녀석이야. 내가  인간 중에서 너는 가장 이상하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무언가 말을 시작했다.
어차피 어디 돌아갈 수 있을  같지도 않으니,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약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강해져 있고.]

그녀는 내가 떨어뜨린 나이프와 한쪽에 떨어뜨린 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에 내 몸을 향했다.


[죽었다 생각했는데, 살아나는  보아 흔해 빠진 초재생 능력인가 싶었다. 그런데 숨이 멈추었는데도, 다시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내 가슴을 보며 말했다.
그녀도 몇 번이고 나를 죽인 후에 알게 된 건지, 내 몸을 특이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나를 벌하러  신인 건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뭔가를 짐작하는 듯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날 바라지 않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조차 나를 버렸고,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 드래곤들이 모이는 둥지로 갔을 때는 난 반쪽이라고 내쫓겼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철저하게 외톨이였다.]

그녀는 고해성사라도 하는 건지 천천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읊기 시작했다.
쌓인 것들이 많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이 실려 점점 떨려갔다.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하나, 둘 치더니 결국 감정에 거대한 해일이 일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로 잠겼다.

[아아. 나는, 나는 정녕 태어날 필요가 있던 존재였던 건가? 나는 홀로 살아가려 하는 와중에도, 결국 죄를 범한 거겠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건가.]
“아니, 아니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뭔가 하소연하고 싶었던 게 있는 거겠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이렇게 토로하면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뭐, 완전히 못 알아들을 말은 아니었다. 전에도 리타에게서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신이 아니야. 평범한 인간이야. 뭐 용사랑 같은 고향에서 왔다곤 했지만, 용사도 아니었고 그냥 낙오자였어.”
[…….]


그녀와 같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버림받은 그녀의 기분 정도는 짐작해줄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말을 듣고 어느 정도 마음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대로 동이 트는 대로 나를 놓아주었으면 좋겠다.


[낙오자라.]
“먹어본 너로서는 알겠지만, 몸에 마나는 넘쳐흘러도 마력 하나 없어서 모험가 카드 하나 만들지 못해. 그러다 보니 그룹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일상이지. 애초에 용사가 아니라고 버려진 걸로 치면, 너의 마음 정도는 아주 조금 이해해줄 수 있어.”
[너…는.]
“그래. 네가 얼마나 살아왔고, 무슨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깊이는 알지 못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는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냐? 나는 이렇게 의미 하나 찾지 못했는데.]

그런 질문은 수없이 해왔고, 들어왔다. 자살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에게 수없이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이전 세계에서는 무책임하게, 태어난 김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조금씩 다른 욕망들이 줄을 지었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자살하고 싶어 한강을 찾았을 때.
나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흘려보냈던 말.
사실 죽고 싶다고 하기 이전에, 더 잘 살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구와 비교할 필요 없이, 나는  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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