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열정적으로 어필한다.
그 광경을 보고 이하린이 귀엣말로 누가 누구인지 설명해준다.
'저 마녀분은 서 대륙에서 결계학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아, 저쪽 신사분은 해부학쪽으로 가닥을 잡으신 계파의 장로분이시네요.'
'으음, 저 마법사는 강력범죄 대응으로 네크로맨시 계파로 알고 있는 데.'
어째 들리는 말 마다 흉흉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세히 들어 보면 다 납득이 가는 이유가 있다.
결계학이나 원소술사들은 둘째치고
해부학이니 네크로맨시니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과학수사대 같은 사람들이니까.
죽은 사람들을 조사하는 마법사들이라 그런지
아직 살아 있는 범인을 죽여버릴 것 같아서 문제지.
살아 있는 사람을 부검하겠다는 소리를 왜 하는 거야.
'심문을 취소시켜야하나?'
마법사들의 직업적인 특징 때문일까?
퀭한 눈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내게 어필하는 와중에
조금 불안 하니까 없던 말로 하자고 말 하기는 힘들다.
눈이 빛난다는 게 그만큼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다.
자기들끼리 묘한 자존심 경쟁이라도 붙었는지
마력이 웅웅 울어대면서 정말 안광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으니까.
성좌의 앞이라던가, 아카데미라던가 그런 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싸울 수준으로 과열된 회의.
"저기, 저거 괜찮은 거니?"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치렁치렁한 숄을 입은 남자가 볼링공만 한 수정구를 휘둘러
옆자리에서 비아냥거리던 양복 정장의 여성을 후려친 것 같은 데.
대놓고 멱살잡이만 없을뿐
은근슬쩍 싸우기 시작하는 마법사들.
그러나 이하린은 평범하게 받아 넘기고 있었다.
이게 마법사들의 평범한 일상인가?
"아니,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까요?"
"…뇌를 뽑는다던가 부검한다는 등, 육체를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부탁할게."
"음, 그것도 그렇네요. 결계에 관한 것보다 마력적 연결의 연구쪽이 더 중요하니까요."
마력을 움직이고 있어서일까?
그 조용한 난장판에서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 희비가 갈린다.
당연히 밝게 웃는 건 뇌를 뽑지 않고 검사할 수 있다던 마법사.
울상이 된 건 수정 두개골을 든 네크로맨시 계열의 마녀들이다.
선택 받지 못 하리라는 걸 깨달은 마법사들이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회의실에 남은 것은 대충 열 명이 되지 않는 인원들.
서로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자기 소개를 한다.
그중 고민이 되는 것은 셋.
최면을 이용해 무의식을 입 밖으로 내뱉게 할 수 있다는 마녀.
육체의 감정과 기억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이코메트리 남성.
연금술을 통해 강력한 자백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여성까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범인을 멀쩡하게 다룰 것 같은 세 사람이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내뱉게 하는 것, 그게 최면의 묘미죠."
"혀 끝으로 내뱉어지는 말에 무슨 진실이 담겨 있겠습니까? 뇌 깊은 곳에 꼭곡 숨은 무의식의 공간을 탐구하는 것, 그게 저희의 본분입니다."
"저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얼간이들을 만나면 그걸 구분 못 하죠. 육체에 가해진 모든 제약을 벗어 던지도록 약물에 푹 절이시는 건 어떠신지?"
그래도 선택 받는 건 하나.
그걸 잘 알기에 세 사람이 열렬하게 어필한다.
결계를 스윽 지나친 게 그렇게까지 궁금한가?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야 나는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까.
마력을 때려 박으만 마법이 나간다는 거 말고 아는 게 없는 상황.
그렇기에 슬쩍 시선을 이하린 쪽으로 돌렸다.
"어느 쪽이 좋겠니?"
"으음, 역시 연금술사쪽이 좋겠죠?"
이하린의 자그마한 목소리조차 놓치지 않았는지
세 마법사와 마녀의 얼굴이 확확 바뀐다.
그래도 성좌 앞이라 그런지 따지고 들지는 않네.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두 사람,
최면술사와 사이코 메트리가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왜 연금술사를 고른지 알려 주겠니?"
"최면과 사이코 메트리는 결국 몽마의 능력과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 말에 세 명의 마법사가 납득했다는 듯 눈동자를 굴린다.
몽마 성좌 앞에서 자기가 몽마보다 대단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
실제로도 몽마라는 종족이 좀 사기적인 부분이 있고.
달리기를 아무리 연습한 육상 선수라 해도
표범이나 치타 같은 동물이랑 겨룰 순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렇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심?
아마 눈을 바라보는 독심술을 좀 더 익히면 내가 더 잘하겠지.
무의식의 공간을 탐구하여 뇌 깊은 곳을 탐구해?
나는 무의식의 공간과 인간의 근원에 직접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선택해야 할 조력자는 연금술사.
내가 생각하는 자백제 같은 약물을 만들어 줄 수 있겠지.
아마 이하린도 나와 비슷한 의견 아닐까?
"거기에 마법적인 제약이 걸려 있다면 그걸 해제할 땐 연금술사의 도움이 필요하구요."
"그렇구나, 하기야 뭔가 조치를 취해 놨겠지."
이어지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 암살자들은 맨날 어금니에 독약을 넣고 다니지 않나?
흑 마법사와 손을 잡은 배신자들은 뭘 말 하려 하면 금제가 걸려 있고.
이 쪽 세상에서도 당연히 그런 게 있겠지.
불사르는 폭군에게 대놓고 덤벼드는 형태였다.
설마 지 화신한테 제약 하나 걸어두지 않았을 리가.
해맑게 웃는 연금술사와 달리
우울하게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친위대를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알아듣지도 못 하는 회의에 껴서 뇌만 혹사한 것 같네.
나머지는 그냥 그녀에게 맡겨놔야지.
※
그 뒤의 일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조금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지만 어쩌겠는가.
만화나 소설 속 마법사처럼 번쩍번쩍 뿅! 하지 않고
수십 개의 수학적 그래프와 내가 알지 못 하는 전문 용어가 오갔으니까.
'역시, 이하린에게 맡기길 잘했어.'
저 전문적인 대화에 끼느니 김하은이랑 대화를 나누고 말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법사들과 연금술사의 토론으로부터 슬쩍 빠져나왔다.
이하린의 부탁으로 패션쇼를 할 때 슬쩍 나타난 김하은은
현실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을 대충 끝마치고 다시 꿈속 도시로 향한 상태.
로봇이 튀어 나오는 거 말고 뭔가 더 흥미로운 것이 있는 걸까?
할 일이 없어서 밖으로 빠져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꿈속 도시에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네.
방구석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귀한 물건 치고는 되게 볼품 없이 굴러다니지만
아카데미 성좌의 숙소 침대 옆보다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돌멩이를 향해 마력을 보내고
마치 키 카드를 통해 입구로 들어 가듯
나의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갈림길.
'뭐여, 시벌.'
여기서 쏙 들어 가면 꿈속 도시가 등장하는 거 아니었나?
옷장을 열었는데 나니아 왕국이 나온 것처럼 놀랐다.
반투명한 유령 상태로 동동 떠 있는 상태로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길을 보면 누구나 놀라겠지.
오른쪽으로 가면 꿈속 도시가 나온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왼쪽은?
몽마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경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나온다고 짐작조차 하지 못 하는 상황.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향했다.
위험하지 않다면 호기심 해소가 우선이니까.
꿈속에서의 요령을 살려 왼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몽마도 아니고 유령마냥 동실동실 떠다니는 상태로.
생각보다 기나긴 길 끝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 문.
물론 크다고 해서 10m를 넘는 그런 거대한 문이 아니다.
고풍스럽게 만들어 진 두 짝짜리 여닫이 문과 호화스러운 손잡이.
뭔가 잔뜩 음각되어 있는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집무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책상.
회장님 책상이라 해야 할까, 짙은 고동색의 나무 책상이 보인다.
쓸 데 없다고 생각 될 정도로 커다란 책상에는
비서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은 들어 갈 것 같다.
그 외에도 뭔가 다양하게 있었다.
바닥에는 카페트가 곱게 깔려 있고
책상 근처에는 손님용 테이블도 있다.
벽에는 책상과 같은 색 책꽃이가 있네.
뭐, 전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드라마 속에서 본 회장실이다.
저 커다란 의자와 책상에 앉아 있던 회장이 얼굴을 붉히고 벌떡 일어나
서류 들고 들어 온 비서한테 노발대발 재떨이 던지는 그런 장소.
그러니까, 저 커다란 자화상만 보지 않았더라면.
'안쪽팔리나?'
책꽃이의 반대편, 휑 한 벽면에 커다란 자화상이 하나.
저것만 없었다면 내가 왜 회장실에 들어와서 이러고 있나
혼란스러움을 느끼다 그냥 쏙 나가 버렸겠지.
'좀 부담스럽게 큰데.'
뭔 놈의 자화상이 나 보다 클까.
내 키가 거의 190cm 언저리니까
저 자화상은 적어도 2m x 2m의 어마어마한 크기라는 뜻 아닌가.
날카로운 눈매에 조금 비뚜름하게 웃는 입가.
드라마 속 악역 여주인공처럼 생긴 여자.
그리고 내가 이 곳에 오기 전 실컷 봤던 얼굴.
초상화와 집무실의 주인은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었다.
내가 여길 왜 들어 온거지?
아니, 그 전에 왜 저 돌멩이랑 이 새끼의 성역이 연결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