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몽마가 되고 나서 이렇게 힘들게 움직인 적이 있었나?
팔다리에 족쇄라도 매단 것처럼 사지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수영장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달리기를 시도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두꺼운 솜이불 몇 겹으로 둘둘 말려서 짓눌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줄기에 진흙이 씻겨나가듯 내 마력이 밀려난 건가.
엘리스의 무의식 속에서 다시 한번 마력을 온몸에 두른다.
다이버의 산소통이 고갈되듯 줄어드는 마력이 느껴진다.
'뭔, 진짜 물 밖에 없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물.
그러니까 냇가나 호수, 바다가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모든 시야가 물로 가득 차 있다.
굳이 따지자면 바다에 가라앉는 꿈이라고 봐야 할까.
위에서는 햇빛이 내리쬐는지 빛이 반짝이고 있고
아래쪽에는 빛도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심해가 보인다.
'이 물이 전부 마력이라니… 뭐 이런 게 다 있지.'
며칠만에 대단한 양의 마력을 모은 김하은도 재능이 있지만
이 정도의 마력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김하은이 어느 명문대에서 중요 논문을 서술한 박사라면
엘리스는 어린 나이에 노벨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 같은 느낌.
매 달 천재들이 입학하는 아카데미에서
몇 년이고 이름을 남긴 화신이니 당연하려나.
햇빛이 비추는 저 위쪽을 바라보자
형형색색의 거품들이 파도에 넘실거리는 게 보인다.
저게 엘리스의 무의식 속에 잠든 기억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엿보러 온 게 아니니까
몸을 돌려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으로 움직였다.
저 어두컴컴한 심해의 바닥으로 향해야 무의식 너머
인간의 근원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심해공포증을 유발 할 정도의 마력이
나를 적대시 하지 않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잠수부가 산소통과 다이빙복을 입듯
마력을 둘러야 겨우 움직일 수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고.
수면 밖에서 물속으로, 물 속에서 심해로.
더욱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 깊고 깊은 심해로 가라앉았지만
목적지를 잃고 헤매는 일은 없었다.
'저건가? 대놓고 보이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심해 속에서
수면 위의 태양처럼 빛나는 진주가 있었으니까.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는데?'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여제자의 근원.
그곳은 굳이 따지자면 좀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김하은이랑 여제자가 거기서 대련을 했지.
하지만 엘리스의 근원은 정반대다.
역류해서 육체까지 흘러 넘칠 정도로 많은 마력이
빈 공간이라고는 하나 없이 꽉꽉 채운 상태니까.
'최대한 작게-'
이 안에 가득한 마력을 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근원만 살짝 건드려야지.
떠올리는 것은 비눗방울, 아니 공깃방울.
우주비행사의 헬멧과 비눗방울과 어항을 떠올린다.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둥그렇게 모양을 낸 마력.
마치 형광등에 커버를 씌우듯 천천히 근원을 감싼다.
꾸드득- 하고 불안 불안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몸에서 진이 빠질 정도로 마력을 투자했기 때문일까?
다행스럽게도 밝게 빛나는 근원을 완전히 코팅할 수 있었다.
'밀려서 녹아내리는 건가?'
연보라색 보호막이 마치 발포비타민처럼 녹아내려
천천히 어두운 심해 속으로 풀려나가는걸 보면
이 보호막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하네.
그래도 마력은 거의 다 썼으니 어쩔 수 없지.
목덜미를 낚아채여서 끌려가는 짐승,
그리고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생각하며
어둡고 컴컴한 심해 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위로 상승했다.
'설마 잠수병 같은 게 걸리지는 않겠지.'
아직 근원을 완전히 고쳐 줄 수는 없어서
내 마력으로 속이는 게 고작이니까.
※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베이컨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게 조금 적응이 되지 않지만
고소한 빵 위에 올려진 베이컨과 반숙 계란이 포크에 눌리는 모습은
식사가 딱히 필요 없는 성좌라도 식욕이 저절로 생기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먹을 수 있니?"
"…응, 아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앞치마 차림의 중년의 남성.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꾸욱 깨물고 있는 중년의 여성.
그리고 포크를 들어 빵을 꾸욱 잘라 내는 소녀 모양의 액체.
덜덜 떨리는 손이 작게 잘린 베이컨과 계란을 찍어 입술로 가져간다.
그 와중에 노른자가 뚝뚝 떨어지고 음식이 흩트려지지만
엘리스도 그녀의 부모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그마한 입술 속으로 포크가 쏘옥 들어간다.
마치 뜨거운 물에 들어간 설탕처럼
바스라지며 사라지는 음식 조각.
하지만 평소의 그녀가 느끼던 것과 전혀 달랐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익숙한, 아니 익숙했던 맛이 느껴질 테니까.
"맛, 은, 여전하네."
"아,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투명한 육체도 그대로, 사라진 감각기관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녀는 눈으로 앞을 보고 혀로 맛을 느끼며
귀로 소리를 듣는 둥 잃어 버린 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시적이지만 내가 그녀의 근원을 속였으니까.
속였다고 해야 할까, 근원에 인간의 자각몽을 심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간에 마력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인간의 감각이 유지되리라.
"이런 와중에 말하기는 조금 미안하지만 영구적인 치료는 아니야."
"괜찮아요, 성좌 님. 그래도 방법이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요."
부모의 품속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가
눈물을 스윽 증발 시켜 버리고서는 의젓하게 말한다.
감각을 확인하려고 껴안고 서로의 뺨을 만져 보는 둥
진정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울먹거리는 그녀의 아버지와 고개를 푸욱 숙이는 어머니와 달리
엘리스는 그녀가 왜 아카데미에서 유명했던 화신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몽마의 권능으로 제 근원을 건드리셨다고 하셨나요?"
"그래, 그리고 이건 완전한 조치가 아니야."
이미 방문 앞에서 니미씨발애미씨펄 거리는 걸
경비들은 물론 손님들에게도 들켰으니 말투에서 힘을 뺐다.
수인족도 화신들도 왜 이리 귀가 좋은지 문밖에서 혼잣말을 다 들어 버리네.
조신한 말투는 화신들 자각몽 속에서나 쓰면 되겠다 생각하는 중
배시시 웃는 엘리스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내뱉는다.
"몽마, 몽마라서 근원을 다룰 수 있다…. 혹시, 이번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추격하는 이유도 그때문인가요?"
"으음, 조금 다르지만, 맞긴 맞지?"
추당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서 예비 친위대의 복수하면
그 대가로 불사르는 폭군이 드림워커의 지식을 보내준다.
나와 불사르는 폭군 사이에서 대충 정해진 암묵적인 거래였지만
성좌간의 거래를 잘 모르는 엘리스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나보다.
수제 베이컨이 달다고 질질 짜다가 아빠한테 등짝을 맞던
철부지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입을 연다.
"그러면 제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 와 근원을 뽑아낸다면, 혹시 완치도 가능할까요?"
"…장담은 못 하겠네."
아마 엘리스는 내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먹으려고 추적하는 줄 아나 보네.
하기야 화신을 잡는 것도 아니고 성좌가 성좌를 잡으려는 게 유례 없는 일이긴 하지.
서로의 성역에는 간섭도 못 해, 직접 강림한 거 아니면 죽여도 대부분 아바타니까.
희귀한 몽마끼리 서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으니 다양한 억측들이 나올 수밖에 없구나.
약간의 오해가 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장담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 보다는 훨씬 나아질거야. 육체를 돌려 받지는 못해도 감각을 돌려 받는다던가."
아마,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내 능력도 한층 더 강해질 테니까 치료도 더 잘되겠지.
반쪼가리 몽마인 상태에서 다른 몽마를 잡아먹어
온전한 몽마가 되며 근원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
동족 포식에 가까운 행위지만 뭐 어떠랴.
통조림 한 캔을 위해 사람 서넛도 죽여 본 몸이다.
내 초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범죄자를 죽이는 걸
무섭고 꺼려진다고 징징거리기엔 겪은 일이 많지.
우주 전쟁이 등장하면 핵폭탄으로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근원 싸움은 하지 않으려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든 근원만 뽑으면 되려나?'
하지만 눈앞에 있는 천재 소녀는 다른 생각하게 만든다.
몽마가 아니면 근원을 못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냥 종족 특성 상 효율이 안 되니 마력이 부족했던 거야.
반대로 말하자면 존나게 넘쳐나는 마력이 있다면
몽마가 아니더라도 근원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거지.
눈앞에 있는 엘리스가 그 예시 아닌가.
마력이 넘치고 넘쳐서 제 근원까지 건드려 버린 산 증인.
"그러면 제가 잡아올게요. 치료만 된다면 창고의 물건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얘는, 성좌 님 앞에서 무례하게!"
자기가 잡아 오는 게 확정 된 것처럼 오만하게 말하는 소녀.
아니, 능력이 있으니까 오만이라고 부르긴 좀 그런가?
아무튼 그 건방지다면 건방지고, 호기롭다면 호기로운 모습에
여태까지 눈물을 닦던 엘리스의 아버지가 등짝을 쫘악! 후려친다.
"악, 아빠앗!"
"어, 어어?"
제 감각이 돌아온 것에 적응하지 못하던 엘리스가
화들짝 놀라자 마치 파도풀처럼 출렁거린다.
액체로 된 육체는 그대로라 그런지 물이 좀 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