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거래 조건으로 내놓은 것은 딱 하나였다.
그녀의 화신.
"내가 이 거래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해?"
"몽마의 재능을 가진 화신이 어디 쉽게 구해지는 줄 알아? 그 녀석은 지원 없이 아카데미의 결계를 뚫은 녀석이야. 불사르는 폭군에게 뭘 약속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놈 보다 대단한 보상은 없을 거다."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
그 묘하게 밉살맞은 얼굴을 보니 칼빵이 마려웠지만
통각을 제거하고 온 분신체니 어쩔 수 없이 참게 되었다.
'보니까 팔팔 끓는 찻물이 손등에 튀었는데 반응이 없어.'
할퀸 것만으로 바닥을 뒹굴며 울던 녀석이
끓는 물에 데이는 걸 덤덤하게 참을 리 있나.
그러한 점은 둘째 치고, 녀석의 조건은 꽤 매력적이었다.
마치 운동선수 드래프트를 하듯 화신을 교환하는 행위.
화신과 계약한 성좌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거래.
그 재능 있는 화신이 남자만 아니었다면 조금 끌렸을지도.
'하지만 남자잖아.'
개 목걸이 차고 바짝 엎드려 나를 기다리는 미녀 화신이 있는데
내가 굳이 불사르는 폭군의 말을 무시하고 남자 화신을 얻어야 할까.
'짧은 바지 입고 여자한테 아양떠는 덜렁이를 위해서?'
심지어 김하은 또한 몽마의 재능을 가진 화신이다.
은신과 속임수와는 달리 마력의 양 쪽으로 재능이 있지만,
아무튼 그 쉽게 볼 수 없다는 몽마의 자질을 가진 화신이지.
내 화신이 재능이 넘친다는 건 모르고 있는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하기야 대륙의 모든 성좌들은 뛰어난 화신을 원하고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희귀한 몽마의 재능을 지닌 화신이라면
충분히 거래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남자만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좀.'
아침에 일어나면 내 말을 잘 듣는 미녀가 시중을 들어 준다.
점심 무렵에는 내게 복종하듯 집착하는 미녀가 나와 함께하고
저녁이 되면 수동적이여서 노예 아닌가 싶은 미녀가 봉사를 한다.
그러다 가끔 놀러가면 판타지에서나 나올 엘프 미소녀가 나를 반기는 삶.
아포칼립스의 마지막 생존자가 음습한 욕망을 가득 담아
고의로 만들어 낸 아방궁과 같은 현실이다.
이 상황에 굳이 남자를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나와 같은 성 관념을 지닌 녀석이라면,
그러니까 남녀 역전이 아닌 세상 출신이면 받아들였겠지.
충성스러운 송곳니와 함께 여자가 어떻다느니
이쪽 세상을 안줏거리 삼아 술이나 마시면 되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화신의 성별이었다.
"싫어."
"거 봐, 역시 그렇, 뭐?"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새총 맞은 비둘기라는 표현이 이런 건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이해는 못 하는
눈만 댕그랗게 드는 멍청한 표정.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몽마의 마력을 받아들인 것만으로 깨우친 녀석이라고. 그걸 내 포인트 써서 너에게 계약을 넘기겠다는데 거절을 해? 녀석이 얼마나 천재적인 화신인지 모르는 거야?"
"나도 얼마나 뛰어난 녀석인지 알고 있어."
북 대륙 슬럼가에서 계약했던 녀석이다.
지원 하나 받은 적 없으니 아카데미도 오지 않았겠지.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한 뒷골목 남창이
아카데미 결계를 뚫고 암살을 했으니 얼마나 뛰어난 재능인가.
남자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어째서? 네가 손해볼 거 하나 없는 거래다."
"남자잖아."
단순 명료한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풀풀 풍기며 그녀가 내뱉는다.
"미친놈, 뒷골목 남창과 다를 바 없군. 후회하게 될 거다."
분위기를 한껏 잡고 사라지려던 녀석은
내가 벌떡 일어나 덤비는 척 겁을 주자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화들짝 놀라 사라졌다.
진짜 삼류 악당이네, 저 새끼.
※
후회하게 될 거다-
하고 똥폼을 잡고 사라진 녀석이지만
실제로 내게 피해가 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야 그럴게, 녀석이 내게 위해를 끼칠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아카데미 한가운데에 성역을 펼쳐두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카데미를 침입할 수 있는 화신을 체포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최고의 화신을 허망하게 빼앗긴 녀석이
대체 무슨 수단으로 내게 덤벼들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별 의미 없는 협박을 뒤로 한 채
이하린과 연금술사들에게 향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연구를 끝내야겠네요?"
"으음, 역시 실험체에 무리가 있어도 조금 투약량을 늘려볼까요?"
내가 그녀들에게 이야기 한 것은
꼬리를 무는 사냥개의 화신.
낯부끄러운 밤일에 대해 설명한 게 아니라
꼬리를 무는 사냥개의 화신이 추적을 개시했다는 걸 설명했다.
이하린과 연금술사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긴 하지만
꼬리를 무는 사냥개의 화신들이 생각보다 훨씬 유능해서
연구가 끝나기도 전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 낼 지도 모르니까.
사실 너희의 노력은 헛수고였다고 나중에 말해주는 것보다는
너희 말고도 일을 맡은 화신이 늘어났다고 미리 말하는 게 좋겠지.
"03-P 시약을 조금 늘려볼까요? 신장 기능 정도는 이상이 생겨도 괜찮을 텐데."
"신경계에 이상이 생겼던 게 몇 번 약물이었죠? 배양액으로 커버할 수 있는 건 다 때려 부어도 될 것 같은데."
내 이야기를 들은 연금술사들이 웅성거리며 차트를 확인한다.
뭔가 위험한 이야기가 잔뜩 들려오자 활짝 웃는 금발의 남자.
으음… 여자가 한이 서리면 오뉴월에도 눈이 내린다더니
이쪽 세상에서도 남자가 한이 서리면 꽤 무시무시하네.
친위대 일은 때려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폭군에게 휴가라도 받은 건지
연금술사들 근처에서 빙빙 맴도는 피해자의 오빠.
무시무시한 집념은 둘째 치고
겉으로 보기에는 몸매 건장한 금발의 미남이다 보니
방구석에서 공부만 한 연금술사들이 인중을 헤벌쭉 늘린다.
"저기, 하린아…?"
"네, 성좌 님?"
"저 남자는 너희랑 계속 같이 있는 거니?"
"네, 실험체의 탈주 위험을 핑계로 감시하듯이 저희를 따라다니네요. 그래도 친위대 갑주를 사용해서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둥 잡일을 도와주니까 쫓아내기도 애매해서 그냥 두고 있어요. 저랑 같이 일하는 분들도 꺼려하는 건 아니라서. 남자한테 강하게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
슬쩍 상황을 살펴보니 미녀에게 어필하는 남자들처럼
친위대의 주변에 여자 연금술사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호감을 사겠다고 내뱉는 대화의 내용 중간중간에
신경계가 어쩌구 내장이 저쩌구 적출이 뭐시기 하는
대단히 흉흉한 내용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자기들이 좋다는 데 어쩌겠어.
그렇게 연금술사 사이에 녹아들어 간 친위대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한예지와 그녀의 팀원들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나를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저어, 성좌님?"
익숙한 목소리.
아니, 그야 잊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
뜨거운 밤을 보내고 헤어진 게 어제였는데.
그저께 만나서 어제 아침에 헤어졌으니 이제 막 24시간이 지났는데?
뒤를 돌아보니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있었다.
길쭉 늘씬한 신장과 탄탄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꼬리를 무는 사냥개의 화신과 몇 명의 여자들.
복장이 비슷하고 허리띠가 똑같은걸 보면
아마 저 여자들도 사냥개의 화신들이겠지.
짖궃음 반, 호기심 반을 섞어 그녀에게 농짓거리를 던졌다.
"무슨 일이니? 마력이 조금 부족해서 다시 냄새를 맡으러 왔으려나?"
"아뇨, 그건 아니고…."
다른 여자들도 있는데 다짜고짜 섹드립을 박을 줄 몰랐던 걸까.
뺨을 붉게 붉힌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말을 이어나간다.
하기야 진짜 마력 때문에 온 거면 혼자 왔겠지.
설마 일행을 데리고 와서 난교는 어떠십니까?
하고 물어 보는 미친년은 아닐 테니까.
"성좌 님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동료 화신이 아니라 부하 화신들인지
그녀가 손을 흔들자 뭘 들고 나오는 여자들.
얼굴이야 다 평균 이상이고 몸매도 다 좋아서
한번에 여러 명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음란한 망상했다.
그렇게 망상을 하는 내 손에 쥐어지는 건 둥그런 구슬.
주먹만 한 크기에 고무 탱탱볼처럼 탄탄한 감촉을 가진 녀석이었다.
"이게 뭐니?"
"마력을 흘려 넣고 으스러트려 보시겠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마력을 움직여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었다.
마치 찰흙 반죽을 뭉개듯 꾸우욱 으스러지기 시작하는 구슬.
마력과 반응을 하는지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이내 피어오른 안개가 꾸물거리더니 어떠한 형상을 만든다.
바닥과 골목,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까지.
배경인 뒷골목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저건 설마…?"
"예, 추방당한 뱀의 심장입니다."
"벌써 찾은 거니?!"
"찾았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루 만에 찾아낸 거지.
그런 의문을 담은 내게 내밀어지는 물건들.
정확히는, 거의 백 여개에 달하는 구슬들.
"……?"
"그, 흔적이 너무 많습니다."
서류 가방에 무슨 금괴마냥 곱게 담긴 구슬들.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마력을 듬뿍 담아 여러 개의 구슬을 동시에 으깨보았다.
골목을 걷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
클럽을 들어가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
술집에 들어가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
으스러진 구슬들이 쉴 새 없이 흔적을 보여 준다.
"남자버릇이 좀 나쁜지 매일 내려오는 것 같은데요?"
아니 시발, 저걸 지금까지 왜 못 잡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