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2화 > (152/169)

< 152화 >

엘프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일본풍의 엘프인지 에로프인지 젖탱이만 큰 종족 말고.

전생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반지의 제왕이라서

길쭉한 신장에 거대한 활을 든 숲 속의 레인져나

쌍검충 또는 단검을 들고 빠르고 유연한 모습,

혹은 정령을 부리며 드루이드와 비스므리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흰 순록이나 늑대같은 걸 타고 다니며

엔트나 드라이어드 같은 숲 정령들과도 친한

말 그대로 자연 친화적인 전사의 종족 겸

깝치면 미간에 화살을 박아줄 것 같은 명사수?

뭐, 대충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렇다.

그러니까 눈 앞의 광경은 너무 낯설어.

"으음, 일단 천사나팔이랑 검은벨라돈나랑, 음…."

세계수의 옆에서 처음 보는 꽃들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연분홍색부터 보라색에 가까운 검은색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쁘기만 한 꽃들.

하지만 엘프로 변한 육체가 본능적으로 깨달아 버린다.

식물들에게 허락받지 않고 만지면 골로 갈 수 있다고.

"저기, 그 꽃들은 뭐야?"

"그러니까, 성역에 서로 침입할 수 있는거지?"

"그렇지?"

나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서로의 성역에 침입할 수 있다.

그러나 뭘 설치하거나 훔치는 둥 물리적인 간섭은 복구되며

성역의 주인이 성역으로 돌아오면 강제로 추방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들지 않는 거목이 떠올린 것은 간단하다.

부비트랩을 녀석의 성역이 아닌 내 성역에 설치하는 것.

"그러면 네 성역에 화분을 잔뜩 놔둔 다음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건 어때?"

밝게 웃어보이는 그녀가 작은 화분 하나를 들어올린다.

연두색 줄기 끝에서 하늘 위를 바라보며 피어난 연분홍색의 꽃.

나팔꽃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름이 정말 천사나팔이라는 꽃이다.

동물이 건드리면 작은 나팔소리를 내며 꽃가루를 뿜는데

이 꽃가루가 치명적인 환각 증세와 탈수를 유발한다고.

그렇게 동물을 제 줄기 밑에 영원히 재워 거름 삼는 식물이란다.

그 외에도 살벌한 녀석들이 잔뜩 튀어나왔다.

대부분 맨 손으로 만지면 꽃가루나 진물이 묻어서

마비, 실명, 탈수, 설사와 구토, 근육 이완이나 경련을 거는 종류.

생긴건 보석 알갱이 같은 동글동글 자그마한 열매거나

손톱 크기의 고운 꽃봉우리들인데 설명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뻔 했다.

내 몸에 해가 없다는 걸 알아도

저렇게 살벌한 소리를 들으면 반응 할 수 밖에.

"음, 이걸 만지긴 할까?"

"집무실이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고 허영심이 많은 편이라며? 거기에 귀해 보이는 물건을 망설임 없이 훔치는 걸 보면 기품은 없고. 관상용으로 인기 좋은 아이들을 두면 하나 쯤은 건드릴걸? 아, 그러면 꽃이나 열매보다는 자그마한 분재가 좋으려나? 교수대덩굴손은 너무 흉하게 생겼으니까 이걸…."

따다다다닥, 마치 단어를 기관총처럼 내뱉는 그녀.

정신을 차려보니 아름답던 정원은 공포영화 속 오래된 저택마냥 변했다.

뿌리 근처를 지나가면 목을 조르는 덩굴이라니 어디 영화에서 볼 법한 놈이네.

그 살벌한 설명에 조금 움츠러든 채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러면 나도 위험한 거 아니야?"

"응? 얘들이 엘프를 공격할 리 없잖아."

그러더니 무슨 소리를 하냐며 깔깔 웃는다.

하기야, 엘프가 식물한테 공격당한다니.

새끼 물고기가 물에서 익사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는

아주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내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것 처럼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휘두른다.

꽃을 툭툭 건드리더니 덩굴을 붙잡고 악수하듯 흔드는게 아닌가.

당연히 꽃가루나 독액이 튀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되려 꽃과 덩굴에서 툭툭 떨어지는 씨앗을 내게 건내준다.

"화분도 몇 개…, 아니구나. 화분은 만들 수 있지 않아?"

"만들 수 있어."

"그러면 이 아이들만 먼저 데려가서 한 번 심어보자."

환각부터 실명까지 다양한 증상을 유발하는 독초 씨앗을

무슨 유치원 교사가 애한테 간식 주듯이 툭 건네주는 그녀.

뭔가 이상하지만 이것이 엘프의 감각인가 싶어 넘어가도록 했다.

손 안에 들어온 열 댓개의 씨앗들.

손가락 한 마디짜리 작은 놈들이 그리 위험하다니 신기하네.

물론 이걸로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 죽일수는 없겠지.

아무리 허접하다고는 해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성좌니까.

그래도 이 정도 독초라면 골탕은 멕일 수 있으니까

양호실 플레이와 하교길 카섹스의 원수는 갚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으로 복주머니 비슷한 작은 주머니를 만들었다.

아무리 해가 없다지만 독초의 씨앗을 주머니에 넣기엔 찝찝해.

"그래서, 내가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도와줄 수 있는 일?"

곰곰히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물론 그녀의 능력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녀가 꽤 오래되고 강력한 성좌라는 게 오히려 문제인 상황.

이 평평지구 세상에 끌려온지 얼마 안된 성좌도

아카데미에 강림시키는 데 어마어마한 제물을 처박았다.

그렇다면 중견급 화신인 시들지 않는 거목을 부르려면 얼마를 박아야 할까.

식물을 피워내고 동식물과 소통하며

사람들에게 세계수의 가호를 내릴 수 있는 엘프.

나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 측에서도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도움을 위해서 수 십억에 달하는 예산을 꼴아 박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생각을 하느라 잠시 찌푸린 내 미간만 보고서 눈치 챈 걸까.

다시 한 번 씨익 웃은 그녀가 검지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을 살살 쓰다듬는다.

"내가 도와준다 해서 아카데미까지 가겠다는 건 아니야?"

눈치가 빠른건지 내 얼굴이 뻔한건지.

덩치가 클 때는 무뚝뚝한 인상이라 생각하는데

엘프 소년의 몸이 되면 어째서인지 빤히 읽힌다는 기분이 든다.

으음, 같은 엘프라서 더 그런건가?

동양인은 서양인을 구분 못하고

서양인은 동양인을 구분 못한다는 소리도 있었으니까.

"아, 그러면-"

아직까지도 사고방식이 꽤 굳어있다는 걸 느끼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웃는 걸 보니

뭔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자극받았으니까.

독초 이야기도 그렇고 강림 이야기도 그렇고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서는 어린애 취급 당하는 것 같다.

물론 실제 연령으로만 따지면 어린애가 맞긴 한데.

"체포한 화신에게 연금술사가 붙어서 이것저것 실험하고 있거든. 그런 쪽으로 좋은 약초가 있을까?"

"당연히 있지. 대부분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아이들인데, 잘 정제하면 질 좋은 자백제가 되어 준다고 해. 마왕군의 첩자나 숲 밖으로 향한 배신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였으니까 무력화 된 화신에게는 꽤 잘 통할거야. 그거 말고도 연금술사에게 유용한 촉매, 마법사에게 유용한 촉매, 그리고 제사에도 쓸 수 있는 꽃들이 있는데 챙겨가도록 해."

마치 정답을 맞춘 초등학생에게 상을 주는 교사처럼

배시시 웃어보인 그녀가 무언가를 또 잔뜩 꺼낸다.

내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다양한 자루에 담긴 풀 쪼가리들.

연금술사와 이하린에게 건네주면 알 거라는 말과 함께 내게 주어진다.

배시시 웃는 얼굴에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어볼 뻔 했지만

질문을 던지기 직전에 한예지와 함께 온 정아린이

그녀의 화신이자 드루이드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생포한 화신을 관리하는 게 그녀의 화신인 정아린인데

당연히 성좌인 그녀도 알고 있는게 당연하겠지.

솔직히 말해서 농부를 구경하느니 아카데미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또 뭐 필요한 거 있어?"

한 방 먹였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는 그녀.

저 특유의 얼굴을 보니 또 골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어린 동생 취급하면서 얼러주는데, 그런 취급을 못하게 막는 방법이 하나 있지.

"필요한 거, 있는데?"

"음? 뭐가 더 있으려나?"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갈 줄 알았는지

필요한 게 더 있다는 말에 눈을 댕그랗게 뜨는 그녀.

하지만 깜짝 놀라게 하려는 걸로 만족할 리 있나.

그대로 약초 주머니를 땅에 툭 떨어트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후욱, 코 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풀꽃의 향기가 느껴진다.

"어, 읍?!"

자그마해진 육체를 이용해 그대로 목에 팔을 휘감으며 키스.

그 보드라운 입술에 짝 달라붙어 혀로 톡톡 두드린다.

봄날의 꽃봉우리가 순식간에 개화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붉게 물드는 뽀얀 뺨.

"흐아, 너, 너어-"

이 진득한 키스가 자신을 골리기 위한 걸 알아차렸는지

입술을 손등으로 스윽 훔친 그녀가 나를 샐쭉하게 노려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겉 껍데기는 엘프지만 그 속에 든 것은 몽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핵 전쟁을 겪어도 사그라들지 않은 성욕이 잠들어 있는데.

"이런 장난이나 치고, 옷?"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워 한 소리를 내뱉으려던 그녀지만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껴안으며 입술을 들이미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낮에 놀림 받고 어린이 취급 받는게 뭐 어떤가

남자가 밤에만 이기면 되는 거 아닐까.

낮져밤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건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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