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19] >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납작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대는 큰 절.
절을 받는 화신들의 눈이 크게 뜨인다.
"저기, 이게 무슨?"
한예지, 이하린, 김하은 등 내 화신들은 물론
나와 함께 있었던 친위대 금발남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
그야 근원을 흡수한다고 사라졌다가
갑자기 성좌 하나를 복종 시켰는데 놀라겠지.
보는 눈이 한 두개가 아닌데 바닥에 머리를 박는 성좌라니.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들이 몰린다.
하지만 일일히 설명하긴 귀찮지.
"불사르는 폭군께 바치는 물건이야. 성좌는 아니지만 드림 워커니까 쓸만할거야."
"물건, 입니까?"
근원을 자르고 쪼개서 반죽한 뒤 일부분만 내가 먹고 나머지는 재료 삼아서
늑대 인간을 만든 것 처럼 몽마를 만들었다고 말하면 누가 알아듣겠나.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산채로 분해되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근원이 분해 된 상태.
고문이 뭐 별거 있겠는가.
상대가 진심으로 싫어하는 걸
강제로 해버리면 그게 고문이지.
근원 속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팔 다리가 뜯겨나가고
그 뜯겨나간 팔 다리의 마력이 반죽처럼 빚어져서
새로운 자신이 만들어지는 걸 직관하던 추방당한 뱀의 심장.
문득 테세우스의 배가 떠오른다.
근원을 뽑아서 마력으로 반죽을 해 새로운 몽마를 만들면
이 녀석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일까, 아닐까.
'일단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나 새로 만든 몽마에 깃들었을까 걱정했지만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건지 깨진 근원 때문인지
새로 만든 몽마에 그녀가 깃드는 일은 없었다.
근원 속에서 본 안드로이드처럼 명령을 따르는 모습만 보여주니까.
"그래서, 문제는 창고에 있는 물건 배분인데…."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전부 정리된 건 아니다.
대륙이 난리가 났는데 그 후폭풍을 잠재워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많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히 내 창고의 배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한다.
몽마를 데려 가라니까 머리채를 쥐어 잡으려던 친위대와
인간이 된 감각을 만끽하느라 양손에 간식을 잔뜩 쥔 엘리스.
이 두 사람이야 말로 성좌 체포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봐야지.
문제가 있다면 나누는 방식이다.
"둘이서 조절할래?"
차라리 상금이면 반으로 갈라서 주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잡템이 한가득이다.
드워프가 두드린 강철 검과 이세계 관상용 식물 씨앗.
이걸 몇대 몇 비율로 측정하는 게 쉬울 리 있나.
원래는 주는 성좌인 내가 정해야 할 것 같지만
귀찮으니까 두 사람한테 떠넘겨야지.
그러나 길어질거라 생각한 협상은
친위대 금발남의 양보로 깔끔하게 끝나버렸다.
"아뇨, 제가 받아갈 건 이걸로 충분합니다. 애초에 제가 한 일은 몰래 성좌님을 따라간 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더니 멍하니 서 있는 분신체를 잡아 이끄는 그.
내가 무의식 속에서 근원을 다루는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풀었던 건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몽마를 데려간다.
불사르는 폭군이 내게 관심가지는 건
드림 워커가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으니
저걸 데려가면 귀찮은 일이 안 생기겠지.
생체 실험을 하던 고문을 하던 상관 없으니까
귀찮은 일을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범인 하나 잡겠다고 도시에 폭격을 하는 게 말이 되나?'
상식 밖의 미친놈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다.
불사르는 폭군 덕분에 절절히 느끼지 않았던가.
친위대 금발남은 복수를 끝마쳤으니 직장으로 복귀할테고
창고의 물품은 분신을 추적한 엘리스에게 하사하면 되고
생포된 화신은 이대로 마법사들에게 실험체로 넘겨주면 되겠지.
그러면 귀찮은 일 하나 없는 평온한 일상이 돌아 올 것이다.
※
갈색 나무 원목으로 아기자기 잘 꾸며진 아늑한 방.
카펫 같은 게 평소에 보던 동대륙풍 안방은 아니다.
그야 그럴게, 내 앞에서 뺨을 밝그레 붉힌 건
세 화신들이 아니라 인간 시절의 육체를 가진 엘리스였으니까.
"정말 괜찮아?"
"네, 넷!"
어깨까지 오는 기다란 갈색 곱슬머리.
그리고 콧잔등에 조금 박혀 있는 주근깨.
액체인 상태에서는 몰랐었지만
이렇게 자각몽 속으로 들어오니
외모 또한 준수하다는 게 눈에 보인다.
그녀와 내가 같이 자각몽 속에서,
그것도 침실 침대 앞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번 상품으로 걸었던 걸 그녀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성좌님이 아니라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성인이 되었지만 육체는 그대로 액체화 된 상태.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은 커녕 촉감도 못 느끼는 상황 아닌가.
이 와중에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건 나 하나 뿐.
뭐, 엘리스가 부끄러워서 조금 돌려 말했지만,
직설적으로 번역하면 성인이 되었으니 딱지 좀 떼고 싶다는거다.
물론 성좌인 내게 저리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고
최대한 빙빙 돌려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꿈 속이지만 인간의 몸을 되찾아서 그런 걸까.
뺨을 붉힌 그녀의 시선이 내 몸과 거울을 오간다.
남자의 몸도 궁금하지만, 몇 년만에 되찾은 육체도 궁금하긴 하겠지.
그 모습을 느긋히 바라보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주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거울 앞에서 제 뺨과 콧잔등을 슥슥 만져보고
머리카락을 베베 꼬기도 하며 스스로 조물딱거리던 그녀.
거울 속 자신의 어깨너머로 내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걸 보고 그제야 뒤돌아본다.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서대륙에 비를 내리던 신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물의 사랑을 받는 천재가 아니라
몽마 성좌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낸 풋풋한 아가씨일 뿐.
당연히 귀찮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온한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아 기쁘지.
아무 생각 없이 배부르고 등따시게 놀고 먹다가
화신들과 즐거운 밤을 보내며 꿈 속을 여행하는 것.
몽마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저기, 그러면-"
"꿈 속이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는 소녀.
내 화신들처럼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막 성인이 된 풋풋함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잘게 떨리는 손이 내 가슴으로 향한다.
어째 한예지도 그렇고 이쪽 세상 여자들은
다 남자 가슴에 먼저 손을 뻗네.
전생에 남자들도 다 여자 가슴에 손을 뻗었을까?
"와, 이거-"
그 와중에 가슴보다 단추 푸는 데 집중하는 건 좀 웃기네.
가느다란 손가락이 꼼지락대며 셔츠 단추를 풀어나간다.
손가락 끝에 와 닿는 플라스틱의 감촉이 신기한걸까.
그녀의 댕그란 눈동자가 드러나는 살갗이 아닌
조금씩 풀려나가는 셔츠에 집중된다.
'이 와중에 왜 자존심이 상하지?'
아까 먹은 근원 때문일까.
사고방식이 조금 더 몽마에 치우쳐지는 것 같았다.
내가 뭐 가슴 근육 운동하는 보디빌더도 아닌데
여자가 내 가슴에 관심을 안 가지니까 오묘한 기분이 들어.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떨쳐내고 눈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각 없이 몇 년을 지내는 건 어떤 기분이길래
와이셔츠 단추 감촉에 이렇게 입을 헤벌레- 벌리고 있을까.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 때문일까.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용기를 낸다.
"와, 단단해요…."
명치어림을 만지작거리다 복근 위를 지나
그대로 허리춤 아래까지 내려간 것이다.
나의 세 화신들보다 성적인 지식이 더 부족한지
신기한 물건 붙잡듯 덥썩 내 물건을 붙잡는다.
아마 현실의 남자였다면 바로 귀싸대기를 갈기지 않을까?
여기는 꿈 속이니까 별로 상관 없지만.
그런 걸로 잔소리를 하면 분위기가 깨지겠지.
그렇기에 허리춤을 붙잡고 바지를 벗기는 손길에
엉덩이를 살짝 들어 호응을 해 주었다.
"벗겨서 구경만 하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침착을 가장한 엘리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내 위로 올라타더니
뽀얀 제 살틈에 내 물건을 맞추고 그대로 주저 앉-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으려 들어서,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음, 뭔가 잘못 되었나요?"
최소한의 전희도 없이 그대로 쑤셔 넣는다니.
그러면 여자만 아픈 게 아니라 남자도 아프다고.
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수준인가.
그래도 전희와 애액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 중학생 때 몸이 액화 되었으니 성욕도 없어졌던건가?
느긋하게 누워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내 눈치를 본다.
달콤한 밤이고 뭐고 성교육을 먼저 하게 생겼다.
"이리로 와."
어정쩡한 자세로 눈치를 보는 엘리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여자 중에서도 작은 덩치에 손목도 가느다란 소녀의 몸.
근육 떡대는 아니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의 육체로
가볍게 안아들 수 있는 부드러운 몸이었다.
"자위는 해 봤어?"
그렇게 작은 여자를 품에 안고 이딴 걸 물어보다니.
뭔가 성희롱범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오묘해진다.
실제로는 갓 성인이 되었으니 새내기 대학생-
음, 이렇게 생각하면 또 OT에서 찝적대는 복학생같네.
"어, 아뇨."
그런 내 귓가에 들려오는 충격적인 이야기.
남녀 역전 세계인 만큼 자위는 해봤을거라 생각했는데.
중학생 무렵 액체화가 되었으니
성에 눈뜨기 전에 몸이 날아가 버린건가?
그 상황에서 감각이 돌아와서 감각 자체에 집착하는거고?
쾌락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전희도 없이 그대로 쑤셔 박을 뻔 했네.
그런 고통스러운 섹스는 전혀 취향이 아니다.
"그래? 그러면 처음부터 알려줘야겠네."
품 안에 작은 몸을 가둬놓은 채
손가락을 슬그머니 아래로 보냈다.
갈색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음모가
손가락 끝에서 바시락바시락 기분 좋게 흐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