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1화 > (161/169)

< 161화 >

개판이 된 인터넷 게시판을 외면하고

오늘 하루는 그냥 푹 자고 싶어서 침대에 처박힌 다음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내게 다가온 이하린이

어지간한 대백과사전보다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민다.

"…이게 뭐니?"

"방송 수익 배분 계약서입니다."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걸까?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헤메고 있을지도.

하지만 눈 앞에 들이밀어진 서류의 산은

무의식도 아니고 마력이 만든 허상도 아니었다.

"그게 뭔데."

"이번에 방송을 허락 받은 화신들 중 성좌님의 이야기를 사용한 이들이 바치는 공물입니다."

얼떨결에 반말을 툭 내뱉었지만

이하린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곱게 서류를 내밀고 있었다.

한 장, 두 장.

대충대충 읽으며 빠르게 넘겨보았다.

비슷한 양식에 이름만 바뀌어 있는 수 백장의 서류.

물건은 소환해서 써먹고   식사는 아카데미 식당에서 하는 삶.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TV가 필요하면 몰라 돈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정치적인 요소를 생각하자면

성좌에게 수익을 바친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물론 방송을 하는 화신들에게 손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썰풀이 방송에서 그냥 썰만 푸는거랑, 나한테 직접 공물을 바치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건 확 다르긴 하겠지.'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확실하게 느껴진다.

연예인에 관련된 썰을 푸는 방송인이 함께   찍은 사진을 직접 들고 온다던가

연예계 매니지먼트 회사의 계약서 사본을 들고 오는 게 더 화제가 되겠지.

성좌에게 일정 금액을 바쳐도 성좌의 이름을 팔아 얻는 이익이 더 크다는 소리다.

아무튼간에 내가 궁금한 건 이런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내가 밀어낸 서류를 이하린이 받아들고 촥촥 정리를 하는 동안

나는 침대 근처에 뒀던 스마트폰을 마력으로 땡겨와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래…, 뭐라고 해야 할까.

인터넷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ㄴ아빠난커서성좌가될래요

ㄴ럭키성붕!럭키성붕!럭키성붕!

ㄴ 우리가 언럭키 성좌 아닐까?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려 있는 인터넷 뉴스의 댓글창.

어제까지만 해도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같은

고리타분한 명언이 좋아요를 잔뜩 받은 상태였는데.

ㄴ 나도 가슴 큰데 화신 안 시켜줌?

ㄴ 레즈게이야…

ㄴ 자지 달린 여자면 원찬스 있었다

온 인터넷 세상이 아포칼립스 직전의 세상처럼

미치광이들의 댓글들로 범해지고 있었다.

과도한 욕설과 섹드립으로 검열을 당하지만

지워지는 속도보다 늘어나는 속도가 빠른 댓글들.

가장 검열이 심한 포털사이트의 뉴스 댓글이 이러한데

검열은 커녕 존댓말 네티켓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트나

개인 방송인들이 모인 동영상 사이트는 어떻겠는가.

슥슥 화면을 내리다가 한예지가 보던 방송인이 눈에 보여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동영상을 재생해보았다.

[네, 여러분 성하~ 요즘 핫 이슈로 타락 성좌에 관한 신상 정보가 퍼졌죠?]

네, 알려드렸습니다~ 하고 넘길 줄 알았는데

꽤나 건실한 컨텐츠를 밀고 나가는 방송인인지

추방당한 뱀의 심장과 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최초의 성좌 박제 사건이라니…? 그럼 얘들은 무슨 생각으로 박제를 한 거야.'

세 명의 화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더니 덤덤하게

'시민들이 얼굴을 알아보도록 인터넷에 먼저 올려버리죠'

라고 말하길래 다른 타락 성좌들도 비슷하게 잡는 줄 알았지.

하지만 인터넷 방송인이 정리해준 내용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었다.

타락한 성좌와 계약한 범죄자 화신들의 신상은 공개 되었지만

타락한 성좌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풀린 적 없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타락 성좌들은 자신의 화신을 유혹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추방당한 뱀의 심장처럼 좆대로 내려와서 강간을 하지는 않을테니까.

저렇게 노코스트 강림으로 멋대로 놀러다니는 건 몽마만 가능한 일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타락 성좌 신상 공개 사건.

심지어 타락 성좌의 신상을 공개한 것은

아카데미에서 인간의 영혼을 치유해주던 성좌.

인터넷 마녀사냥.

그런데 욕설 수위를 넘겨도 고소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만한 요소가 한가득이네.

누군가를 욕하고 모욕하고 끌어내리는 게

성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그 결과물은 내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일단, 인터넷 사이트의 메인 포탈에 걸린 인터넷 언론사들.

이쪽 세상의 주류 언론사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언론사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의 프로필 사진이 대문짝하게 걸렸다.

그래도 언론사라고 선은 지키는지 욕설은 없지만

타락 성좌가 직접 강림하여 남자를 범한다는 내용은 곁들여서.

성좌와 화신 갤러리는 어젯밤부터 시작된 난동이 끝나질 않더니

메인 화면의 로고 옆에 추방당한 뱀의 심장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저장해놨다.

게시판 지분율 80%를 점령했다는 이유로 대문짝만한 '강간의 성좌' 자막을 달아서.

그 외에도 동영상 사이트의 인기 급상승 영상의 절반 이상이

타락 성좌와 아카데미에서의 에피소드로 도배가 되었다던가-

'이건 지워달라 해도 안 지워주겠지…?'

전생의 꺼라위키 비슷한 사이트에

[성좌/무기력한 악몽/타락성좌 박제사건]

항목이 떡하니 새로 생기는 등 다양하게 난리가 났다.

'근데 최근 편집자가 Dpwl8849면 예지8849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한창 아침 운동중인 한예지한테 가서

예지야 혹시 나를 인터넷에 박제했니?

라고 물어보기는 애매하잖아.

그래도 이 난리가 났으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밤에 유흥가에서 노는 젊은 사람들은

한 번씩 저 얼굴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유일한 걱정이라면 이 유명세를 기반으로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얻게 될 포인트.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인트, 월급식이니까….

즉석에서 따박따박 들어오는 게 아니라

월 초에 성역에서 정산되어 들어오는 방식이다.

계약한 유망주 화신도 빼앗긴 주제에   포인트는 다음 달에 들어오는 상황.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 성좌님, 아침 식사를 준비할까요?"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내내

옆에서 얌전히 대기하던 이하린이 내게 묻는다.

음, 지금은 식사 보다는 아카데미 쪽에 뭘 시켜야겠네.

"식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아카데미쪽 사람을 불러줄 수 있겠니?"

"네, 연금술사를 비롯한 마법 학회쪽을 부를까요? 아니면 총장과 이사회쪽을 소집할까요?"

"이사회를 불러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도

현실에서 싸돌아다니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잡히진 않는다.

얼굴 좀 팔리고 평생 먹어도 부족할 패드립 섹드립의 대상이 되지만

그 욕설이 직접적으로 몽마의 분신에게 데미지를 줄 리 있나.

그러니까 내가 아카데미쪽에 부탁해서 전달하는 이야기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서 조져버리기 위한 마지막 한 수.

솔직히 이게 안 통하면 진짜 모르겠는데.

그냥 불사르는 폭군한테 부탁해서   우주 전함으로

동서남북 대륙 실시간 감시를 하는 수 밖에 없지 않나?

"그, 정말이십니까 성좌님?"

"이런 걸로 농담하려고 부르지는 않았어요."

땀을 뻘뻘 흘리는 아카데미 총장.

전에 봤던 노련하고 세련된 노파의 모습 대신

가는 귀가 먹었나 제 귀를 의심하는 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으, 성좌님께서 개인 자산을 사용 하시는 걸 이 늙은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서도…."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 낸 그녀가 흘끔흘끔 눈동자를 굴린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내가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이하린.

뭔데 이러나, 싶어 이하린에게 나도 고개를 돌렸다.

"성좌님, 창고를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곧바로 이하린이 서류 몇 장을 건네며 내게 말한다.

서류에 써 있는 것은 금이니 은이니 하는 귀금속들을 비롯해

창고 안에 아직까지 내 명의로 남아 있는 물건들의 목록이었다.

"남대륙산 희귀 괴수의 부산물이나 서대륙산 희귀 금속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재물들은 대륙 표준화 기준으로-"

"상관 없어, 전부 걸어."

흐읍,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총장과 같이 온 수행원 하나가 사레가 들렸는지

흡흡 꺽꺽 힘겹게 숨을 내뱉는다.

내가 내놓은 해결책은 간단 무식한 방법이었다.

추방당한 뱀의 심장의 분신체에게 현상금 걸기.

대륙에 성좌가 몇이고 화신이 몇인데

누구 하나는 마력체를 붙잡는 재능이 있겠지.

애시당초 창고에 있는 물건은 내게 큰 쓸모가 없다.

대륙 표준화 기준으로 뭔 억 소리가 나는 금액이니

이게 있으면 수도권 건물주가 되고도 남는 금액이니 하지만

아카데미에 빌붙어 사는 성좌에게 현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화신들이 가난해서 빌빌거리고 빚이 있다면

그녀들을 구제해 주는 데 사용이라도 하지.

감자칩을 사기에는 너무 많은 월급에 놀라버린 한예지와

마법 연구를 한다고 아카데미에서 예산을 땡겨먹는 이하린

꿈속 도시를 다루는 데 푹 빠져서 현실을 반 쯤 버린 김하은까지.

몽마에게 있어서 현금이란

만렙 고인물 인벤토리 구석에 처박힌

쪼렙 보스의 드랍템과 비슷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실 원화나 달러가 아니라서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하고.

"아카데미의 이름으로 공표해 주세요. 누구라도 타락 성좌의 분신체를 온전히 잡아온다면 내 창고를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그리고 원한다면,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주겠다고 전해요."

다시 한 번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거의 없다.

해결되지 않는다면 돈이 적었던거지.

현상금 천억대의 현상수배범이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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