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6화 > (166/169)

< 166화 >

세상에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천재들이 존재한다.

전생에 인터넷에서 자주 본 존 폰 노이만 같은 천재들은

9살에 미적분을 마스터 했다는 이야기를 봤었지.

나는 9살쯤이면 ABCD 외우고 있을 시절인데 말이야.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와 미적분을 마스터하고 정수론을 공부하는 아이.

이론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격차지만 세상에는 하나쯤 존재하는 천재.

그리고 그런 천재들만 모아둔 세상.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성역의 스크린을 조금 움직여   내 화신들과 엘리스가 있는 아카데미 대신

화면을 좀 더 축소하고 축소해서 서 대륙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

서 대륙에 나흘 내내 비가 내린다.

"으음, 아직이네요."

주룩주룩 굵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장마비는 아니다.

마치 분무기로 뿌리는 것처럼 은은하게 내리는 가랑비.

자연적으로 서 대륙에 장마철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엘리스가 서 대륙 도시에만 비를 내리게 만들고 있었다.

"서 대륙을 전부 감시하는 거야?"

"대륙 전부는 아직 힘드니까, 유흥가가 많은 수도권과 주요 도시에만 뿌린 거예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니고 원래 내렸어야 할 비구름을 미리 끌어당겨서 자극했죠."

엘리스와 내 화신들이 대화를 나눈다.

내게 큰 도움이 될 화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이랑 얼싸안고 펑펑 우는 걸 봐서 그런지

자기들보다 조금 어린 엘리스를 동생 대하듯 잘 돌봐주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조기 졸업을 한 게 중학생 무렵이고

중학생 시절부터 이제 막 성인이 된 지금까지

감각이 전부 사라진 채 지냈던 건가.

새삼 부모님 품에서 울던 이유가 납득이 된다.

물의 마력을 다루는 재능과 어른스러운 의젓함은 다른 분야지.

"주요 도시? 와 세상에."

마력이 아닌 저격에 소질이 있는 한예지는 신기하게 바라보지만

제사 마법에 소질이 있는 이하린과 마력 감응에 소질이 있는 김하은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멍하니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비구름을 자극했을 뿐이예요~ 라고 말하지만

그녀들이 지금 자리 잡은 곳은 아카데미다.

세상의 중심에서 서쪽 대륙의 비구름을 마력으로 자극했다?

당장 성좌들의 권능도 범위가 그 정도까지 넓지는 않을 텐데.

그와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도 생겼다.

이하린이 걱정 하기를, 어중이떠중이가 붙잡으면

불사르는 폭군의 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처음에는 잘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되었다.

무려 불사르는 폭군이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린 수배범이다.

중간에 내가 껴 있기는 하지만 내 이름값은 거의 없으니 패스.

직접 악플을 달거나 정면으로 깝치는 년은 없겠지만

결국 일반 시민들이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다.

시골 길드 존 스미스(38세, 처녀)가 잡아올 수준이면

왜 불사르는 폭군이 직접 잡지 않고 이 난리를 쳤을까?

시골 길드 아지매가 잡을 수 있는 걸 왜?

하지만 엘리스가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 대륙에 비를 부르는 소녀.

그 정도 급이 돼야 잡을 수 있다는 게 되니까.

그녀가 붙잡지 못하면 어처구니없는 설레발이 되겠지만-

"아, 찾은 거 같은데?"

"벌써?"

"텔레포트는 아닌데, 마력 반응 없이 갑자기 생겨난 여자가 있어요. "

아마 김칫국 드링킹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화면 속에서 물의 사랑을 받는 소녀가 씨익 웃는다.

물의 마력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그 빗속에 있는 마력을 전부 파악한다니.

역시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재능이었다.

옷자락도 적시지 못할 가냘픈 가랑비.

피부를 촉촉하게 만드는 물안개 속에서

청춘을 불사르는 사람들은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다.

3부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음악에 맞춰 골반을 튕기고

찢어진 청바지에 체인을 주렁주렁 매단 여자들이 침을 꼴딱 삼킨다.

사냥감이라곤 없이 사냥꾼들만 모여 이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욕망 가득한 눈동자들.

'어질어질 하네.'

성욕과 관련된 감정이 과하게 풍기다 보니

공기가 끈적하게 콧구멍에 달라 붙는 기분이 든다.

이곳이 그런 곳이니까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클럽과 사창가가 모여 있는 서 대륙의 한 작은 도시.

심지어 사창가 뒤쪽으로 몇 블럭만 가면 바로 슬럼가였다.

약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모를 사람이 보이지만

성욕에 취한 이들의 눈에는 어두운 골목 보다는 밝은 클럽만 보이리라.

이런 곳에 남자들이 잔뜩 모이는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클럽 자체가 성좌의 가호를 받은 클럽이라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라 했던가?

성좌의 이름으로 유혹은 있되 강간은 없는 유흥가.

일탈을 꿈꾸는 남자들이 안전하다는 이유로 호기심에 찾아오니

남자가 고픈 여자들도 저절로 끌려 오는 것이다.

그래, 여자들.

'이 새낀 진짜- 한결 같다고 해야 하나?'

가랑비보단 물안개에 가까울 정도로 얕은 빗줄기.

그 촉촉한 감촉 때문에 한 손으로 이마를 스윽 쓸어닦으며

앞머리를 치우는 동시에 얼굴을 드러냈다.

엘프도 근육남도 아닌, 지난번 준비했던 아이돌상의 아바타.

번쩍거리는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시선이 몰려든다.

음욕과 질투, 박살 난 자존감이나 멸시, 비방과 열기.

그사이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

'어떻게 몽마가 몽마를 못 알아보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보내는 시선이었다.

베이지색 3부 반바지에 헐렁한 나시티를 입은 남자가 곁에 있었지만

최면으로 대충 꼬신 남자인지 손을 휘휘 저으니까 인파 속으로 슥 사라진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아니던가?

'이 새끼 지금 날 꼬시려고…?'

번잡하고 시끄러운 유흥가에서 시작된 추격전이

슬럼가의 어둡고 조용한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액션 영화 같은걸 상상하면서 왔는데.

아니면 눈이 마주치자 마자 지난번 처럼

겁먹고 쫄아서 아바타를 바로 버리는 것까진 생각했지

이렇게 나를 꼬시려고 들 줄은 몰랐다고.

주변에 있는 남자들 중 가장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긴 하지만

갑자기 미남이 나타났다고 보지부터 벌릴 생각하는게 정상인가?

'하긴, 정상인이면 불사르는 폭군의 예비 친위대를 안 건드렸지.'

욕망에 휘둘려 1차원적인 행동을 하는 여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내 앞에서 씨익 웃는다.

"안녕, 도련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놀러 온 거야?"

아가씨의 반대라 도련님인걸까.

처음 보는 얼굴이라니, 죽돌이 코스프레인가.

클럽에 놀러 왔지 일하러 왔겠는가.

아니꼬운 마음이 가득해서 그런지

입을 한 번 열었을 뿐인데 짜증이 몰려온다.

이런 병신 하나 때문에 그 난리가 났다니.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

말을 거는 척, 몽마의 마력으로 남자를 홀리는 건가.

평범한 남자라면 이때부터 꿈을 꾸는 기분이 되겠지.

잠깐의 일탈로 놀러 온 클럽에서 꿈에서 보던 공주님을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져 그대로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같은 이야기.

꿈에서 깨어나면 여자의 흔적따윈 없어서

술에 뭐가 들어 있었나? 하고 의심하며 잊어버릴 그런 일.

"조용히 하고, 따라와."

내가 몽마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그렇게 즐겼겠지.

허벅지에 감기는 팔뚝이 익숙하다못해 능숙하다.

슬금슬금 허리춤과 엉덩이를 더듬는 음흉한 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희롱한 건지 모르겠네.

'근데 이 거리에서도 진짜 못 알아본다고?'

불사르는 폭군이 준 지식의 차이인지

아니면 몽마로서의 근원 섭취 차이인지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이 닿는 거리에서도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한국 민속놀이의 클로킹 유닛이 떠올랐다.

탐지 유닛이 없으면 지옥을 맛보게 만드는 클로킹 유닛이지만

탐지기 하나만 뜨면 빌빌거리며 급격히 약해지는 녀석.

자기 마력이 절대적인 줄 알고 마음을 놓고 있겠지.

이번에 놓치면 성역에 꽁꽁 숨어 버리려나?

"네에-"

"그래, 그래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녀석의 품에 안겼다.

키가 비슷해서 안겼다기보다는 팔짱을 낀 상태가 되었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주변 여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만끽하며 천천히 걷는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고 몸을 더듬는 손.

농담삼아 말했던 일이긴 한데,

진짜 최면물 떡인지의 주인이랑 다를 게 없네.

물론 불쾌감은 없었다.

살이 뒤룩뒤룩 찐 추녀라면 모를까,

첨단 과학 기술로 미용 하나는 제대로 해 둔 외모였으니까.

성격이 좀 나빠 보이는 눈매는 호불호가 갈린다 쳐도 미녀는 미녀.

거기에 내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울려주는 이유가 있었다.

'마력, 확실하게 담아 둬야지.'

이 새끼, 최면을 걸려고 마력을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이걸 엘리스의 근원에게 했던 것처럼 내 마력으로 통을 만들어서

제대로 흡수해 두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를 해서 봉인을 하도록 만든다던가

성역에 일방적으로 침입할 수 있게 한다던가

성좌 인생을 완전히 끝내버릴 방법이라던가.

연구 자료로 써먹을 수 있겠지.

'3일 전에 북 대륙, 2일 전에 동 대륙, 어제는 남 대륙, 오늘은 서 대륙이라니. 시계 초침 같은 년.'

4일 내내 비가 내리게 한 엘리스도 대단하지만

대륙별 보지질 순회하느라 서 대륙에 온 이 새끼도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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