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2화 > (162/169)

< 162화 >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것은 돈이다.

금, 은, 건물, 땅, 통장에 새겨지는 커다란 숫자.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

희귀하고 희소하거나 가치를 매길 수 없지만 의미가 있는 것들.

전생에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하였고 위인들의 유품이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내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가장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돈이었다.

주먹보다 커다란 보석과 억 소리 나는 황금과 순은.

포인트고 뭐고 현금으로 바꾸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돈.

하지만 내 선언을 들은 화신과 성좌들이 주목한 것은

고작해야 황금과 보석 따위가 아닌 다른 물건들이었다.

돈으로도 감히 살 수 없는 타 대륙, 혹은 이세계의 물건.

예를 들어서, 창고 안에는 검 몇 자루가 있었다.

오리할콘이니 미스릴이니 하는 걸로 만든 것도 아니다.

포인트 상점에서 파는 장비처럼 스킬이 깃든 것도 아니다.

서 대륙에 자리 잡은 성좌, 모루를 두드리는 벼락이

판타지 세상의 제련법으로 손수 두드린 강철 검.

제사를 바쳐 포인트로 환산하면 고작해야 1,000pt 남짓.

그러나 그 누가 그걸 천 포인트짜리 잡품이라 무시를 할까?

최후의 생존자인 대장장이가 손수 제련한 검에는

이미 멸망해 버린 세상의 기술이 녹아내려 있는데.

기사 출신의 성좌가, 무림인 출신의 성좌가 눈독을 들였다.

다른 세상 출신의 대장장이도 관심을 가지고 선언한다.

"저 검을 가져온다면 두 개의 재능을 하사하겠다!"

"나의 화신이 아니라도 좋다! 검을 가져온다면 작위를 내리겠노라!"

"저 검을 바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직접 갑주를 맞춰주지!"

그리고 창고에는 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드루이드가 선물로 보내온 이세계의 씨앗이 있다.

무림인이 남자에게 좋다며 적어서 준 호신공의 비급이 있다.

연금술사가 직접 만든 이세계의 기초 연금 시약이 존재하며

마법사가 손수 새긴 이세계의 룬 스톤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사를 통해 포인트로 바꾸면 하잘것없는 가치를 지녔지만

지식을 원하는 자들과 허영심의 충족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감히 천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이세계의 물건들.

씨앗, 식물, 마법 촉매, 세공된 보석, 정력에 좋은 무공서,

가정용 에너지 카트리지와 초소형 발전기와 미래 합금.

소량이지만 포인트 상점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물품들.

"마력체를 추적할 수 있는 재능을 주마! 다른 도시까지 가라 명하진 않겠지만… 우리 도시에 그년이 내려온다면 절대로 놓치지 말거라!"

"드림워커 전용 구속구를 준비해주면 잡아올 수 있겠니?"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만큼

구경하고 있던 성좌들이 즉시 반응한다.

또한 성좌의 관심을 원하던 화신들까지.

그렇게 일반 시민들은 타락 성좌를 안주 삼아 이야기를 꽃피우고

화신들은 성좌의 총애를 받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순찰을 도는 동안

나도 아카데미에서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냥 비싼 물건들이겠거니 하고 걸었는데….'

솔직히 창고를 걸 땐 돈으로만 생각했다.

애초에 이하린도 돈으로 환산해서 말해주려 했으니까.

그러나 이쪽 세상 성좌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찔러 들어 왔다.

'이건 뭐 중계무역도 아니고.'

성좌와 성좌들 사이에서의 거래.

실력 좋은 제사 마법사가 왜 필요했던가.

제물을 포인트로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성역에 보내기 위해

아카데미까지 와서 거금을 지급하고 이하린을 찾아온 화신들.

무림인 성좌가 드워프 성좌의 검을 구매하고 싶다고 치자.

무림인 성좌 > 무림인 화신 > 드워프 화신 > 드워프 성좌

직접 대화가 가능하지 않으니 네 단계를 거쳐 전달해야 한다.

답장 또한 똑같은 단계를 통해 내려올 것이고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높다.

성좌가 되어서 뭐 아쉽다고 남을 위해 검을 두드리겠는가.

자기화신에게 선물로 주는 것도 아니고 팔아 먹기 위해서?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등장한다.

거래의 명분과 제사를 지낼 능력까지 가지고.

"성좌 님, 이번에도 초대장이 왔습니다."

"바로 부르는 성좌는 있었니?"

"아뇨, 대부분 성좌 님께서 편하실 때 방문을 요청하셨습니다."

드워프답게 은혜 갚는 일 아니면 칼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리고

무림인은 은원이 확실해야 하되 장사치가 아니라며 거래를 거절하고

푸른 피를 가졌는데 어찌 사사로운 거래에 손을 뻗냐고 투덜대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고 거래를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종족의 긍지니 명예니 하는 이유로 거래를 안하는 줄 몰랐지.

그 와중에 거래의 명분이 되는 내가 등장하니 바로 이 꼴이다.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초대장들.

밀랍으로 봉인된 고급 편지지부터   금실로 묶인 두루마리도 있고

새하얀 매가 물고 온 전서구나 날아온 마법의 수정구슬도 있었다.

"초대장은 잘 보관해 두렴. 다만 개인적인 거래는 없다고 아카데미 쪽에 전해 줘. 대의를 위해 내놓은 것이지 장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덧붙여서."

"네, 역시 그게 좋겠죠?"

그렇다고 해서 초대에 응하고 멋대로 놀 마음은 없다.

전생의 계급 사회에 이어 성좌로 추앙받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성좌들은 특유의 자존심 같은 게 있으니까.

지난번 갔던 살롱도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

거기에 아무리 치유비라지만 명목상 선물로 받은 물건들.

그걸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도 적을 만들 것 같았다.

애초에 포인트를 생각했으면 화신을 늘리고

무섭다고 우는 한예지를 다그쳐서 전쟁터로 보냈지.

몇 안 되는 애들이랑 느긋하게 꽁냥대려고

성좌의 삶을 시작한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니 좀 화나네…?"

성좌 이름부터 '무기력한' 악몽이다.

그저 마음 통하는 여자 몇 끼고 유유자적 놀고먹을 생각인데.

드워프랑 엘프라서 싸우고

기사와 귀족이라 뻐팅기고

무림인은 강호의 도리를 외치고.

지들 좆대로 자존심 부리다가

명분이 될 내게 매달리는 꼴이라니.

일단 나도 그럴듯한 명분을 핑계로 다 거절하긴 했지만.

'선물로 장사하기 싫다는데 지들이 어쩌려구.'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그러니까 도망쳐야지.

도망치는 건 익숙하니까.

와! 남녀 역전 세계!

여자 화신들에게 애지중지 아껴지면서

남녀 역전 세계에서 미남이 가지는 위상은 알았지만

그래도 아카데미 보다는 대륙을 노녀야 더욱 느껴지는 게 있다.

7부보다 3부 반바지에 익숙한 남자들이라던가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줌마들이라던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아저씨들이라던가

대충 흘려 보면 의미가 없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

"주문하신 콜드브루 라떼 나왔습니다-"

진동벨을 내고 카운터로 향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내 귀가 뾰족한 엘프 귀여서 시선이 몰리는 것은 아니고

커다란 근육질의 남성에게 보내는 시선도 아니다.

그냥 잘생긴 얼굴이여서 모이는 시선.

근육질의 아바타는 섹시 할리우드 스타에 가깝고

엘프 소년의 미래가 유망해 보이는 아역 배우에 가깝다면

지금의 몸은 호리호리한 미남의 몸, 아이돌 상에 가깝다.

"저기, 이건-?"

"아,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콜드브루 라떼 계열이 신상품으로 나온 거라서."

얼굴이 벌게진 여자가 횡설수설 대답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 쿠키에 담긴 감정이 얼마나 풍부한지.

그대로 생긋 웃으며 쿠키를 집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듯 변한다.

커피에 담긴 얼음을 휘휘 저으며 카페 창가에 앉는다.

물론 여자를 꼬시려고 새 아바타를 만든 건 아니고.

"오, 이번에도 시작이네."

"쟤들이 잡을 수 있을까?"

"글쎄, 좀 어렵지 않으려나. 성좌 님한테 지원을 받았으면 모르나?"

옆 자리에 앉아서 아메리카노와 시간을 보내던 여자들이 중얼거린다.

햇빛이 드는데도 창가 자리에 남녀 구분 없이 손님이 가득한 이유.

창밖으로 화신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기에는 없겠지?"

"왜, 니가 잡게?"

"설마, 화신도 아닌데 마력체를 어떻게 잡아."

"교양 마력 강의로 씹가능?"

"그게 되면 벌써 계약을 했지."

커피를 한 입에 절반 이상 쮸우웁 빨아버린 여대생이

옆 자리에서 노트북으로 과제 중인 친구에게 투덜거린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시선은 이쪽으로 몰래 몰래 향하는 게 보인다.

음흉함보다는 경탄심을 듬뿍 느끼며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

'어째 얼굴이 적당히 만들어지질 않네.'

꿈을 기반으로 만들다 보니 모 아니면 도의 결과만 나온다.

마력을 연습한다 하더라도 남자 얼굴 만드는 연습은 안 했으니까.

꿈에서 나올까 봐 무서운 못생긴 얼굴이 만들어 지거나

반대로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미남의 얼굴이 만들어진다.

아무리 나라도 화상 진물로 으스러진 투페이스 면상으로

마음 편히 도시를 돌아다니며 놀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미남의 얼굴을 고르는 거지.

그래도 성좌도 화신도 아닌 그냥 미남이라서

겁대가리 없이 카메라를 들이 대는 사람은 없었다.

"저기, 제가 그쪽이-"

"여자친구 있어요."

휴대폰을 들이 대는 사람은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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