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5화 > (155/169)

< 155화 >

이 세상의 누군가는 포상으로 고소장을 쥐어 준 적 있을까.

술이라도 한잔 걸치지 않으면 나올 리 없는 이상한 문장.

싸구려 코미디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애써 머리에서 지워 낸다.

'살다 보니 고소대리 위임장을 포상이랍시고 작성하는 일도 생기는구나.'

핵전쟁 이후 방사능 돌연변이와 싸우다 최후의 생존자되어서

누가 잘 만들어둔 평평한 지구에 끌려와 성좌라는 존재가 되더니

몽마로 종족이 바뀌고 엘프와 늑대인간과 친해지는 일보다

포상이랍시고 고소대리 위임장을 작성하는 게 더 어처구니가 없네.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리라 상상도 하지 못 한 사건.

악플 고소와 고소대리 위임장을 작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통 속에서 보글보글 기포를 내뿜는 실험체 다음으로 만날 것은

원래는 고소대리 위임장을 받았어야 할 내 첫 번째 화신, 한예지다.

마법동보다 경비가 훨씬 적은 사격동쪽으로 발을 옮긴다.

시약의 냄새가 슬슬 사라지고 화약 냄새가 매캐하게 코끝을 찌른다.

실탄 사격장부터 빔 병기 사격장, 사격 프로그램 체험장까지 있는 건물.

과학 기술은 전생의 기술과 엇비슷한 정도인데

어째 몇몇 분야에서는 SF 세계관급을 유지하고 있다.

누구는 머스킷을 쏘는데 옆에선 레이저 라이플을 쏘는 세상이니까.

카우보이와 무림인과 마법사와 초능력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상.

하긴, 우주 전함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과학 기술력은 신경 안 쓰는 게 편하지.

'그러고 보니 탈출 못 하도록 감시팀을 만든다 하지 않았나?'

탈출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범죄자가 지금은 통 속의 실험체가 되었는데

이러면 한예지 팀이 감시팀을 새로 조직하는 이유가 사라진 거 아닌가?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복도에서 만난 한예지의 눈초리가 축 처져 있다.

"오셨어요, 성좌 님."

부루퉁한 모습이 장난감 빼앗긴 강아지처럼 보인다.

하기야, 맨날 놀고먹는 게 부담되어서 감시팀을 자처한 상황인데

능동적으로 만든 감시팀이 일 거리를 빼앗기고 백수되어버렸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 좀 하다가, 사격장에서 총 쏘고 잠을 자는

그야말로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사는 모습 아닌가.

그러는 와중에도 소시민 마인드에 부담되는 금액이 통장에 따박따박 들어오니까

통장에 쌓인 커다란 금액을 보고 또 부담감을 느끼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거다.

한예지는 소녀가장으로 편의점 알바하고 지원금으로 살아오다 보니

받는 돈만큼 일해야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계속 생기나보다.

아카데미에서 화신에게 주는 돈에는 품위유지비 같은 덤이 붙어 있지만

그 금액만큼 무언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어쩔 수 없지.

초등학생 무렵부터 20살을 넘긴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다.

인생의 대부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마인드니까 어쩌겠는가.

"오늘도 사격장에 가니?"

"아, 네! 이번에 신규 훈련 프로그램이 업데이트 되었다고 테스트를 부탁 받아서요."

내 질문에 그녀가 조금 올라간 목소리로 헤헤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도 생각보다 덜 우울한 것 같다고 느꼈는데

무언가 일 거리가 생겨서 그렇구나.

돈 쓰는 법을 몰라 사치품이라고 편의점 감자칩을 구매하며

게임 인방을 보며 뒹굴거리는 칠칠맞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사격과 저격에 관한 재능 하나는 아카데미에서도 손꼽힐 수준이다.

"재능이나 권능 없이 순수 사격실력을 키우는 시설이라 저한테 부탁을 하더라구요."

한예지의 재능은 추가 타격이지 사격에 도움되는 재능이 아니다.

그런데도 실력만으로 사격장에서 90점 후반대를 기록했으니까

아카데미 쪽에서도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으려나.

아무튼 부탁을 받아서 할 일이 생긴 한예지는 밝게 재잘거렸다.

아마 테스트를 명목으로 통장에 감사금이 더 들어올텐데

그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정아린과 남궁희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들 개인 훈련을 위해 찢어진 건가?

사격 프로그램에 관해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복도를 걷는다.

마법동과 달리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은 건물이라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네.

그러다 익숙한 장소에 도착해 사격 프로그램이 있는 훈련장의 문을 연다.

문 너머에서 나를 반기는 건 코끝을 가득 채우는 낡은 종이와 잉크의 냄새.

따로 준비된 티 테이블에 앉으니 향 좋은 차가 한 잔.

말 그대로 향만 좋은 건지 맛은 그닥 없었다.

"이렇게 엘프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차라고 해 봐야 선물 받은 제주 꿀배차나 유채차 같은걸

500ml 생수병에 냉침으로 마셔본 게 전부인지라

맛이 역하지는 않아서 한 잔 그대로 홀짝 마셔버리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커질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비싼 차를 잘못 끓인건지   원래 향으로 마시는 차인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주절거리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며 차를 끝까지 마셨다.

혀끝에서 시작된 온기가 배를 따스하게 만들어 주는 걸 느끼며.

"그러니까 부탁할 게 있는데,"

삐죽 올라간 날카로운 눈초리의 미녀.

오만해 보이는 저 얼굴은 악역의 얼굴이라 해야 할까.

드라마 같은 곳에서 남의 얼굴에 물 잘뿌리게 생겼네.

사장님 책상에 앉아 등을 뒤로 재끼고 있던 여자가

책상에 팔꿈치를 대며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한다.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턱을 괴며 다시 입을 여는 그녀.

그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니 부탁을 들어 주고 싶어진다.

"아카데미로 데려간 내 화신, 돌려 줘."

"으음…."

하지만 들어 주고 싶은 것과 들어 주는 건 다른 문제.

돌려 주면 어떻게 될지 미래가 뻔히 보이는 걸.

"싫어. 아니, 못 해."

"그래, 좋, 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친위대의 모습이다.

뇌를 뽑는다는 말에 기뻐하고 안 뽑는다니 시무룩하다

통 속의 액체에 잠긴 모습을 사진 찍어서 돌아가던 그 미친놈.

불사르는 폭군이야 추방당한 뱀의 심장에 관심이 있다지만

그 친위대가 원하는 건 성좌가 아닌 화신을 직접 조져 버리는 것.

아카데미까지 따라올 정도로 질척거리는 놈을 감당하긴 귀찮다.

거기에 마법사들도 한두 명이 달라 붙은 게 아니다.

연금술사들이 연구를 끝내면 시체라도 좋으니…

아니, 시체의 일부라도 좋으니 나눠서 가져 가고 싶다던 마법사들.

"어째서?"

불사르는 폭군의 친위대부터 아카데미 관계자, 마법 학회의 사람들.

만약 사로잡은 화신을 이유 없이 방생해 버린다면 득달같이 달려들 텐데

셀 수조차 없는 그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렇다고 성좌의 권위로 대충 찍어 누르기는 귀찮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긴 싫어…."

뱃속이 뜨끈해지니 나른해서 졸립다.

그래도 대답은 꼬박 꼬박 해 줘야 할 것 같아 겨우 입을 연다.

"편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이러고 있는데, 그렇게 귀찮은 일을 왜 해야 해."

혀끝에서 뱃속으로 들어간 온기.

그 온기가 마치 난로처럼 온몸으로 퍼진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졸음이 몰려오듯

고개를 가누기 조금 힘들어질 정도.

뺨을 톡톡 두드려 보고 기지개를 켜보지만

온몸을 감싼 온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졸리면 일단 잠들었던

아포칼립스식 겨울잠이 너무 습관이 된 걸까.

"명령만 내리면 해결될 문제인데 왜 귀찮아?"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따지듯 물어 보는 그녀.

납득하지 못 했는지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다.

"명령을 안 내리면 더 편하니까…."

납득하지 못하겠는지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 변한다.

저러니까 정말 드라마 악역 배우처럼 생겼네.

얼굴에 물 좀 맞으면 잠이 깨려나?

그러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책상에서 나와 내 쪽으로 온다.

"아니야, 너는 성좌잖아. 귀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명령만 내리면 된다니까?"

"납득을 시켜야-"

"그러니까! 납득을 시킬 이유가 없잖아. 성좌씩이나 되어서 왜 아랫것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하려 들어?"

귓가에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에 생각이 많아진다.

내 손등을 쓰다듬는 끈적한 여자의 손.

티 테이블에 놓인 차와 접시, 다과 세트.

등허리를 살금살금 어루만져지는 감촉.

한 뼘 길이도 안 될 것 같은 얇은 포크.

테이블 위에 무방비하게 올라온 새하얀 손등.

"부탁할게, 명령마, 아아아아아악!"

"아, 이게 아닌가."

다과를 집는 포크여서 그런지 손등의 뼈에 걸린 게 느껴진다.

포크 날 끝에 묻은 피를 무시하고 뽑아낸 뒤 다시 내리찍는다.

이번에 내리찍는 건 울부짖는 그녀의 손등이 아닌 내 손등.

뮤턴트 중에서는 가스로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어 잡아 먹는 녀석도 있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자해한다는 아이러니함은 이미 충분히 겪었었다.

불에 덴 것 같은 화끈한 통증이 온몸을 잠식하던 나른함을 몰아냈다.

"미친, 미친 새끼가, 씨발!"

손등을 붙잡고 울부짖은 그녀가 이를 악 물고 내게 달려든다.

피 묻은 손에 잡혀 엉성하게 휘둘러진 찻주전자가 내 머리를 노린다.

고작해야 저 정도 고통으로 힘이 빠졌는지 느릿한 속도.

고개를 숙여 피한 뒤 달려들어 양손을 쭉 뻗었다.

이런 맨손 싸움일 땐 눈을 노리는 게 제일 편하니까,

검지와 중지를 세워할퀴듯 눈꺼풀을 긁어 버렸다.

"너, 몸싸움 해 본 적 없구나?"

"눈, 내, 내 눈!"

그러더니 바닥을 뒹굴던 여자,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사라진다.

눈앞에 있는 건 얼굴을 감싸고 바닥을 뒹굴던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아닌

한 차례 사격을 끝마치고 나를 바라보는 한예지의 얼굴이었다.

"어, 성좌 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냐, 아무것도."

손등은 욱신거리지만 포크 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야기하는 건 딱 하나.

추방당한 뱀의 심장도 몽마, 드림 워커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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