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남자나 여자나 생각하는 건 똑같구먼.
새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잠구며 그리 생각 했다.
손목의 이걸 뭐라고 부르더라, 커프스?
검은 양복 정장에 흰 와이셔츠.
이 쪽 세상의 명품 시계와 넥타이, 구두까지.
오타쿠라는 딱지를 장식삼아 달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벌써 몇 번이나 갈아입은 지라 조금 귀찮긴 하지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화신들의 반응이 꽤 재미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코스프레 같은 걸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포상을 받고 싶다는 이하린이 요구한 건 간단했다.
"이, 이걸 입어주실 수 있나요?"
마법적 처리가 된 옷장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다양한 옷들.
척 봐도 수 십벌은 되는 옷을 좀 입어달라는 부탁이었다.
한예지가 월급을 쓸 줄 몰라 저금을 하는 동안
이하린은 아카데미에서 받은 돈으로 내 옷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월급을 쓸 줄 몰라서 편의점 감자칩 사 먹는 한예지도 좀 그렇지만
지금까지 모은 월급으로 나한테 입히고 싶은 옷을 사 모은 것도 대단하다.
"…이거면 되겠니?"
"네!"
이렇게 열광적인 모습은 처음 보길래 받은 옷을 입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하린이 선을 넘지 않기 때문에 거부감도 없고.
코스프레랍시고 헐벗고 좆같은 옷을 입히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포상이랍시고 나한테 이상한 부메랑 빤쓰나
사타구니가 거의 보일 법 한 이쪽 세상 섹시 아이돌 복장
그딴 걸 입어달라고 건네줬다면?
화신이고 포상이고 뭐고 꿀밤 몇 대 놔준 다음
꿈속에서 아랫도리로 혼쭐을 내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하린은 프로 오타쿠였다.
그러니까 사람이 불쾌하지 않게 전도 한다고 해야 하나.
다짜고짜 야애니 들이대는 'WLS' 같은 오타쿠가 아니라
일반인이 봐도 부담감 없는 것부터 천천히 선을 지키며 알려 주는 느낌.
가장 처음에 건네받은 옷이 아카데미 생도복이었다.
당연히 노출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복장.
짙은 남색의 정복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와 있고
활동성을 중시한 조금 얇은 와이셔츠도 팔목까지 가린다.
거기에 행사용 흰 면장갑과 빵모자 비슷한 걸 쓰니
드러난 피부라고는 목덜미와 얼굴이 전부.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본 적 있는 제복이니까
남녀 역전 세상이고 뭐고 입어주는 데 거부감은 없었다.
생도복을 입고 있으니 정신을 차린 한예지가 찾아와서 헤벌레-
아카데미 생도복을 벗고 수인 경비들이 입던 경비 제복을 입으니
꿈속 도시를 마음껏 가지고 놀던 김하은도 튀어 나와서 헤벌레-
그렇게 분위기를 타다 보니 세 화신 앞에서 패션쇼를 진행하게 된 상황.
'무섭다, 이하린!'
어쩌다 보니 세 화신이 내게 뭘 입힐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세 치 혓바닥만으로 이런 상황을 유도하다니.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화술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다.
세 미녀가 나를 보고 꺅꺅대며 좋아 죽는 모습인 데
조금 낯간지럽고 창피해도 불쾌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흘깃흘깃 몰래 바라보는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다.
커프스의 단추를 잠구고 머리를 뒤로 쓰윽 넘겼다.
떡 벌어진 어깨와 양복 정장이 어우러지니
아무리 생각해도 도련님이 아니라 행님처럼 보이지만
그게 또 좋다고 꺅꺅대고 있으니 원.
"사, 사진도 찍어도 될까요?"
"그래, 마음대로 하렴."
반 쯤 포기한 마음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복 페티쉬라도 있는 건지 온갖 제복을 다 겪어보네.
아카데미 생도복부터 동서남북 네 대륙의 군 예식 제복까지.
피부 노출 하나 없는 코스프레 대회가 슬슬 끝을 맞이한다.
'저 사진이 인터넷을 나돌기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헤벌쭉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는 화신들.
한예지가 성좌 화신 갤러리에 자랑글을 올릴까?
아니면 이하린이 성좌 데이터베이스에 업데이트를 할까?
김하은은 내가 올리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절대 안 올릴 거고.
누가 먼저 올릴지 조금 궁금해하며
목덜미를 답답하게 죄이는 타이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그 모습마저 좋다고 사진을 찍는 모습 때문에 웃을 뻔했네.
※
화신들끼리 의기투합해서 하하 호호 화목하게 보이고
살인범도 잡아서 감금 상태로 실험중이니 일단락 되었다-
그리 생각하려 했지만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우중충하다.
"이걸 어떻게-"
"아뇨, 이 쪽을 보시면."
어느새 실과 바늘처럼 딱 붙어 다니는 마법 교관과 이하린.
그리고 우르르 몰려나와 온갖 수치와 그래프를 들이미는 마법사들.
마법이 수학과 과학을 근간으로 한다는 게 저런 뜻이구나.
결계를 위한 천문학부터 원소 마법을 위한 화학, 물리학까지.
내가 98%는 알아듣지 못 하는 외계어들이 바삐 오간다.
원인은 당연히 꽁꽁 묶여 있는 저 남자 화신.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네 마네 떠드는 건 무의미하지 않나?"
연극에 나오는 마법사마냥 모든 털의 희게 세어버린 노인부터
나는 마녀입니다~ 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고깔모자 쓴 여자,
심지어 동양풍 마법사인지 두루마기 비슷한 옷에 부적 같은 걸 든 사람들도 있다.
동서남북의 주술사, 마법사 전부 모여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것.
아카데미의 결계가 어떻게, 왜 뚫렸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추하게 누구 책임이라고 밀어붙이면서 정치적인 싸움을 하는 건 아니다.
이래 봬도 대륙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
저 사람들이 언성을 높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이해를 못 했으니까.
'참, 대단하기는 하네.'
커다란 스크린에 보이는 것은 화신의 기억.
어릴 적 불우한 기억을 다시 재생시키는 게 아니다.
아카데미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기억을 살펴보는 중이다.
스크린 속에서는 남자의 행적이 전부 보여지고 있었다.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인 데 기억이 흐릿해질 리 있나.
비교적 덜 엄격한 대륙의 감시는 쉽사리 뚫렸다.
가짜 신분증으로 검문을 받고 배에 올라탔으니까.
그 뒤, 선박 내부에서의 불심 검문은
마치 영화 속 스파이처럼 아슬아슬하게 회피한다.
그리고 마지막.
아카데미의 항구.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 발을 딛는 순간 발동되는 결계.
그리고 그 결계를 기반삼아 사람들을 다시 검문하는 마법사들.
대륙의 항구와 선박 내부의 검문이 허술한 것은
성좌들이 힘을 모아 아카데미에 만들어 둔 이 결계를 믿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벌써 몇 번이고 되돌려 보며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히는 중이고.
남자는 배에서 내려서, 걸었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아카데미의 결계를 향해서.
그리고 아무런 이상 없이 통과해버렸다.
"가짜, 가짜 신분증에 마법적인 처리를 한 의상이오! 어찌 결계가 반응을 하지 않는 거지?"
"결계를 완전히 무효화하는 특성이 있는 건?"
"마법을 전부 지우는 특성은 있어도, 특정 결계 하나만 없애는 능력은 보고된 적 없소."
"하기야, 결계에 구멍을 낸 것도 아니고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나?"
"그리고 마법을 무효화하는 능력이 있다면 신분증과 의상에 걸린 마법도 지워졌겠지."
안색은 어두운 데 목소리는 들떴다.
아카데미가 뚫렸다는 커다란 사건에 대한 감정과
마법적인 새로운 발견에 대한 흥분이 뒤섞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렇게 궁금하면 범인을 깨우면 되지 않나.
기억을 읽는 기계 장치가 있는 세상이다.
마법을 이용한 심문법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하린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요, 성좌님?'
이 와중에도 내가 명령을 내릴까 궁금해하다니.
아무리 성좌라지만 수 십명이 회의를 하는 와중에
회의를 진행중인 인원에게 심부름을 시킬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다.
그렇기에 나도 목소리를 죽이고 이하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냥 깨워서 진실을 말 하도록 할 순 없니? 자백제 같은 게 있을 텐데.'
'그래도 되나요?'
내 말을 들은 이하린의 눈이 댕그랗게 커진다.
설마 이 간단한 걸 떠올 리지 못 한 건 아니겠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나도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그녀가 제 앞에 있는 마이크를 툭툭 건드린다.
"아아, 성좌님께서-"
회의장이라 해야 할까, 넓은 심문실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수 십명이 모여 있는 강당에 이하린의 목소리가 울린다.
조용해진 마법사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부담스럽게 몰린 상황.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힐끗 이하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성좌님께서 범인의 심문을 허락하셨습니다."
"…?"
이게 뭔 소리야.
그 뒤에 들려오는 건 참으로 자비로우시다는 칭찬.
범인을 심문하는 건 당연한 행위 아닌가?
혹시 이세카이에는 심문이란 게 없나?
'아아, 이것은 심문이라는 것이다. 손가락을 비틀면 비밀기지가 생기지.'
'오오, 대단해! 손톱을 뽑았어!'
시답잖은 농짓거리를 떠올 리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의와 광기가 뒤범벅이 된 수 십쌍의 눈동자들.
늙고 젊음을 따지지 않는 광기가 나를 향한다.
"그-"
눈이 마주치자 고깔모자를 쓴 마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음성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벌떼처럼 일어나는 마법사들.
"제가, 제가 이런 쪽에는 일가견이 있지요!"
"성좌님께서 보기에는 미흡해 보일지라도-"
"허허 , 이거참? 이런 쪽에 어찌 원소술사가 나서려 하는지?"
"그러는 시안느 계파도 심문과는 전혀 관련 없지 않소?"
처음 보는 마법적 현상에 대한 마법사들의 호기심.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체 실험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마법사들.
그리고 성좌가 친히 나서 기억을 읽고 있는 범인, 아니 피실험체.
마법사들이 심문을 하지 않던 이유는 심문을 위해 100%의 확률로
뇌를 뜯어내고 포르말린에 절이게 될 것 같다는 이유였다.
마법사 입장에서 보면 저건 성좌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피실험체를
자기들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멋대로 갈아버릴 순 없으니까.
마법사를 잘 아는 이하린이 내게 그리 속삭여 알려 주었다.
실제로, 마법사 중 몇몇은 뇌를 뽑지 않고 심문을 하겠다고 어필하는 중이고.
…어쩐지, 은근 슬쩍 끼어 있는 저 친위대 놈이 존나 흐뭇하게 웃고 있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