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갑작스럽게 남의 집무실, 정확히는 성역에 들어 왔지만
몽마가 되고 나서 이런 공간이동을 한 두 번 겪은 것도 아니니
나는 빠르게 적응하고 주변을 뒤져보았다.
근육 괴물이 쫓아오는 낡은 지하 시설이나
순찰하는 괴물을 피해 퍼즐을 푸는 낡은 저택에 비하면
깨끗하고 고풍스럽게 꾸며진 집무실은 천국 아닐까.
'이것도 폭군이 노린 건가?'
갑자기 남의 성역으로 이동한 건 이상하지만
이 돌멩이를 준 게 불사르는 폭군이란 걸 생각해 보면
아미 이런 용도를 위해 준 게 아닐까 의심이 된다.
다른 성좌의 성역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고
그 방법을 실행하기 위한 재료와 능력까지 전부 있는 데
딱 몽마만 없어서 나한테 잘해 주는 거 아닐까.
뭐 그런 합리적인 의심.
귀 잘린 시퍼런 고양이 로봇이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뭔 일을 부탁할 때마다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 힌트를 같이 주니
아무리 생각해도 몽마 빼고는 다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을 뒤져보았다.
원룸을 베이스로 한 내 성역과는 달리 볼 게 많았으니까.
'뭐 있는 게 없네.'
하지만 성역은 성역이라 그런 걸까.
뒤져볼 게 많았지만 쓸모 있어 보이는 건 없다.
책상 서류철에는 백지가 한가득 들어 있고
서랍장 안에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책꽃이의 책은 표지만 있고 내용은 빈 상태.
굳이 따지자면 이 곳은 집무실이 아니라 집무실 모형이라 불러야 할 수준.
괴물에게서 도망친다는 명확한 목적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풀 수 없던 퍼즐판이 눈앞에 대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인 없는 방에 목적 없이 들어 가서 뭘 하겠냐고.
차라리 무슨 추리 게임의 꿈을 꾸는 것처럼
뭘 주울 때마다 진행률 10% 같은 메시지나
중요 단서 획득! 같은 메시지라도 나왔으면 좋겠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은 꿈속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
그런 편의주의적 메시지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십분 동안 내가 얻은 것은 꼴랑 두 개뿐.
책상 위에 멋들어지게 올라와 있던
만년필과 페이퍼 나이프가 전부였다.
'날을 좀만 더 세우면 가능할 것 같은 데… 이걸로 목을 쑤셔버릴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불사르는 폭군이 원하는 건
내가 성역에 침입해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죽이는 거 아니었나.
뭐 산 채로 잡아 오라고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폭군을 여기로 옮겨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니까.
페이퍼 나이프는 너무 뭉특하지만
만년필의 펜촉은 꽤 예리하게 가다듬어진 상황.
집무실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오면
그대로 목덜미를 쑤셔볼까.
그리 생각하며 만년필을 손에 꾸욱 쥐었다.
지적 허영심을 위해 겉 껍질만 존재하는 책꽃이의 서적이나
뭐라도 있는 것처럼 위장한 서류철과는 달리
만년필은 취미의 영역이었는지 꽤 고급스럽다.
나야 만년필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묵직한 나무 몸체와 사인이 음각된 금빛의 펜촉은
겉으로만 봐도 필기용품 보다는 사치품처럼 보이니까.
좀 불편할 정도로 묵직하고 커다란 만큼
사람 목에 쑤셔 넣기엔 좋아 보이기도 하고.
그리 생각하며 텅 빈 집무실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내가 나의 성역으로 돌아올 땐 대부분 침대 근처,
그러니까 세계수 가지 근처에서 정신을 차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추방당한 뱀의 심장도 어디선가 등장하겠지.
내가 들어 온 것처럼 저 커다란 나무문이 열리고 들어오던가
아니면 이 큼지막한 사장님 의자에서 등장하던가.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 성역인 만큼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게 당연하지 않다.
그리 생각하며 양 쪽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그 순간 저 집무실 입구에서 푸른 마력광이 보였다.
범죄자의 기억 속에서 봤던 마력광이 번쩍거린다.
'이걸 바로 등장하네.'
거리는 딱 세 걸음.
시야의 밖에서 달려 들어 목덜미를 노릴 수 있는 각도.
번쩍거리는 빛이 잦아들고
그 안에서 눈을 감고 있던 여성이 등장한다.
역수로 쥔 만년필을 들고 한 걸음.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젖쪽을 향해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째.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듯 만년필을 휘두르려는 찰나-
"…성좌님? 무슨 일이세요?"
"음?"
깡!
만년필 없이 허공을 가르며 휘둘러진 맨주먹에
창밖으로 나가려던 네비게이션 드론이 내리찍혀 떨어진다.
"로봇에 오작동이라도 있었나요?"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집무실.
그러니까 추방당한 뱀의 심장의 회장실이 아니라
김하은이 홀로그램에 둘러 싸여 도시를 만지작대는 공간이었다.
※
세상 만사, 날로 먹을 수 있는 건 없나 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도해 본 결론이었다.
'가면 뭐 하냐, 만날 수 없는 데.'
꿈속에서 꺼낸 장도리 하나 들고 다시 한 번 집무실에 들어갔었다.
입구 쪽에서 등장하니 곧바로 뒷머리를 후려칠 수 있게
나무문을 등지고 꽤 오랜 시간 기다렸었지.
하지만 마력광이 사라지고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등장하기만 하면
내가 뭘 해 보기도 전에 이 도시로 강제 추방당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들어 갈 수 있는 이유를 모르니까
마찬가지로 쫓겨나는 이유도 모르는 거지.
'역시 연구 결과를 기다려야하나?'
그렇게 내 하루 일과는 크게 삼 등분 되었다.
한예지와 함께 아카데미 환자동을 돌아보는 오전.
이하린과 연금술사의 합작을 지켜보는 오후.
김하은이 열심히 조작중인 도시로 향하는 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니?"
"네, 특이한 환자는 없네요. 남 대륙쪽에서 대규모로 올라온 것 말고는 별일 없어 보여요."
아카데미를 걷고 있으면 꾸벅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
영혼을 치료해 주는 몽마로 대놓고 아카데미에 숙소를 지어놓은 상태.
그런 상태로 거의 1년 넘게 생활했으니 유명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일종의 아카데미 마스코트가 된 것 같았다.
까놓고 말 하자면, 이 육체는 이쪽 세상의 섹시함의 표본이니까.
내 입으로 말 하긴 좀 웃기지만
전형적인 섹시 양호교사 같은 존재 아닐까.
3대 500은 가뿐할 것 같은 근육맨의 육체로
섹시 양호교사 같은 단어를 접붙이다니.
물론 내가 생각한 단어가 아니다.
한예지가 보던 사이트에 올라온 말이지.
"그래서 시간이 남으면, 백색 가운이라도 준비 해 줄래?"
"아으, 성좌니임, 진짜 죄송하니까…."
"싫다는 말은 안 하네."
시뻘겋게 변한 뺨을 콕콕 찔러본다.
한예지가 이렇게 부끄러워 하는 건
지난밤에 꿨던 자신의 꿈 때문이다.
유명한 성좌와 화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인터넷 방송을 즐겨보는 한예지는 물론
성좌 오타쿠인 이하린도 들어 가는 유명 사이트.
예전에 한예지 팀에게 커피를 사 주는 내 사진이 올라갔던 그 사이트다.
우주 전함과 미래 SF의 병기의 디자인 토론을 나누기도 하고
전생의 지구처럼 성좌와 화신을 놓고 VS 놀이를 하기도 하는 곳.
당연한 이야기지만 익명을 유지하는 사이트니 엄한 말이 오가기도 한다.
[아카데미 가면 몽마 양호선생이 있다며?]
― 현실에서 초능력 마법 쓰는 것도 부러워 뒤지겠는데
힘들어서 양호실 가면 인큐버스가 있다?
비화신들 배알꼴려서 살겠냐 이거
ㄴ 인큐버스가 아니라 몽마 병신아
ㄴ 그게 그거 아님?
ㄴ 종족 구분 못 하면 성화갤 왜함?
ㄴ 이 새끼 흡혈귀랑 뱀파이어랑 다른 거 모르는 병신임
시작은 별거 아닌 인터넷의 뜬소문이었다.
영혼을 고치는 작업이 어쩌다 양호 선생으로 와전되었는진 모르겠네.
그리고 저 내용도 없이 헤으응 거리는 짧은 글이 왜 불판이 되었는지도.
아무튼간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시간을 보내던 한량들에겐
아카데미와 성좌와 희귀종족 몽마를 동시에 언급하는
저 짧은 글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이름이 아카데미라고 씹덕물에 나오는 아카데미가 아님]
[아카데미에 양호실이 있기는 하냐?]
[아카데미 다녀온 거 인증한다 ㅋㅋ]
[아카데미 내부 사진.jpg]
사이버 망령들이 달려 들었고 이야기의 주제는 내가 되었다.
정확히는 영혼을 치료하는 몽마에 대한 이야기.
성좌와 화신에 관련된 갤러리, 성화갤이라 해도
누구나 접속해서 정보를 볼 수 있는 온라인 게시판이다.
당연히 뜬소문도 넘쳐나고 성좌나 화신이 아닌 이용자도 잔뜩.
그중에는 상대가 화신이던 성좌던 전혀 상관없이
제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들이 박는 미치광이도 있는 것이다.
[몽마 성좌한테 가면 야한 꿈 씹가능?]
― 훈련 끝나고 땀범벅이 된 상태로 양호실 찾아가면
새하얀 가운 입은 몽마가 고생했다면서
상태 보지도 않고 바로 침대에 눕히는 거임
파스만 받아서 가려 했는데 눕자마자 갑자기 잠들었더니
꿈속으로 들어 온 몽마가 시간은 충분하다면서
ㄴ 이젠 1화도 아니고 0.5화만 들고 오네 개새끼가
ㄴ 이 새낀 장편 완결할 때까지 1년차단 안됨?
ㄴ 미친년이 라고할뻔 안붙임?
ㄴ 뭘 라고할 뻔임? 벌써 캡쳐 따였을걸
[인큐버스가 양호실에 있어도 되냐?]
― ㅋㅋ 하루라도 보지를 안핥을 수 없는 인큐버스 창놈이?
씨발놈 근데 존나 꼴린다 귀두를 씨벌 확 혓바닥으로
존나게 농락하면서 불알 주물러주고 싶네 ㅋㅋ
고소가 무서우니까 여기까지만 한다 ㅋㅋ
ㄴ 야 씨빨 갤 터진다 완장!
ㄴ 대피소 미리 파둘까?
ㄴ 얘는 공중파 뉴스에서 만날 수 있겠는데?
전생에도 변호사한테 패드립 박던 악플러 가 있는 데
이쪽 세상이라고 악플러의 뭐가 다를까.
웹서핑을 하다 섹드립을 먹는다 해도
전생의 게임 채팅에 적응을 마친 상태니까
그냥 웃고 넘겨버릴 수 있는 수준.
그렇게 한 때의 일로 지나갔나 싶었는데-
"…꽤 인상 깊게 봤나 보구나."
"아뇨, 그게, 그게 아니라아…."
한예지의 꿈속에서 내가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