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1화 > (151/169)

< 151화 >

침대에 누워 마치 커다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저 보드라운 여체를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노을도 지지 않았던 이른 오후의 학교.

눈을 몇 번 깜빡이니 노을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온다.

눈 앞에 있는 건 퇴근 준비를 하는 양호 교사인 나와

교복을 주섬 주섬 챙겨 입으며 차를 얻어타려는 이하린.

몇 초만에 중요한 부분이 전부 생략되어버렸다.

'이 씨발, 이쯤 되면 노리는 거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도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

지난번 한예지와 있을 때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방해만 들어왔다 싶으면 거사 직전에 들어올까.

아카데미에서 환자를 돌보던 중이라던가

다른 성좌의 성역에 놀러가 수다를 떤다던가

평범히 쉬고 있는 상황에선 방해가 한 번도 없었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곱게는 안 죽인다.'

이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남자가 아니라 짐승 수컷이여도 화가 나겠다.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은 겪게 하더니

그 끝의 달콤한 과실을 못 먹게 방해해?

'하다 못해 기다리는 동안 오던가.'

목덜미가 누군가에게 쭈욱 잡아 당겨지는 느낌.

자각몽에 처음 들어갔을 때 어색하게 느껴지던 그 감각이다.

완전한 몽마가 된 상황에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처럼

목덜미가 근질근질한 감각을 느낄 이유는 딱 하나.

누군가 내게 마력을 사용해 간섭하고 있다는 것.

잡아 당기는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날린다.

사람이 탔는데 시동은 걸리지 않고 들썩거리는 자동차가 시야 구석에 담긴다.

교복부터 자동차까지 이하린에게도 좀 다양한 욕망이 쌓였구나.

내가 즐겼어야 할 일이 무의식 속의 한낱 꿈이 되어버리다니.

한층 더 치솟아오르는 살의를 느끼고 있자니

시야가 빙그르르 돌며 익숙한 풍경이 눈에 담긴다.

방 한구석을 가득 채운 TV 스크린과 옆에 놓인 컴퓨터.

방 구석에서 자라나 천장까지 닿아버린 세계수의 굵은 가지.

그리고 그 밑에 이불이 흐트러진 채 방치된 내 침대와

바닥에서 데구르르 굴러 책상 위로 올라가는 돌멩이.

그리고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누군가의 잔상.

"뭐야, 씨발?"

중력을 거스르며 책상 위로 다시 올라가는 돌멩이.

그리고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사라진 사람의 형상.

처음에는 내가 헛것을 본 줄 알았다.

흐트러진 이불이 펄럭이며 움직이더니

의자와 냉장고 등 잡동사니가 마구 움직이지 않았다면

정말 헛것을 본 거라고 생각했겠지.

중력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마치 비디오를 되감는 것 처럼 방이 움직인다.

그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멀쩡한 것은 딱 하나.

고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계수의 가지.

그러니까, 내가 향해야 할 곳은 명백하게 정해져 있었다.

"세계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응, 아직 내가 그 쪽은 미숙해서."

커다란 덩치에서 엘프 소년의 몸으로 육체를 변형한 상태.

그러나 내 능력만으로는 세계수와의 대화는 무리였다.

예전에 드루이드의 권능을 훔쳐 배워서 나무 팔찌의 시야 공유까진 했던거 같은데.

뭐 어쩌겠는가.

내가 못하면 남한테 부탁이라도 해야지.

부탁이 아니라 애원을 해서라도 그 썅년을 잡는다.

나를 방해한 게 누군지는 모른다.

내 성역에 이상 현상이 일어난 이유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 새끼라면 지금 상황에 의심할 건 딱 한명.

추방당한 뱀의 심장.

내가 그녀의 성역에 들어갔던 것 처럼

그녀 또한 내 쪽으로 들어온다던가 하지 않을까?

존나 뜬금없이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침입자를 의심하는 것 보다는

나와 엮여 있는 성좌인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의심하는 게 맞지.

당연하지만 불사르는 폭군이나 굴레를 베어 내는 검은 용의선상에서 제외.

그 양반들이라면 몰래 침입하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 째로 나를 박살낼 수 있다.

시들지 않는 거목과 충성스러운 송곳니는 남의 성역에 들어 갈 능력이 없고.

"으음, 방금 전에 본 걸 그대로 보여주면 될까?"

한창 정원을 가꾸는 중이었는지 물뿌리개와 밀짚모자를 내려두고

도도도 달려와서 안부를 묻듯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이 고맙기 그지 없다.

"응, 부탁해. 그리고 고마워."

다짜고짜 방문해서 엉뚱한 부탁을 하고 있지만

배시시 웃어보인 엘프 소녀는 망설임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위로 향한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엘프의 전통 복장 때문에

잔털 하나 없이 뽀얀 겨드랑이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성욕이 잔불처럼 들끓지만

지금은 성욕보다는 스트레스의 해소가 먼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손 끝으로 옮겼다.

정원 한 구석을 차지한 큼지막한 나무에서

마치 구렁이같이 두꺼운 덩굴이 슬그머니 기어내려온다.

식물을 움직이기는 커녕 직접 접촉해야

남의 권능을 빌리는 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

하기야 그녀는 날 때부터 지금까지 엘프로 살아왔고

나는 몽마가 된 상태로 엘프의 껍데기만 빌린 상태니까.

"응, 어, 음…?"

나무줄기를 쓰다듬던 손 끝에 색이 다른 잎사귀가 얹힌다.

녹색의 줄기 끝자락에서 톡 떨어진 푸르른 잎사귀.

그 새싹을 집어들어 쓰다듬던 그녀의 고운 미간이 와락 찌푸려진다.

그림처럼 살며시 감은 눈이 질끈 감긴다.

그러더니 눈꺼풀이 슬그머니 올라가 반개한 눈이 되고

흐음, 흐음 소리를 내며 자그마한 콧망울이 씰룩인다.

"자, 여기 있어."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화가 난 모습.

솔직히 말해서 늘 웃는 얼굴인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단처럼 부드러운 자그마한 잎사귀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마치 CCTV와 비슷하게 내 방을 내려보는 시야.

식물에게는 눈이 없다지만 세계수의 가지가 내 방을 내려보는 것이겠지.

저 구석, 침대의 맞은편이자 TV 스크린의 옆에서 누군가 등장한다.

당연하게도, 등장하는 건 추방당한 뱀의 심장.

원해서 온 것은 아닌지 그 오만한 표정 없이 화들짝 놀란 상황이다.

내가 꿈속 도시에 가다가 갈림길에서 그녀의 성역으로 간 것 처럼

그녀도 성역과 지상을 오가다가 내 성역으로 쑥 들어왔나보다.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

그러더니 책상 겸 식탁 위를 쓸어보다가, 냉장고를 열어보고

컴퓨터와 TV 스크린을 빤히 바라보며 내 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황금색 돌멩이를 발견하고 슬쩍 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저, 씨발년이 진짜.'

황금색 광채를 띄고 있으며 마력 파장에 맞춰 두근두근 움직이는 돌멩이다.

수석이라 해야 할까, 고풍스러운 장식품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멋지긴 하지.

그렇다고 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떨어진 주제에 망설임 없이 훔쳐가?

주머니에 돌멩이를 집어 넣은 그녀가 향한 곳은 스크린 옆의 컴퓨터.

컴퓨터를 보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녀가 내 성역의 시스템을 담당하는 컴퓨터를 건드려서 그런 걸까?

갑자기 침대쪽에 보라색 안개가 휘몰아치고 내가 등장한다.

그와 동시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그녀가 휙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돌멩이만 덩그러니 놓인 상황.

그 뒤의 일은 내 눈으로 본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시간을 되돌려 원상복귀를 시키듯이 물건이 움직이는 모습.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사라진 자리에 있다가 톡 떨어진 돌멩이가

제 혼자 데구르르 굴러서 책상 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냉장고를 뒤져보며 건드린 음식들이 정렬되고

사방팔방 헤집으면서 건드린 이불과 의자 따위가 다시 되돌아간다.

"음,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러니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온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내게 묻는다.

그 모습에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낀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했다.

내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의 성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일.

그 안에서 이것저것 건드렸지만 마주칠 수 없게 쫒겨난 일.

반대로 추방당한 뱀의 심장도 내 성역에 들어올 수 있으며

들어 갈 수는 있어도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것 같다는 추측까지.

'어쩐지, 만년필이랑 페이퍼 나이프가 사라졌다 했어.'

처음 들어갔을 때 목덜미에 쑤셔 박으려고 챙겼던 만년필.

그게 손 안에서 사라진 걸 눈치 챘어야 했나.

'저러면 부비트랩도 의미가 없나?'

여차하면 악몽 속에서 살인마들이 희생양을 사냥할 때 쓰는

대인용 부비트랩이라도 잔뜩 설치해 둘까 생각했는데

물건들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꼴을 보면 의미가 없어보인다.

"저 여자가 불사르는 폭군이 찾는 타락 성좌라는거네?"

"응, 맞아."

피아노선에 걸리면 나무 가시가 머리를 박살내는 트랩이나

책상 서랍을 열면 권총이 발사되는 트랩 같은 걸 떠올리다 말고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리는 시들지 않는 거목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웃는 얼굴도 여전하고   목소리도 변한 건 없는데

어째서인지 본능이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

"세계수의 가지는 성역과 관계 없이 독립된 것 같으니까… 씨앗이라도 심어볼까?"

배시시 웃는 그녀가 세계수 줄기를 확 잡아당긴다.

평소와는 다른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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