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 (143/169)

< 143화 >

보이는 기억은 완벽한 광신도의 그것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지.

성좌는 신앙의 대상이고 화신은 선망의 대상인 세상이다.

뒷골목에 버려진 고아 새끼가 몸이나 팔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좌가 직접 내려와 자신을 챙겨준다면

그 어떤 사람이 푹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강림제도 없이 추방당한 뱀의 심장이 등장한 건 이상하지만

성좌들만의 특수 능력 비슷한 걸 생각해보면 있을 수 있는 이야기.

'능력은 어중간한데 운이 좋네.'

시들지 않는 거목이 정령과 세계수를 다루고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화신 대신 동물 전령을 다루듯

추방당한 심장도 포인트 없이 지상에 내려오는 능력이 있나 보지.

나만 해도 몽마로 변해서 아바타를 이곳저곳에 보내지 않던가?

제 능력으로 값싸게 부릴 수 있는 뒷골목 고아들을 확보했는데

그 안에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닌 암살자 소년이 있었던 상황.

하긴, 그 정도 행운이 있어야지 말이 되겠지.

별거 없는 몰락한 기업가 출신의 초짜 성좌가

대륙에서 제일 오래되고 세력도 거대한 성좌를 공격한 상황 아닌가.

그게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면 내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

생쥐가 사자 콧잔등을 깨물려면 작고 앙증맞은 앞니라도 있어야 한다.

행운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앞니조차 없으면 깨물지도 못하니까.

아무튼 이 암살자는 추방당한 뱀의 심장에게 푹 빠졌다.

그리고 그 태도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게 된 이후에도 여전했고.

뒷골목에 버려진 고아 소년과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돌아온 화신.

인생이 달라도 너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을 깔보던 것들이 알아서 설설 기고

훔쳐먹던 음식과는 비교도 안 될 음식을 매끼 먹는다.

허름한 폐창고를 아지트 삼던 삶 대신 안락한 집이 생긴다.

의류 수거함에서 훔쳐 입던 옷 대신 움직이기 편한 새 옷을 입는다.

이 모든 것이 성좌가 내려준 은총이다.

'이거 이하린 MK. 2 아닌가?'

이 사고방식은 이하린의 사고방식보다 굳건하다.

이하린은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구해졌지만

이 암살자는 나락에서 위로 끄집어져 올라왔으니까.

성좌인 나와 만났다고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이하린이다.

그런 그녀가 나를 배신하는 일이 있을까?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 암살자도 제 성좌를 배신하진 않겠지.

그러니까 마음을 읽고 감정을 건드려서 회유하는 건 패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 밖으로 나왔다.

나를 호위하듯 둘러싼 수인 경비들과

어느새 와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세 화신.

그리고 화신들 옆에서 바닥을 기는 암살자를 노려보는 금발의 남성.

"성좌님, 혹시."

"아직 진전이 없으니 좀 더 기다리렴."

친위대인 남성이 희망을 품은 채 입을 연다.

아무리 화신이라지만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데.

범죄자를 잡아 온 첫날부터 폭군이 내려준 난제를 해결하고

성좌와 화신의 연결고리를 찾아냈으니 암살자를 받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무리 성좌를 신성시한다지만 내가 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닌데.

고작해야 기억 몇 개 둘러봤던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전부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면

내가 아니라 불사르는 폭군이 알아서 했겠지.

원하는 물건의 품절 딱지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남자가 물러난다.

성좌에 대한 존중과 신앙이 너무 깊은 것도 조금 문제네.

그러자 냉큼 다가오는 건 한예지와 이하린.

김하은은 지금쯤 그 꿈속 도시를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으니까.

먼저, 이하린이 입을 열었다.

"성좌님, 그러니까 저 남자를 통해 화신과 성좌의 연결 관계를 연구하는 게 맞나요?"

"응, 그렇지?"

세부적인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생각해보면 알 방법이야 너무 많았다.

불사르는 폭군이 함선을 몰고 중립지대인 아카데미까지 행차했는데

사람들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언급되고 정보가 퍼지는 건 당연하겠지.

"그러면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도움?"

"네, 저 사람을 가지고 연구를 좀 하고 싶어요. 성좌와 화신에 대해 연구를 하면 제사 마법에도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열의를 가진 초롱초롱한 눈빛이 내게 날아온다.

내가 마법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말은 되네.

성좌와 화신의 마법적인 연결을 연구하다 보면

다양한 제사 마법에도 도움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체 실험이라 해도 마법적인 연결을 연구하는 거니까

뭘 째고 자르고 내장을 뽑는 그런 일은 없겠지.

그런 부분을 생각하고 있으니 한예지가 이어서 입을 연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 팀이 책임지고 감시하겠습니다."

"감시?"

뜬금없는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또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곳은 아카데미고 사무실 건물과 기숙사, 훈련소가 잔뜩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감옥이 있을 리 없지.

심지어 결계를 속이고 움직이는 암살자를 가둘 감옥이 필요한 상황.

서울대학교 1 공학관 지하에 특수부대원을 감금하는 감옥이 없듯이

아카데미에도 범죄를 저지른 화신을 감금할 수 있는 시설이 없는 게 당연하다.

아니, 일단 아카데미까지 범죄자가 들어오는 일이 드물겠지.

있다고 해도 곧바로 체포되어 대륙의 화신 전용 감옥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이 암살자가 조금 아깝게 느껴진다.

암살은 둘째치고, 결계술에 관련된 천재 아닌가.

해커들이 기업의 인터넷 보안 기술을 발전시키듯

이 남자도 대륙의 결계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재목이었다.

음, 뒷골목에 버려져서 금발 미녀에게 역강간 당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싸구려 서양 포르노같네.

"그래도 괜찮겠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쉽고 나발이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차라리 결계만 속였으면 속죄하라고 아카데미에서 일을 시킬 텐데

불사르는 폭군의 예비 친위대를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암살한 상황.

아무리 아쉬운 인재라 해도 용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 이건 제 의견만이 아니라 다른 두 명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한예지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경비원들 사이에서 두 명이 톡 튀어나온다.

그녀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인 죄송함과 지루함.

역시 체육계 인재들이라서 그런 걸까?

돈 많이 벌고 명예롭고 일 적은 꿀 직장에 왔지만

할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야 경호 대상인 내가 거의 히키코모리니까.

성역과 아카데미의 환자 병동만 오가는 게 내 일상이다.

멀리 갈 땐 아바타만 보내고, 다른 성좌의 영역은 나만 갈 수 있으니까.

이동 거리만 따지면 직선으로 200m가 안 되는 짧은 거리의 왕복.

심지어 환자 병동에는 퇴역군인 수백 명과 간호를 맡은 화신 수십이 있고

그들이 소란을 피울까 봐 배치된 경비들도 수 십 명 있으니 경호할 게 없지.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일거리가 생기자 냉큼 나서는 것 같다.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서 말하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물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너덜너덜한 상태로 체포되었지만 일단 아카데미의 결계를 속인 남자.

도시 하나를 통째로 검열하는 건 피하지 못하더라도

화신 서너 명의 감시는 속이고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 그럴게, 우리 애들이 감시 특화가 아니니까.

저격수와 드루이드, 여기사 아닌가.

근거리, 중거리, 원거리 대응력이 탁월한 제압팀이지만

은신술과 결계술에 능숙한 암살자를 24시간 감시하는 건 다른 이야기.

"저희만으로 완벽히 감시하겠다는 오만한 소리가 아닙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가 팀을 짜고 싶습니다."

"예, 경호팀이 아닌 감시팀을 조직해서 저 남자의 신병을 구속해 둘 생각입니다."

"만약 성좌님께서 허락하신다고 가정을 한다면, 저 남자를 구금실과 마법동으로 이동시켜야 할 팀이 따로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더듬는 동안 이야기가 얼마나 진전된 거야.

그리 생각하며 한 마디씩 내뱉는 한예지 팀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카데미에는 두 종류의 경비들이 있다.

내가 지내는 성역처럼 중요 건물을 지키는 수인 경비들.

그리고 날아다니며 아카데미 외진 곳과 주요 통로를 지키는 마법사들.

물론 날개를 달고 마법사와 같이 날아다니는 수인들도 있고

특정 건물을 지키는 결계술의 마법사도 있지만

크게 분류하자면 이동형과 고정형, 두 팀으로 나뉘는 거다.

여기서 한예지의 팀이 제안하는 것은 추가로 한 팀을   만들자는 것.

감시 대상이 한 명이니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한 명을 번갈아 가며 24시간 밀착 감시를 할 정도만.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본질은 간단하다.

'저희가 아카데미에 올 수준이 아닌데 과분한 대접입니다.'

'대우에 비해서 하는 일이 너무 적은 것 같아 괜히 눈치가 보입니다.'

'마음이 부담스러우니까 뭐라도 좀 시켜주세요.'

감투는 썼는데 일거리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유일한 영혼 치유사의 화신들이래~ 하고 넘기지만

그녀들은 스스로 놀고먹는 걸 용납 못 하는 성실한 성격이니까.

한예지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요즘 시키는 게 없어서.

정아린은 팀장의 책임과 의무를 잘 아는 의젓한 성격이라서.

남궁희는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나, 기사도를 따르는 여기사로서.

"그렇다면, 좋아. 아카데미 총장과는 이야기가 되어있니?"

"네, 성좌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가능합니다."

…체포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소식을 듣고 몰려들더니

범죄자 무의식을 탐험하는 동안 벌써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고?

확실히, 대륙 제일의 인재만 모아둔 곳다웠다.

너무 유능해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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