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밀려오는 짜증을 가라앉히고 세 화신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도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울 정도로
막나가진 않는지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셋.
그러더니 가장 늙어보이는 노인이 먼저 입을 연다.
"흠, 안녕하십니까, 성좌님. 저는 남대륙의-"
딱 봐도 인디언 주술사처럼 생긴 노인은 남대륙 출신.
온 몸에 문신을 새긴 여자와 액체 여자는 서대륙 출신.
당연하게도 그들이 온 목적은 창고 속의 물건 때문이었다.
그래도 동대륙과 북대륙 출신은 없는데
혹시 폭군과 검의 눈치를 보는 걸까.
셋과 동시에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두 여자가 자기 소개를 한 뒤 다른 방으로 간다.
신경이 곤두선 수인 경비들에게 포위 된 상태로.
"그리하여, 제 성좌이신 비바람을 견디는 독연께서 거래를 원하십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평소라면 숙소 안으로 들어오라 말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차라도 한 잔 마시겠지만
근원의 문제인지 날카로워진 성깔이 그런 유순한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문 앞에서 공손하게 노인이 말한다.
남대륙의 주술사 성좌가 원하는 건
내가 창고에 박아 둔 짐승 뼈 목걸이.
보석 목걸이도 차고 다니지 않는데
한 뼘 길이의 뼈 목걸이를 차고 다닐 리 있겠는가.
나는 그게 괴악한 패션 목걸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행운을 기원하는 부적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래서, 잿바람 송곳니라는 물건을 받아가면 뭘 줄 수 있는데?"
"부끄럽게도, 저희들은 몽마께서 뭘 원하실지 모르는지라-"
싯누런 이빨을 씨익 드러내 보인 노인이 품 속에서 뭔가 꺼낸다.
요란하지만 허름한 복장과는 전혀 다른 고풍스러운 두루마리.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라니, 좀 신기하긴 하네.
가죽 두루마리 안에는 별의 별 물건이 다 적혀 있었다.
남대륙에서 한정판으로 판매되는 귀한 나무로 만든 가구부터
주술과 마법을 엮어 만든 드림 캐쳐 등 몽마에게 도움이 될 장신구,
심지어는 자신의 주술사를 이하린의 연구실에 보내겠다는 계약서까지 있었다.
물론, 받아 들일 일은 없다.
"재미 있어 보이는게 많지만, 내가 선물로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날이 선 반응에도 노인은 허허롭게 웃는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낸다.
품 안에서 나온 것은 뼈와 깃털 대신
보석으로 치장되고 금줄을 엮어 만든 드림 캐쳐.
몽롱한 눈이 된 노인이 느릿하게 입을 연다.
아까보다 훨씬 명확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물론, 그 점은 잘 알고 있지. 내가 원하는 것은 거래의 우선권일세. 창고를 받아가는 이가 나오지 않게 되거나, 창고를 양도하고 나서 또 치료비로 귀한 물건을 얻게 된다면 이 늙은이를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바치는 뇌물일세."
"그런 의미라면 상관 없어. 이건 어디에 쓰는거야?"
"자네 화신에게 건네주면 알아서 잘 써먹겠지."
흰자 없이 새카만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다시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돌아온다.
주술사라더니, 강림해서 대신 말도 하네.
강림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노인은 그대로 떠났다.
주머니에 넣기엔 좀 커다란 드림캐쳐와 가죽 두루마리를
숙소 안쪽에 대충 집어 넣고 기다리니 옆 방에서 문신녀가 다가온다.
수인족 경비들이 한 명씩 보내는 걸까.
두 번째로 온 문신녀도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거래를 하자고 강짜를 부리는 무개념은 아니네.
치료비를 명목으로 희귀한 물건을 보낸거니까
선물이 아니라서 거래를 해도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겹치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고, 자기 화신이 다칠지도 모르니
눈도장을 찍어 두겠다는 의미의 선물을 주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으음, 너는."
"네에, 정령체입니다."
눈 앞의 소녀는 물의 정령 같았다.
느끼하게 여자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정말 물로 이루어진 육체였으니까.
이쯤 되니 호기심이 짜증을 억눌렀다.
동물 귀 달린 사람이나 엘프, 늑대인간은 봤지만
이렇게 특이한 종족은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
"제 성좌께서도 원하시는 건 같아요."
노인이 원한 것은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장신구.
문신녀가 원한 것은 창고에 있는 식물과 염료.
하지만 눈 앞의 정령녀와 그녀의 성좌는
창고의 물건이 대신 눈도장을 위해 왔다고 솔직히 밝혔다.
물 계열의 사제 성좌인지라 육체의 치유는 완벽하지만
영혼의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생각해보니 이런 치료 관련으로 연락이 온 건
이 끝없이 흐르는 냇물이 처음이구나.
'근데 사제랑 정령이랑 무슨 상관이지?'
판타지 세상에서 물의 여신을 섬기던 사제.
육체의 외상을 치료해주는 물의 여신이 주류 종교였지만
역병과 기근을 다루는 마왕이 등장해버려서
힘도 못 써보고 멸망해버린 세상 출신이란다.
이야기를 들을 수록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절단되거나 으스러져도 치유 할 수 있는 사제랑
온 몸이 물로 이루어진 여자애랑 무슨 관련이 있는건데.
"그리고,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물로 이루어진 얼굴이 꼬물꼬물 움직인다.
게임 속 정령처럼 색상이 입혀진 것도 아니고
정말 투명한 물로 이루어져서 알아보기 힘드네.
"혹시, 저도 치료가 가능할까요?"
표정은 알아볼 수 없지만 감정은 느낄 수 있다.
목소리는 맑고 깨끗하며 분위기는 밝지만
몽마의 본능으로 느껴지는 건 끝없는 절망.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이 심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않고 기계적으로 던진 질문이다.
"치료라, 뭘?"
대답 대신 가느다란 손목이 내밀어진다.
이렇게 말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어쩌라는 거지.
눈치껏 손에 마력을 담아 손목을 잡아 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
"…?"
"뭐야, 근원이 왜 이래?"
깊은 곳에 꽁꽁 숨어서 무의식까지 들어가야 느껴져야 할 근원이
고작해야 손목을 잡았다고 제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유를 아시는 건가요?!"
기름을 뿌린 불씨처럼, 기계 펌프에 매달린 풍선처럼
그녀의 보잘 것 없던 희망이 부풀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
서대륙의 사제 성좌, 끝없이 흐르는 냇물.
그리고 그녀의 화신, 엘리스.
서대륙에서 철수와 영희마냥 좀 고리타분하고 흔한 취급의 이름이지만
흔해빠진 이름과는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천재 소녀.
어느 정도냐면, 내 숙소 경비원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알고 있었다고?"
엘리스를 데리고 치유동 쪽 빈 침상으로 향하자
경비들도 우르르 따라와 우리를 경호한다.
그러던 와중 넉살좋게 입을 연 경비원 하나.
"네, 몇 년 전에 아카데미를 떠들석하게 만든 아이니까요. 그래서 가장 나중으로 순서를 미뤘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김하은이 몽마의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있었듯이
엘리스 또한 물의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재능과 화목한 가족, 사제답게 자상한 성좌까지.
화신이 되고 나서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 줄 알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오히려 커다란 화가 되어 돌아왔다.
"재능에 먹히는 게 가능하구나."
"네, 뭐… 아카데미가 저거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까요."
뾰족한 귀를 팔락이며 수인 경비원이 말을 이어나간다.
이름도 못 들어본 온갖 성좌들이 전부 구경을 와서
아카데미 내부가 무슨 인터넷 채팅창처럼
무분별한 성좌의 메시지로 도배가 되었다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육체가 버티지 못하는 상황.
화신들이라면 조금 놀라고 말겠지만
이쪽 세상의 성좌라면 말도 안 된다며 무시했겠지.
재능이 넘치는 영혼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세상이다.
당연히 우리들 몸도 창조주가 만든 육체겠지.
그 육체조차 버티지 못한 재능.
물의 마력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역으로 넘쳐 흐른다.
마력이 몸을 통해 영혼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모인 마력이 육체마저 잠식하게 된 것이다.
근원만 존재하던 무(無)의 공간이 가득 차고
영혼의 한계까지 마력이 듬뿍 들어 찬 다음
역류한 마력이 육체까지 집어 삼켜버렸다.
그 결과가 액체로 이루어진 몸.
정확히는 마력이 액화되어 만들어진 몸이란다.
쉽게 말해서, 그녀는 의지를 가진 마력 덩어리였다.
내가 다루던 마력이 실타래,
김하은이 모은 마력이 극장가 거대 커튼이라면
엘리스에게 저절로 모인 마력은 방직공장 물류 창고 수준.
그 방대한 마력과 천부적 재능을 지닌 소녀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면, 일단 잠들어야 하는데-"
"자면 될까요?"
물로 이루어진 눈꺼풀이 물로 이루어진 눈동자를 덮는다.
그 신기한 광경에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던 경비들의 시선이 쏠린다.
수인들한테도 액체 소녀는 신기하게 보이나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육체의 복구.
정확히는 소실된 감각의 복원이었다.
그야 근원부터 내장에 피부까지 마력으로 녹았으니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이 싹 사라졌겠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지고 맛도 못 느낀다.
앞이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부모님이 손을 잡아줘도 느껴지지 않는다.
뛰어난 마력으로 주변을 초음파 탐지하듯 느끼니 상관 없지만
인간이었을 무렵 몸에 새겨진 본능은 사라지질 않는 것이다.
"아빠가 만들어준 에그 베네딕트를 먹고 싶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메이플 베이컨이랑 같이-"
심해에 뛰어들어가는 잠수부처럼 온 몸을 마력으로 잔뜩 감싼다.
치료의 댓가가 너무 달콤했으며 근원에 대한 연구도 가능할테니까.
첨벙-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