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6화 > (156/169)

< 156화 >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몽마였다.

아마 나처럼 후천적으로 몽마가 된 케이스려나.

몽마라는 걸 가정하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게 생긴다.

먼저 코스트 없이 강림하는 것.

분신을 보냈던지 뒷골목에 쓰러진 아이의 꿈속에 나타났겠지.

몽마의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을 꼬시는 건 쉬운 일에

한예지 등 내 화신을 생각해 보면 저 살인범의 충성심도 이해가 된다.

그다음은 아카데미 결계를 무시하는 일.

잘은 모르겠지만 성좌의 성역까지 뚫고 들어가는 게 몽마니까

아마 인식을 속이는 계통의 권능이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나도 최면 비슷한 것에 방금 당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서로의 성역에 들어오게 된 일.

원래대로라면 내가 일방적으로 성역에 침입해야 하지만

추방당한 뱀의 심장도 몽마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다.

몽마만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면

그녀 또한 몽마라서 역주행으로 내 성역에 온 거지.

내가 꿈속 도시에서 퉁겨져 나온 이유도

다른 몽마인 그녀가 돌멩이를 만졌기 때문이리라.

왜, 게임 같은 거 다중 로그인 시도하면

기존 계정이 로그아웃 되는 것처럼.

'다른 몽마는 두 번째로 만나는 건가.'

이름도 까먹어 버린 첫 번째 몽마.

한예지의 도시를 노리고 테러를 저질렀다가

근원 승부에서 핵폭탄에 맞고 바스러진 녀석.

생각해 보면 그 녀석도 참 허접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그 녀석보다 더 허접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남녀 역전 세계의 출신인 것 같은데

손등 한 번 찍혔다고 울면서 붕붕펀치를 날리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찻주전자를 집어 든 건 현명했지만

일단 맞춰야지 의미가 있지.

세상 무서운 거 모르고 살아온 부잣집 아가씨 출신

금수저 기업인이라 그런지 몸싸움을 할 줄 모르더라.

'그래도 근원 싸움은 좀 불안 해.'

그렇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싸움을 걸 순 없다.

지난번 죽었던 판타지 세상의 몽마와 달리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미래 SF 세계관 출신이니까.

불사르는 폭군처럼 외우주와 행성 식민지가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가 달과 화성까지는 개척한 과학 기술을 보유한 세상.

달과 지구의 우주 전쟁이 벌어져 멸망한 세상이라면

적어도 핵미사일을 탑재한 스텔스기는 쉽게 막아 내지 않을까.

근원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지.

막말로 그녀를 제압하고 싸워서 이긴 다음

근원 싸움에서 우주병기 빔 맞고 내가 패배하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억울해서라도 눈을 못 감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타앙- 소리와 함께 마지막 표적이 넘어진다.

실전 사격 프로그램에서 한예지가 모든 표적을 명중시킨 것이다.

빔이 발사되는 권총을 들고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성좌 님, 보셨어요?! 최고 기록이래요!"

"잘 쏘긴 정말 잘 쏘네…."

조금 얼빠진 내 대답에도 한예지가 기쁘게 웃는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일취월장한 사격 실력 때문이겠지.

초능력에 가까운 재능과 권능을 봉인한 상태로

번쩍번쩍 날아다니는 드론들을 모조리 격추하다니.

이래서 재능을 꽃피우지 못 한 영혼들이라 불리는 건가.

"네! 지난번보다 확실히 더 손맛이 좋은 것 같아요. 훈련장을 갈아 엎으면서 총기도 다 손을 봤나?"

저공비행하는 드론 발견을 못해서 끙끙거리던 편의점 알바생이

이제는 중년의 카우보이마냥 권총을 휘리릭 돌리며 허리춤에 패용한다.

그런 한예지의 뒤를 보면 다양한 총기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권총에 샷건에 고무 유탄 발사기에 소총에 저격총까지.

마취총이나 테이저 건까지 생각하면 진짜 만능 총잡이 다 되었네.

"아카데미 생도일 땐 저공비행하는 드론도 못 찾아서 끙끙 앓았는데."

"어우, 언제적 이야기를 하세요…."

훈련 점수가 안 올라간다고 악몽까지 꿨던 기억이 있으니

놀리듯 이야기를 꺼내자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그녀.

역시 폼을 잡는 모습보단 어벙한 모습이 더 잘어울려.

"사격도 잘했는데 상이라도 줄까? 양호 가운이라던가 교복이라던가."

"예엑?! 그, 제가, 아니-"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 식사까지 함께한 뒤 다시 숙소 쪽으로 향했다.

지난번 추방당한 뱀의 심장 때문에 밖으로 끌려나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꿈속 도시를 확인하기 위해서.

금방이라도 사건이 터질 것 같았던 일상은 뜻밖에 평화로웠다.

아침에는 실험체를 구경하며 이하린과 이야기하고

점심에는 한예지의 팀에게 찾아가 반 농담으로 실직자가 된 걸 달래주고

저녁에는 꿈속 도시의 로봇들을 구경하며 도시를 관람하는 평온한 일상.

이유는 간단했다.

'배알도 없나, 미친년 진짜.'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쫄아서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불사르는 폭군의 예비 계약자를 암살하던 배짱은 어디 가고

눈꺼풀 콱 찔렸다고 질질 짜며 숨어 버린 쫌생이만 남았네.

가장 핵심 인물인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잠적해 버린 상황.

그러다 보니 나머지 모든 일이 느릿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눈 한번 찔렸다고 겁을 먹어서 내 성역에 오질 않으니 독초도 무용지물.

화신의 연구는 몽마 계약자의 표본이 적어서 연구도 지진부진.

그렇다고 성좌씩이나 되어서 연금술사들을 재촉하긴 모호하다.

나름 대륙 제일의 타이틀을 달고 아카데미에 온 사람들이니까.

얘들이 못하면 이쪽 세상 연금술사 중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솔직히 말해서 이쪽 세상에선 마법이나 과학이나 비슷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신기술 개발에 몇 달은 물론 몇 년을 쓰는 게 당연하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그러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이쪽 세상을 게임에 비유해서 이해하려 들었기 때문일까?

불사르는 폭군의 부탁이 자꾸 퀘스트처럼 느껴진다.

무슨 소리냐면, 빨리 끝내고 말끔하게 털어 버리고 싶다는 거지.

해야 할 일을 까먹어서 답답한 사람처럼   아침에 실험체를 볼 때마다

수고한다는 마음과 귀찮다는 마음이 뒤섞여서 머리를 어지럽히니까.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하늘은 스스로 구하는 자를 돕는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성좌 님."

"으음, 그래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몽마가 되면서 꽤 좋아진 기억력이니 확실하겠지.

이번에 새로 치료한 환자중 남 대륙 출신이 좀 많았던가?

"저는 꼬리를 무는 사냥개께서 보낸 화신입니다."

태닝을 한 피부보다 더 진한 갈색의 피부의 늘씬한 몸.

움직이는 데 거슬리지 않도록 짧게 친 단발머리.

잔 근육이 도드라진 팔뚝과 선명하게 갈라진 복부의 근육.

그리고 그 근육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짧은 복장까지.

"제 성좌께서 감사의 표시로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어떤 도움을 말하는지 알 수 있겠니?"

귀만 뾰족하면 다크 엘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미녀가

새하얀 이빨과 선홍빛 잇몸을 씨익 드러내며 웃었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웃음이 개구쟁이 소년의 웃음이라면

눈앞에 있는 화신의 웃음은 자신감 넘치는 청년의 웃음에 가깝군.

어깨를 쭉 피고 다니며 매사에 당당한 여장부의 모습에 잘 어울린다.

"요 근래, 아카데미가 떠들석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카데미에 침입해서 북 대륙 성좌의 예비 계약자를 해친 범인을 잡았다고 말이죠."

"맞아, 이미 찾아서 잡았으니 네가 도와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성좌의 이름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시들지 않는 거목이나 충성스러운 송곳니를 비롯해

악몽이니 폭군이니 검이니 하는 단어 들이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꼬리를 무는 사냥개는 더없이 직관적이다.

사냥개가 꼬리를 물었다, 대놓고 추격자라는 거 아닌가.

사냥꾼이나 암살자 같은 추격자의 성좌라는 것이겠지.

맨날 향수나 손수건, 보석 목걸이나 시계 같은 장신구나

제물로 사용할 순수한 짐승이나 진귀한 괴물 부산물을 받다보니

아카데미에게 통째로 권한을 넘겨두고 신경을 끈 상태인데

이렇게 직접 도움을 주겠다는 성좌는 두 번째네.

문득 근원에 관음증 성벽이 새겨져 버린

굴레를 베어 내는 검의 여제자가 떠올라 버렸다.

환자한테 좀 미안한 짓을 하긴 했네.

주화입마에서 벗어나는 대가가 관음증이라니….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으니 눈앞의 여성에게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 툭 튀어나온다.

"아뇨, 아직 잡지 못 한 사냥감이 있지 않습니까?"

"…가능하니?"

그녀가 말하는 것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리라.

정확히는 그녀가 지상에 내려 보내는 몽마의 분신.

본체는 성역에 있더라도 직접 만든 분신을 사로잡는 게 가능하다면

화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내 기준으로 말하자면 몽마의 분신은 허깨비에 가깝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분신을 만들어 감각의 일부만 공유받는 행위.

조금 세세하게 따지자면 스펀지밥에서 나온 비눗방울 친구 같은 거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안개로 만든 인형.

피해를 입으면 안개되어 스르르 사라질 허상.

그 누가 신기루와 허깨비를 체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웃은 여자,

꼬리를 무는 사냥개의 화신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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