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3화 > (163/169)

< 163화 >

외모가 빼어나다 보니 시선이 모이고 여자들이 꼬인다.

그렇다 해도 강제로 뭘 어쩌려는 사람은 없다.

동대륙의 익숙한 거리에서 커피를 마셔도

남대륙에 놀러가 낯선 카페에서 처음 보는 음료를 마셔도

싫다고 하면 얼굴을 붉히고 슬그머니 물러나는 것이다.

이 쪽 세상의 인간들이 전생보다 성숙한 건 아니고.

"야, 야! 뒤좀 봐 병신아!"

"뒤가 뭐, 억!"

번호를 주지 않았다고 씩씩대던 여자가

내 쪽으로 성큼 한 걸음 내딛자 마자

등 뒤에 있던 일행이 급히 속삭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카페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으니 곧바로 들어온

신장 2m에 가까운 여인 때문이다.

"아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 쪽에게 묻는 게 아닙니다. 괜찮으십니까, 남자분?"

조금 불룩한 가슴팍을 제외하면 여성성이라고는 없는 완벽한 근육질.

숏컷보다 짧게 친 금발의 머리카락이 강한 눈나의 포스를 풍긴다.

근처에 있는 박동하는 사자심의 헬스장이 있던데 거기서   왔나?

"네, 아무 일 없는거 맞아요. 고생하시네요."

"아뇨, 뭐… 감사합니다."

슬그머니 도망치는 여자의 일행들과

배시시 웃는 내 미소에 얼굴을 붉히는 화신.

그 와중에도 창 밖에서는 몇 명이 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모두 화신이었다.

성좌의 명령을 받아서, 일확천금을 원해서,

성좌의 총애를 받고 싶어서, 몽마와 자고 싶어서,

라이벌인 화신이 체포하면 배가 아플 것 같아서-

셀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휴일을 반납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화신들.

하지만 그 많은 화신들이 전부 마력 추적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아주 간단하면서 무식한 방법.

"아무 일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남자를 밝히니까

트러블에 처한 남자를 보면 순찰을 빌미로 접근하는 거다.

헌팅에 시도하려고 길가의 남자들을 구경하던 여자들에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에게 접근하던 여자 일행들에게

그리고 말다툼을 하던 커플에게 화신들이 잔뜩 달라 붙는다.

그러다 보니 볼 거리가 넘쳐나네.

"저기이, 나는 그냥 차비가 없어서…."

"선생님, 제 차로 모셔다 드릴테니 일단 타시죠."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오자 마자

카페 근처 정류장만 봐도 그렇다.

주변 사람들 속닥거리는 소리와 감정을 읽어보면

젊은 사람들 많이 다니는 대학로에 계속 나타나

차비를 핑계로 돈을 구걸하는 노파 같은데.

꽤 자주 나타나는지 남녀 가리지 않고

젊은 학생들은 노파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신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늙던 어리던 일단 여자가 말을 계속 걸고

젊은 남자가 꺼려하는 반응을 보이니

수상하다 판단하고 곧바로 달라 붙는 것이다.

왜소하던 어깨가 더욱 왜소해 보일 정도로 움츠린 노파가

양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딱 봐도 비싸보이는 차에 올라탄다.

"와, 오늘따라 살벌하네. 뭔 일 있나?"

"너는 인터넷도 안 보고 사냐? 지금 화신들 전부 난리 났는데."

"어쩐지 동아리 애들이 갑자기 다 뛰쳐나가더라."

그 장면을 본 학생들이 피식 웃으며 지나간다.

남자에게 찝적거리지 않는 젊은 여성들,

거기에 화신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일종의 축제처럼 보이려나?

하기야 밀리터리 덕후 앞에 탱크 수 십대가 돌아다니고

아이돌 덕후 앞에 촬영하러 가는 아이돌 수 십명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눈을 빛내며 무슨 일인가 찾아보지 않을까.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부터 초대장을 피해 늦은 오후까지

동서남북 대륙을 관광하며 시간을 보냈으니까.

'슬슬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질리네.'

번호가 따이고 화신 구경도 한 두번이지.

반나절에 열 번 정도 반복되면 귀찮기 그지 없다.

동대륙 카페에서 달짝지근한 음료도 즐겼고

서대륙에서 혈관에 나빠보이는 포장마차 음식도 실컷 먹었다.

남대륙에선 여자들이 비키니만 입고 맥주를 뿌리는 축제에 참여하고

북대륙의 바이킹식 바비큐처럼 보이는 고기도 뜯어 먹어   봤으니까.

동대륙은 카페 창가에 앉았다고 번호를 따이고

서대륙에선 포장마차에서 취한 여자가 작업을 걸고

남대륙에서는 축제라고 슬쩍 접근해서 몸을 비비려 들고

북대륙에선 레스토랑 손님이 명함을 건네주며 추파를 던졌지만.

아무튼 색다른 경험이었다.

'전생에 들었던 연예인 썰도 아니고….'

문득 비행기 한 번 탔다가   스튜디어스들에게

양손 가득 선물을 받은 연예인이 떠오르는건 어째서일까.

이쯤 되면 그들도 참 피곤한 삶을 살았겠다는 생각이 드네.

느긋하게 노을이 지는 거리를 구경하며   성좌의 초대장에서 시작된 잡념이

잘생긴 연예인과 사생팬에 대한 생각까지 흘러간 것을 깨닿고 발걸음을 멈췄다.

해 뜨자마자 노을 질 때 까지 도망쳐 다녔으니까

눈치가 있는 성좌라면 거절의 뜻을 알아차렸겠지.

눈치는 봐야 하는 놈이 가지고 있는거였고.

성좌는 딱히 눈치를 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씨발년들이."

"네, 에?"

남자 직원 하나가 화들짝 놀라 눈을 댕그랗게 뜬다.

귀여운 여자도 아니고 통통한 남자가 애교 있게 구니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게 배로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한테

왜 눈을 그렇게 뜨냐고 화를 낼 수도 없지, 씨발거.

"저기, 찾아오신 화신분들을 다 돌려보낼까요?"

"아냐, 내가 간다."

매일 부드러운 말투로 그랬니, 알았단다 이러던 성좌가

인상을 찌푸리고 애미 애비를 찾으며 씨발씨팔 거렸기 때문일까.

서류 잡무를 도와주던 남직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새끼들은 염치란 게 없나?'

성좌라는 건 한 차원에서 한 명,

최후의 생존자를 데려와서 만든 존재다.

불사르는 폭군처럼 곱게 미친 성좌도 있고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명예와 신념이 굳건한 성좌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추방당한 뱀의 심장처럼

지들 좆대로 사는 성좌도 있다는 거지.

'살롱에 있던 새끼들은 입이라도 닫고 있었지.'

그 땐 엘프의 몸으로 방문했던가?

엘프를 성노예로 쓰는 판타지 세상 출신인지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을 걸거나 건드리려는 둥 행동은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부 성좌들은 그보다 한 술 더 뜨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좌들, 그러니까 귀족, 기사, 정치인, 기업인, 마법사 등

머리가 좋고 예절을 따지는 성좌들은 암묵적인 거절을 이해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남들이 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끝까지 질척거리는 성좌들은 남아 있는 상황.

"거기에 두고 나가."

"네, 네!"

후다닥 사라지는 직원이 내려 놓은 초대장들.

단순히 무시할 수 없는 초대장이라서 더 기분이 나쁘다.

한예지의 길드 계약건이나 이하린의 제사 마법 등

내 화신과 아카데미와 엮여 있는 성좌들의 초대장.

마음 같아서는 좆까라고 다 무시하고 싶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과하게 반응한다는 생각도 들어서 문제였다.

뭘 해달라고 부탁을 들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초대장만 보냈는데

귀찮다는 이유로 초대면에 쌍욕을 박아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세 번, 네 번도 아니고 권유 두 번 했다고 적대시 할 순 없지.

그 정도면 속 시원한 사이다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한테 염산을 뿌리는 사이코패스야.

만나고 나서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 때 대처하자.

하지만 만나러 가는 행위 자체가 너무 귀찮다-

이렇게 감정이 크게 요동치니 스스로도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게 벌써 두 번째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은 할 수 있었다.

'추방당한 뱀의 심장, 이 씹쌔기는 도움이 되질 않네.'

이전에 몽마 하나를 처치하고 그 근원을 삼켜서

반쪼가리에서 온전한 몽마가 된 이후에도 그랬으니까.

그 때는 스트레스 보다는 음습한 성욕이 과하게 들끓었지.

추방당한 뱀의 심장과 나는 몽마의 육체로 엮여

기묘한 마력의 연결고리가 생겨버린 상황.

아마도 몽마끼리는 서로의 근원을 자극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 이 더러워진 성질머리는 아무튼 그 새끼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 숙소 밖으로 향했다.

"성좌님!"

"무기력한 악몽님께서 나오셨군."

"아, 저분이?"

그래도 아카데미 쪽에서 거르고 걸러 준 결과일까?

숙소 앞에서 대놓고 기다리던 화신은 딱 세명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카데미에서도 말리지 못한 화신이라는거지.

불사르는 폭군이나 굴레를 베어내는 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들지 않는 거목보다는 윗선의 성좌들의 화신.

그래서일까? 눈 앞의 세 화신은 생각보다 독특한 외형이었다.

'아니, 저건 화신이 맞나?'

가죽 망토를 쓰고 부적과 동물 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노인.

얼굴을 비롯해 드러난 모든 피부에 문신이 가득 새겨진 여자.

그리고 슬라임인지 물의 정령인지 액체로 만들어진 소녀.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숙소 앞에서 은근히 기싸움중이던

수인족 경비 몇 명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하기야 성좌의 얼굴을 직접 봐야한다며 눈총을 받으면서도

남자의 집 앞에 자리를 깔고 경비랑 부대끼던 철면피들이다.

지난 번 아카데미 침입 사건에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수인족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는 게 당연하리라.

"안녕하십니까, 성좌님-"

"제 성좌께서-"

"성좌님께 인사-"

세 명이 동시에 입을 열고 말을 하다가

먼저 말하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노려본다.

그 어처구니 없는 모습에 나보다 경비들이

허,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내 심정을 대변해준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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