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episode3. 소동 (7)
“성하! 전에 알던 사이라 예를 갖추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동료 건은…!”
“아니, 리타. 가만히 계세요. 제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에요.”
리타가 내게 성큼 다가와 성을 내자 공주는 그것을 제지했다.
역시 리타가 성을 내니까 위압감이 다르다.
위축된 내가 공주를 힐끔 바라보자, 공주는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이건, 제 책임이니까요. 제가 책임을 지게 해 주세요. 몇 번이고 고민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어요. 제가 당신을 죽게 한 사실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한쪽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감정에 호소하듯이,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당신이 낙오자로 불린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당신이 소환자라면 마왕을 잡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아요.”
비장한 눈빛으로 입을 여는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지팡이를 바닥에 한 번 내리쳤다.
리타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나와 공주를 번갈아서 보고 있었고, 세라는 무슨 일인지 몰라 그냥 옆에서 앉아 있었다.
아니,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구나.
“그러니까. 제가 책임을 지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말해도 곤란….”
“성하! 저도 공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성하 님! 저도 좋아요.”
“넌 뭔지 알고 이야기하니?”
동료가 늘어나는 것은 좋았지만, 그녀라는 사실에 어딘가 좀 꺼려졌다.
어쩐지, 여행 중에 리타 입에서 자꾸 셋째 공주 이야기가 나오나 했더니 이거였구나.
그녀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내 파티에 들어올 생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리타가 어제 잠깐 자리를 비운 것도 그 때문인가?
그녀는 자신의 지팡이를 양손으로 꽉 잡으며 애원하고 있었고, 리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박력있게 동의했다.
세라는 뭔가 재밌어 보이는 상황에 숟가락 한 번 얹어보려는 것처럼 팔을 쭉 뻗어 말을 보탰다.
“마족?”
“내 동료야. 마족 싫으면 다른 파티 알아보는 게 좋아.”
“아니에요. 현명한 선택인 걸요. 용사는 오히려 마족과 파티를 짜는 게 똑똑한 거예요.”
그녀는 파닥거리는 세라를 유심히 보더니, 지팡이를 겨누며 무슨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설마 공격하나 싶어 근처에 있던 봉을 꽉 쥐었는데, 그런 근심이 무색하게 세라의 머리카락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이 정도면 마족인지는 모를 거예요.”
“우와! 하얀색! 나 하얀색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후훗, 하얀색이 가장 어울려 보였거든요.”
세라는 신난 듯이 로브를 벗어 넘기고, 자신의 하얘진 머리카락을 나한테 자랑하듯이 흔들어댔다.
신나서 몸을 흔드는 세라를 보던 그녀는 쿡쿡 웃으며 리타를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리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서 그녀와 함께 미소 지었다.
“제 이름을 말 안 했군요. 제 이름은 엘리샤 델 테베레스. 테베레스 왕국의 제 삼녀. 앞으로의 여행에 잘 부탁드립니다. 성하라고 했던가요? 편하게 엘리샤라고 불러주세요.”
“…동료 결정인 건가.”
난 동의한다는 말도 아직 안 했는데, 이미 세라의 머리를 염색시켜주었다.
그러고서 동료가 된 것처럼 인사까지 나누니 내가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례가 아닐까 싶었다.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공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던 걸 생각하면 사실 구해지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더 큰 불행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원래의 세계가 지옥 같아서 도망친 끝에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근데, 성하는 카사노바인가요?”
“카사노바가 뭐야?”
그녀가 내민 악수를 받기 위해 일어났는데, 엘리샤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을 던졌다.
옆에서는 세라가 추가타를 넣고 있었다.
“아니, 어쩌다 보니….”
“흐응. 리타도 데리고 있고, 저기 귀여운 마족까지 끼고 있는데,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군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랐나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오히려 과거 영웅들이 카사노바 기질이 있던 거로 아는데, 그건가요?”
왜 엘리샤는 저렇게 친근하게 대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물에 빠졌을 때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초면이었다.
아무리 구해주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걸 인지해도 이렇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건가? 하도 혼자 있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 마음이 참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리타.”
“네. 공주님.”
“걱정하지 마. 리타가 있어서 설득이 가능했던 거니까… 리타도 편하게 대해줘?”
“그, 그럼 에리라고, 부를 게?”
“응.”
과거부터 친했다고 했던 게 진짜였는지, 벌써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엘리샤에서 에리가 되다니 얼마나 친했는지 짐작도 가질 않는다. 신분제가 없었다면 소꿉친구로 계속 지냈을 거 같을 정도로 가까웠다.
“성하 님.”
“왜?”
“머리카락 이쁘죠?”
옆에서는 세라가 신이 났는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ᅟᅵᆼㅆ었다.
아무래도 답답한 로브를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자신의 머리카락이 흰 색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들뜬 듯했다.
“그러네.”
조금 온화해진 분위기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이라니 눈총을 받을까 두렵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건 사양인데, 어찌할 도리도 없고 말 그대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엘리샤.”
“네?”
“아니, 그, 이렇게 따라와도 되는 거야?”
그녀는 환생자인 걸까.
그런 말은 차마 담지 못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그런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리타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니, 그녀는 아마 여기서 기억만 들고 다시 태어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엉망이 된 생각을 다듬으려 엘리샤를 불렀다.
“아아. 괜찮아요. 둘째 언니도 모험가 카드를 받을 정도로 호전적인 왕가거든요.”
“허어.”
지위를 들먹여서 돌려보내는 건 실패다.
리타나 세라와는 다르게 뭔가 꺼려졌다. 차라리 여기로 소환되기 전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조금 나았을 텐데.
괜히 기억이 돌아오는 바람에 그녀가 꺼려졌다.
리타에게서 들은 대로 선하고 아량 넓은 이미지는 있었지만, 어딘가 당돌한 모습에 조금 기가 눌린다.
애초에 리타고, 세라고 다 기가 센데, 엘리샤까지 기가 세면 나만 기 빨리는 거 아닌가. 어째 파티 선정이 잘못되어 가는 기분인데.
“드디어 4인 파티가 되었네요. 조금은 안정적이게 움직일 수 있겠어요.”
리타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가방을 고쳐매었다. 자신의 보상으로 자신의 친구인 공주님을 데려온 게 기분 좋은지 아까부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하 님! 성하 님!”
세라는 아까부터 머리 색이 바뀐 이후로 들떠서는 내 소매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성하 씨. 괜찮아요? 저한테는 죄책감 같은 거 안 가져도 된다구요. 저는 괜찮아요.”
엘리샤는 리타의 옆에서 가녀린 미소로 내 속을 긁었다.
모험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다른 용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 같이 기적적인 파티를 짜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나를 목 졸라 죽였던 사람. 나를 죽인 마족의 동생. 내가 구하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나와 함께 죽은 사람.
나는 뭐 죽음에 악연이라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품고 길드로 향했다.
“어? 고, 공주님?!”
“어!”
길드에 들어서는 순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반응했다.
아무래도 여기 현지인들은 엘리샤의 얼굴을 아는 눈치였다. 얼마나 대외 활동이 잦았으면 일개 모험가도 알아보는 걸까.
작은 감탄을 표하며 엘리샤를 슬쩍 돌아보자, 엘리샤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설마 우리가 대신 호위해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호위 같은 건 괜찮아요. 저도 왕가에서 배운 체술이 있거든요.”
“엑.”
뭐야. 독심술 같은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표정만 미묘하게 지으며 생각했을 뿐인데도 엘리샤는 눈치를 채고 내 생각에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낸 줄 알았다.
“어떻게 알얐냐구요? 척하면 척이죠. 삼녀로 살려면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한다니까요?”
엘리샤는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리타와 함께 창구로 우아하게 걸어가서는 자신의 모험가 카드 발급을 신청했다.
아무래도 공주라 그런지 VIP 대우를 받으며 일을 진행시켰다.
그새 직원에서 길드 부마스터로 바뀐 것도 참 볼만 했다.
길드 마스터는 광장에서 있었으니까. 부마스터가 좀 고생하겠거니 싶었다.
“짜잔. 백금이에요~”
“왕가는 백금을 받는 거였다니, 처음 알았어.”
“나도 처음 알았어.”
엘리샤는 그새 모험가 카드를 만들어왔다.
은보다 더 예쁘게 빛나는 백금의 테두리를 자랑하며 내게 보여주었다.
리타도 백금 테두리는 처음 보는지 엘리샤의 옆에서 감탄을 연발하며 신기한 듯이 눈길을 보냈다.
엘리샤는 그런 리타에게도 자세히 보여주겠다면서 슥 내밀며 헤헤. 웃었다.
“성하 님. 저도 모험가 카드 갖고 싶어요.”
“나도 없는데… 그래, 너라도 가지면 좋지.”
그렇게 엘리샤의 백금 테두리 카드와 리타의 황금 테두리 카드를 번갈아 보던 세라는 욕심이 났는지 내 소매를 꽉 잡아당겼다.
그리고선 전보다 강해진 완력으로 자기 가슴팍에 끌어안고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애가 떼쓰는 것 같아 더 난감했다.
나도 없는 걸 다 가지고서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우스웠다.
서로 카드를 구경하는 엘리샤와 리타를 뒤로 한 채, 세라의 손을 잡고 창구로 향했다.
“에리?”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 순간적으로 안색이 안 좋아져서 놀랬어.”
창구에 다다랐을 무렵, 뭔가를 떨어트리는 소리와 함께, 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돌아보니, 엘리샤의 안색이 잠깐 파래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지병이라도 있나. 이러다가 같이 모험 가놓고 쓰러지면 다 같이 손잡고 공개처형 당하는 건 아니겠지.
이거 파티가 좀 위태롭게 느껴진다.
저기 사이코패스 하나, 식인종인지 서큐버스인지 모를 마족 하나, 죽으면 다른 파티원까지 죽여버리는 시한폭탄 하나까지.
이래서 왕가를 안 좋아하는 건데, 시발.
애초에 소설이나 만화 같은데서 보면 괜히 왕가에 끼어드는 순간 정치 싸움이나 뭐 국가 전쟁에 참여하고 그러지 않나. 정치나 전쟁은 나랑 가장 안 맞는 이야긴데.
“저, 모험가 등록하시는 거죠? 어느 분 해드리면 될까요?”
“아, 죄송해요. 이 애로 해주세요.”
멍하니 엘리샤를 돌아보고 있던 탓에, 창구에서 직원이 난감한 목소리로 불러왔다.
아 맞다. 나 접수하러 왔었지.
민망함을 감추려 머쓱하게 웃으며 세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름과 역할은 어떻게 되니?”
“저, 저요? 이름은 세라 테리우스요! 역할…? 역할은….”
“탐색꾼으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아이를 대하는 상냥한 미소로 세라에게 이름과 역할을 물었다.
세라는 자신에게 질문이 날아올 거란 생각을 못 했는지 얼 타는 모습을 보였다가 이름만 겨우 말했다.
애초에 무슨 역할군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말해주면서 돈을 건네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드를 내밀었다.
“이곳에 마나만 주입해주시면 됩니다.”
“네엡.”
직원이 내민 카드에 손가락을 댄 세라는 “흡.”하고 숨을 참으면서 마나를 주입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라가 받은 모험가 카드는 테두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모험가는 F급에서 시작하니까 당연한 절차였다.
“성하 님… 왜 리타 님이랑 공주님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빛나는 테두리가 없어요?”
시무룩해진 세라는 침울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카드 테두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세라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자니, 그새 엘리샤가 다가왔다.
“그, 성하 씨. 이 애가 그렇게 걱정이라면 길드 특별 심사를 신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특별 심사?”
“가격이 조금 나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자신의 실력에 조금 자신 있다. 하면 이러는 편이 장기적으로 더 유리하구요.”
세라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내 손을 살짝 치운 엘리샤는 내 빈손에 돈주머니를 쥐어주면서 이야기했다.
얼마 들어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있는 편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저! 할래요! 심사!”
세라는 자신의 모험가 카드에 테두리가 생길 거라는 기쁨에 다시 텐션이 올랐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애처럼 소리 질렀다.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세라의 텐션을 전혀 따라가질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