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끈적끈적하게 달라 붙는 애정행각이 끝나고
언제 봐도 신기하고 시원한 덩굴 샤워기를 사용한 뒤 성역으로 돌아왔다.
오른손에는 약초와 촉매가 가득한 주머니를,
왼손에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엿 먹일 독초를 들고.
'이걸로 죽지는 않겠지.'
아직도 나른함이 느껴질 정도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그냥 독초 먹고 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사가 귀찮게 느껴질 정도의 안락함.
엘프라서 그런지 더욱 느긋하고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하기야 엘프의 육체로 세계수 정원에 갔으니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그냥 빨리 전부 끝내버리고 느긋하게 쉬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
이유도 없이 침대에서 한 번 뒹굴며 게으름일 피우다 겨우 일어났다.
마력을 사용해 꿈속에서 화분을 불러 온다.
작은 묘종을 심을 황갈색의 꼬마 화분들.
독초 씨앗 한 알씩 심자 몇 분 지나지 않아 싹이 튼다.
'세계수 때문인가?'
물뿌리개도 만들어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방구석에 자라난 세계수 때문인지 그럴 필요가 없네.
그래도 좀 멋지게 놔 둬야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했는데 이대로 두면 세계수가 알아서 키워 줄 것 같다.
좁은 테이블을 가득 채운 화분을 놔 두고 그대로 아카데미로 향했다.
이하린과 연금술사를 확인하고 이 약초 더미를 건네주자.
그러고 나서 한예지와 감시팀을 확인한 다음
김하은의 꿈속 도시에 다시 한 번 들어가 봐야지.
어찌어찌 흐르는 대로 놔 두다 보니 화신 셋이 모여 버렸네.
아카데미에 전부 모여 있으니 일정 짜는 게 생각보다 편해졌다.
화신들과의 교류도 순조롭고
친하게 지내는 성좌들도 생겼다.
굴레를 베어 내는 검에게는 도움을 약속받고
불사르는 폭군이 맡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
이하린이 있을 마법동으로 약초 주머니를 달랑달랑 흔들며 발걸음을 옮겼다.
운동장을 지나니 사람들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이제는 덩치 큰 모습 말고 엘프의 모습도 알아보는 모양새.
하기야 아카데미에 엘프는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인간의 모습보다 더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
발걸음도 가볍게 마법 연구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수인족들이 건물을 둘러싼 상태.
꾸벅 꾸벅 고개를 숙이는 쫑긋한 귀를 보니
다음 화신으로 수인족은 어떨까, 하는 음흉한 생각이 든다.
"이건 또 뭔…?"
엄중하게 감시되고 있는 방 안을 보기 전까지는.
"아, 성좌 님 오셨어요? 그런데 그 손에 든 건 냄새가 좀 독…, 특하네요?"
약초 냄새가 생각보다 진한지 코를 찡긋거리는 이하린.
내가 엘프 상태여서 눈치를 못 챈 건지 주변 사람들도 콧망울이 움찔거린다.
어쩐지 수인족 경비들이 귀를 평소보다 많이 움직이는 것 같더라니
이 약초 주머니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 때문이었나?
"아니, 저건 뭐야?"
"저거요? 연금술사들이랑 협력해서 만든 특수 용액이예요."
그보다 중요한 건 눈앞의 광경.
뇌가 뽑혀서 실험관 안에서 동동 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람이 통째로 실험관 안에 동동 떠 있을 뿐.
뇌를 뽑지 말라니까 사람을 통째로 담가놨네.
무슨 담금주도 아니고 사람을 저렇게 담가놨어.
연녹빛의 끈적해 보이는 액체 속에서 온몸에 전극을 단 실험체.
그리고 그 실험관 앞에서 차트를 들고 있는 연금술사들.
저게 어디를 봐서 범죄자를 심문하는 광경으로 보이겠는가?
아무리 봐도 악의 조직이 생체 실험하는 광경으로 보인다.
"저게 심문하는 거 맞니?"
아무리 봐도 악의 조직이 클론 전투병 만드는 장면처럼 보이는데.
목구멍까지 치솟아오른 비아냥을 꿀꺽 삼킨다.
저 연금술사들도 내가 시킨 일하는 건데 꼽을 줄 순 없지.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해맑은 얼굴로 연구하면서
내게 감사하다며 꾸벅꾸벅 허리까지 접는 사람들이다.
"아직은요. 인체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저항력을 낮추는 실험하고 있어요."
이어지는 설명은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웠다.
게임 속에서 방어력, 마법 방어력이 있고
현실에서 바이러스와 세균에 저항하는 면역력이 있는 것처럼
이쪽 세상에는 초능력과 마법에 대응하는 기본 적인 저항력이 있단다.
화신이 가진 저항력이 평범한 자백제를 막아 내는 상황.
독한 자백제를 사용하면 실험체가 상할 수 있으니까
자백제의 성능을 올리는 게 아니라 실험체의 저항력을 낮추는 중이라고.
"협력하기로 한 연금술사 분들이 예상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고 있어서 다행이예요. 이대로 가면 아카데미의 결계 문제와 화신-성좌간의 연결고리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거예요."
"으음, 그러니? 정말 다행이구나."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실험관 앞에서 이하린이 미소 짓는다.
한 손에서 팔락거리는 건 그래프가 잔뜩 그려진 서류철.
지금부터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저항력을 깎아서 약물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건 이해해도
어떤 방식으로 체내의 저항력을 깎아내는지 원리까지 알아 을 리 있나.
상 받은 걸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이지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교관들과 토론한 내용 아닌가.
'그런 걸 비전문가한테 떠들지 말라고….'
눈을 빛내며 지난번보다 복잡해진 내용을 설명하려는 이하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마음 상하지 않고 주제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게.
"그러면, 또 상을 줘야 할까?"
"상, 이요?"
상이라는 단어에 기나긴 설명이 끝을 맞이한다.
평소의 커다란 몸이 아닌 엘프 소년의 몸.
지난번과는 다른 옷을 입힐 수 있다.
뭘 생각했는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그녀.
우리 둘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저 뒤에서
연금술사들이 약초 자루와 실험관을 옮기며 슬그머니 사라진다.
일하다 말고 뭔 짓거리인가 싶은 마음도 있지만
판타지와 성좌가 존재하는 세상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넘어가네.
생각해 보면 암살자 때문에 연금술사와 마법사와 엘프가 모인 상황이다.
무협지와 SF까지 곁들여진 상태니 어떤 상황이라도 당황하질 않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불사르는 폭군의 우주 전함이 아카데미 상공에 떠다닐 때도
굴레를 베어 내는 검이 검 한 자루 믿고 아카데미에 방문할 때도
사람들은 그냥 유명인을 봐서 신기해할 뿐 놀라지는 않더라.
다른 생각을 잠깐 하고 있으니 이하린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성좌 님, 그러면…, 상으로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재잘재잘 떠들던 밝은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마치 시험 떨어진 학생이 성적표 내밀듯 머뭇거리는 그녀.
평소의 빠꾸 없이 들이박는 모습과 너무 달라서 어색하기만 하다.
현실에서는 상을 준다니까 제 취미로 성좌를 이용한 옷 갈아입히기 놀이하고
자각몽 속에서는 성좌에게 봉사하고 싶다면서 무슨 가마니 목욕 시중까지 들더니
이제 와서 머뭇거릴 만한 일이 뭐 있을까 궁금하기까지 하네.
머릿속에서 음란마귀가 난동을 부린다.
문제는 여기가 남녀 역전 세계라는 거지.
남녀가 역전되면 어떤 부끄러운 일이 있을까.
그런 고민하는 내 앞에 서류가 한 장 들이밀어진다.
눈앞에 보이는 큼지막한 단어.
[고 소 장]
●고소인 : 이하린
…
‥
그 아래로 나열된 것은 읽지도 않았다.
대체 뭔데 상을 받겠다며 고소장을 내미는 걸까.
전생에도 보지 못했던 고소장을 여기서 보네.
온갖 상념이 머리에서 빙글빙글 휘몰아친다.
딱 굳어 버린 내 모습을 다르게 판단했는지
슬그머니 그녀의 손이 등 뒤로 되돌아간다.
"그, 너무 주제넘었나요?"
내가 상을 주는 거랑 고소랑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걸 또 주제넘었다고 표현하는 건 무슨 소리일까.
남녀 역전 세상이라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성좌와 화신 관계에 뭔가 있는 건가?
"아니,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더 해 줘."
"아, 네!"
당황한 내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온다.
평소의 컨셉이고 뭐고 명령조로 나온 반말.
그래도 거절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쁜지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그와 동시에 다시 내밀어진 서류를 천천히 읽으니 눈에 익숙한 것이 보인다.
[피고소인은 고소인을 성적으로 모독하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 게시물에 'ㅋㅋ 하루라도 보지를 안핥을 수 없는 인큐버스 창놈이'…]
인터넷에서 웃고 넘겼을 성희롱 댓글이지만
고소장이라는 문구 아래 피고소인, 고소인과 함께 쓰여 있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얘가 무의식 속에서 나한테 양호 가운을 입힐 때부터 예상은 했어야 하는데.
"이거 말고도 좀 많이 있는데요."
"많이?"
"네."
턱 하고 내밀어지는 서류의 더미.
따옴표로 강조된 부분만 슬그머니 읽어도
대충 어디서 나온 글인지 예상이 간다.
그런데 이게 왜 이하린에게 주는 상이 되고
내가 머뭇거리면 주제넘었다는 이야기가 될까.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내게 추가로 설명해 준다.
"원래 이런 건 첫 번째 화신이 주로 맡는 일이거든요…."
성좌는 전자 두뇌를 가진 A.I가 아니다.
당연히 화신이 많을 수록 관심 밖으로 밀려 나는 화신이 늘어난다.
내가 세 명이 화신만 두고 계약자를 더 찾지 않는 이유가 그거였고.
거기에 대부분의 성좌들은 지상에 강림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성좌의 법적 대리인되는 화신은
반대로 말하면 성좌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화신이라는 거다.
내 첫 번째 화신은 한예지.
이하린은 두 번째 화신이다.
화신들끼리의 교류와 기존의 관습을 보면
이러한 법적 대리인은 한예지가 맡아야 할 일.
내가 보기에는 귀찮은 잡무에 가깝지만
화신들이 생각하기엔 성좌와 가까워 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방법이란다.
'걔가 법정에 서서 똑부러지게 일할 수 있을까…?'
머리 한구석에 인터넷 방송을 보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던 한예지의 모습이 스윽 지나간다.
음, 아무래도 이런 건 이하린에게 맡기고 한예지는 다른 방식으로 달래주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