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부익부 빈익빈.
눈덩이가 구르면 구를수록 거대해지듯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이 있었다.
문화와 언어의 형태가 비슷한 이쪽 세상에도 같은 말이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마력이 돈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뭔 이자 붙듯이 마력이 늘어나네.'
김하은에게서 마력을 압수한 이후
마력이 늘어나는 속도에도 어마어마한 가속이 붙었다.
내가 내 화신의 미래를 말아먹을 이유는 없기 때문에
마력에 관련된 재능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김하은이 몰래 모아놨던 마력만 빼앗아왔는데.
주먹만 한 마력 덩어리를 실타래처럼 풀어 쓸 때와
등 뒤에 마력이 꽉 찬 탱크로리 하나 메고 다니는 지금
마력의 회복 속도나 다루는 능력, 제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몽마의 마력이라 그런가? 아니면 저 돌멩이 때문?'
꿈속 도시를 머금은 마정석 비스므리한 녀석이 범인 같은 데.
마력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입장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악몽 속에 있는 존재 말고 평범하게 소모품이나 먹거리도 꺼낼 수 있으니까.
- 자색 달 조각 브로치 – 연(聯) [1,200,000pt]
그러니까 상점에서 하나를 더 구매했다.
지난번 구매했던 팬던트는 체력을 공유하는 녀석이었으니
이번에는 화신들에게 넘쳐나는 마력을 공유하는 브로치로.
꿈속 분신이 가지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꿈속 도시의 거대한 마력을 공유해 주는 방식.
체력은 필드를 뛰던 한예지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마력은 열심히 실험중인 이하린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만 봐도 그렇지.
"저게 뭐니?"
"음, 꿈을 살펴보는 도구라고 할까요?"
의자에 꽁꽁 묶인 살인범의 머리에 씌워진 헬멧.
VR기기 닮은 고글과 자전거 안전 헬멧같은 게
지직지직 불길한 전류를 흘리며 정수리와 눈앞에 고정되어 있다.
몽마라는 종족이 있다는 걸 아니까 과학이 이런 쪽으로 발전했구나.
과학을 이용하면 무의식에 들어 가 조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원래는 정신병 같은 걸 치료하기 위한 심리 테스트 용품이거든요. 그런데 범죄자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출력쪽을 살짝 손본 다음…, 헤헤."
멋쩍은 듯 헤헤 웃는 이하린과 무덤덤하게 기기 조작을 돕는 마법관의 교관.
평소의 인자하고 자애로운 인상이지만 바삐 움직이는 손은 다르다.
허허 웃으며 손주를 반겨줄 것 같은 모습으로 범죄자의 뇌를 지지고 있으니까.
'육체적인 고통은 없으니 상관없나…?'
물론 겉보기에는 끔찍한 인체 실험이지만
실제로는 꿈을 꾸게 하는 기계일 뿐.
전기가 파직파직 튀어 오르는 사형도구처럼 생겼지만
저기에 앉아 있는 범죄자는 수면제에 취해 자고 있을뿐이다.
다만 자신의 무의식과 꿈을 남들에게 강제 공개하지만
살인범을 조사하는 데 조사관이 개인 정보를 알게 되는 게 뭐 어떤가.
굳이 따지자면 안 좋은 기억을 강제로 떠 오르게 만드는
악몽 체험 기구라고 보면 인권적으로는 딱히 문제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쪽 대륙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너무 자비로워서 불만인 사람도 있어 보이고.
경비들 사이에 익숙한 금발 머리의 미남이 보인다.
"너는…?"
"폐하께 윤허를 받아 저 범죄자의 감시조로 편성되었습니다, 성좌님."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는 금발의 남자.
여동생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은 것 같아 보이지만
가족이 죽은 지 몇 달 되지 않은 유가족에게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
'개판이네, 진짜.'
의자에 앉아 VR 고글 닮은 기계를 쓰고 있는 범죄자.
그 범죄자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실험하는 마법사들.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범죄자의 손가락을 노려 보는 친위대.
그리고 그 사람들을 배경으로 커다란 스크린에 비추는 범죄자의 기억까지.
흑백 영화처럼 지직거리는 화면 속에서 불우한 기억이 상영된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아
슬그머니 방안에서 빠져나왔다.
김하은과 한예지 로테이션을 돌았으니
슬슬 이하린에게 신경을 써 주려 했지만
바쁘면서도 되게 즐거워 보이니까 저녁에 다시 찾아올까.
※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막사에 가서 술 한 잔 마시고
새하얀 털의 늑대 인간이 멀쩡히 초원을 뛰노는 걸 확인했더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 저녁이 지나 있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중얼거렸더니
듣기 나쁜 말은 아니라며 껄껄 웃던 녀석.
배고프면 고기를 뜯고 목마르면 술을 마시다
몸이 근질 거리면 보름달이 뜬 초원을 달리고
그대로 자기 아내가 된 하얀 늑대인간과 풀밭을 뒹구니까.
참 본능대로 사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경비들의 검사를 받은 이하린이 숙소 안으로 뛰어들어 온다.
"성좌님!"
마치 크리스마스 양말 속 선물을 본 아이처럼 해맑은 모습.
평소의 얌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싱글벙글 들뜬 모습이다.
조곤조곤 말 하던 평소의 말투보다 휙 높아진 목소리만 봐도 그렇다.
"그래, 무슨 일이니?"
"그러니까-"
기쁘다 못해 대화 도중 손짓까지 파닥이는 그녀.
마치 처음으로 받은 상을 부모에게 자랑하는 아이 같다.
마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는 게 없어
알아듣는 척 고개만 끄덕이는 게 미안 해질 정도.
그래도 잘했다 잘했다 손등과 어깨를 토닥여주니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성적으로 흥분하거나 부끄러움으로 달궈진 게 아니라
기쁨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뺨이 발그레진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이미지였기에 훨씬 귀엽게 보인다.
아니, 나이만 생각하면 좀 어린 게 맞지.
세 명의 화신 모두 20대 초반의 어린 여자애들이니까.
남녀 역전 세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군대도 가지 않은 미필들이다.
화신이 되겠다고 사관학교에 있던 이하린은 군필로 봐야 하나?
"- 해서, 연구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아요!"
오타쿠적인 기질 때문일까?
내가 알아먹지 못해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응, 그래, 그렇구나, 잘했다 같은 단편적 반응만 보여도
반응을 보여준다는 사실 하나에 열심히 떠든 그녀였다.
아무튼 내가 마력을 지원해준 덕분에 큰 성과가 있다~ 이런 거지.
길고 긴 자랑이 끝나자 목이 마른지 꼴깍꼴깍
소파 테이블에 놓인 냉차를 들이킨다.
그러고 보니 흥분해서 뛰어들어 온 주제에
내가 마실 차와 다과는 준비해서 들어오는 구나.
냉차를 마시고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한예지 때와 똑같은 레파토리를 꺼냈다.
내가 뭐 전문 제비도 아닌데 멘트를 갈고 닦을 이유는 없지.
"그래서, 상으로 받고 싶은 게 있니?"
곁에 앉아 속삭이며 손등을 쓰다듬는다.
이거 하나면 좋아서 죽는데 뭐.
그런데 이하린의 반응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다르다.
"사, 상이요…?"
부끄러움이 아닌 당황으로 더듬어지는 말.
나와 착 달라붙은 게 기쁘긴 하지만
상을 준다는 말에 놀란 감정이 더 크다.
시킨 일에 성과가 있어 일정이 앞당겨졌다.
그러니 그 성과에 맞는 포상을 내려 주겠다
그게 포인트적이던 남녀의 성적인 포상이던.
지금까지 몽마 성좌 밑에서 야한 일 잔뜩 했었는데.
이제 와서 포상이라는 단어에 왜 이리 놀랄까.
"?"
"…?"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그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보니
간만에 생각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무언가가 엇나갔다는 느낌.
그러니까 뭘 생각하는 지 한 번 봐야겠네.
눈동자가 마주친 상태에서 곧바로 마력을 움직인다.
'내가 뭘 했다고 포상을 주시는 거지?'
읽히는 마음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고민하는 내용.
그 순수한 의문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상을 준다니 받는데 왜 주는지 모르겠다니.
분명 자기 입으로 연구에 성과가 있어서
내가 시킨 일을 빠르게 끝마칠 수 있다고 말 하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시켰는데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거뒀다.
이러면 칭찬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인 데.
'글렀다, 내가 시키면 하는 게 당연하니까 상을 왜 받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어.'
이하린의 사고방식은 조금 달랐다.
성좌가 화신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화신이 전력을 다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건 당연하며
예상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내는 일도 당연한 일.
심지어 성좌가 도와준 성과에 포상을 주려 한다니
받는 입장에서는 기쁘지면서도 쑥스럽다는 거지.
별거 아닌데 과하게 칭찬을 받는 느낌이라고.
100점을 받아 온 아이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아침에 학교에 등교 한 아이에게
엄마랑 같이 등교하다니 너무 잘했어! 게임기 사 줄게!
이러면 아이는 뭐가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게 당연하지.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와중에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한 이하린이 어렵사리 입을 연다.
"그러면, 상을 주신다면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기대감으로 발개진 얼굴이 나를 향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런 반응이면 어쨌든 상관없겠지.
"물론, 뭐든 말해 보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녀.
…
……
이하린이 평소에 성좌 오타쿠였으며
이쪽 세상에도 서브 컬쳐가 잔뜩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내가 말할 때 '뭐든' 이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성좌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뭐든' 말 하라니까
정말 적나라하게 뭐든지 말해버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