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2화[19] > (142/169)

< 142화[19] >

아무리 잘 적응을 했다고 하지만   세상이 통째로 바뀐 상황이다.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가끔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이 있을 수 밖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섭지도 않나?'

꿈 속 세상에 영원히 있겠다.

바꿔 말하면 현실의 육체를 포기하는 거다.

이쪽 세상 사람들에겐 성좌의 곁에 있는 영광스러운 일인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통 속의 뇌, 매트릭스가 떠오를 뿐인데.

전생에도 무교로 살아와서 그런지

저런 과격한 사고는 오히려 좀 무섭다고 느껴지네.

그렇기때문에 내 꿈 속에서 평생 살아가며

봉사와 헌신으로 속죄하겠다는 김하은을 온몸으로 말렸다.

정말 온몸으로.

"그래도 현실의 육체도 꼭 챙겨야한다?"

"네, 녜헤…."

허리가 빠져서 바들바들 떠는 김하은을 집무실에 내려 놓았다.

조금 어거지로 밀어 붙인 감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성좌인데.

현실의 육체를 포기하고 꿈 속 도시를 운영하겠다는 그녀를 막고

현실에서도 생활을 하도록 설득을 끝낸 상황.

어린 자식 놀이터 보내는 부모도 아니고

도시에서 마력으로 실험 좀 하다가

꼭 현실로 나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 혼자 현실세계로 빠져나왔다.

'이 작은거 안에….'

손바닥만한 돌멩이는 여전히 번쩍거리는 상황.

저 작은 돌멩이 안에 대도시 하나, 도시 관리 깡통 로봇 수 천대

그리고 내 화신인 김하은까지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로봇이 튀어나온 미래 도시를 좀 더 구경하고 싶지만

지금즈음이면 북대륙에서 아카데미로 싱싱한 범인이 배달되지 않았을까.

아카데미의 결계를 무력화시키고 잠입한 살인범이라 해도

이번에는 도망 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거다.

눈깔이 뒤집어진 마족이 도시를 검열하기 시작했으니까.

'지구의 독재자도 저런 짓은 못 할텐데.'

돌아다니는 사람만 잡는 게 아니고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검문한다.

전생의 지구였다면 가능할 리 없는 일이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이쪽에서는 가능한 일 같았다.

사실, 마법보다는 성좌 때문에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평일의 대낮이었다.

당연하게도 회사원들은 회사에서 업무를 본다.

회사원부터 자영업자와 학생과 공무서와 화신들.

어림잡아도 10만명은 될 사람들이 제 생업에 종사하는 거다.

그 생업을 중지하고 도로에 집합하여 검문을 받으라는 명령.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독재자들도 이런 명령은 못내리겠지.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가능하다.

명령을 내린 게 시장이나 대통령이 아니니까.

성좌님이 내린 명령이다- 하면

군말은 조금 나와도 일단 따르고 보는 세상인거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깔리니 그 뒤는 더 쉽지.

소환수와 분신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저 많은 사람들을 언제 다 검문할지 걱정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끄으, 흐으-"

"생각보다 빠르네?"

"거래는 언제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게 마족의 근본이지."

밧줄에 팔다리가 묶여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

태블릿 여러 개를 들고 서류 처리를 하며 날 기다리는 빌헬미나.

소란 때문인지 나를 지키기 위해 슬금슬금 모여든 수인족 경비들.

그리고 그 경비들 사이에서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 피해자의 오빠까지.

…쟤는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왔지.

'나 빼고 다 존나 유능한 거 같은데.'

잠깐 꿈 속 세상에서 섹스하고 왔더니

몇 달은 걸릴 줄 알았던 커다란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

정말 길드 버스를 탄 RPG 뉴비가 된 기분인걸.

실제로 내가 한 일이 거의 없지 않나?

똥폼잡고 헛다리 짚어서 남의 회사에서 매혹이나 남발한 거 빼면.

대부분의 힌트는 불사르는 폭군이 건네준 지식과 정보에서 얻었고.

자신의 제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몽마라는 종족의 희소성 때문인지

불사르는 폭군은 나를 과할 정도로 밀어주고 있었다.

물론 나는 공짜를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고.

마족 성좌인 빌헬미나는 뭐…

머리 위에다 궤도폭격을 날린다는 협박을 듣게 되면

누구나 저 정도로 헌신적인 지원을 해 주지 않을까.

"그래서, 이걸 어쩌게?"

"가지고 실험이나 해 봐야지."

물론 불사르는 폭군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다.

화신과 달리 제 성역에 꽁꽁 숨은 성좌를 잡아야 하니까.

같은 성좌고 나발이고 은하제국의 황제였던 남자.

일개 부패 사업가 따위가 암살시주를 한 걸 용납할 리 없지.

물론 현실에서 인체 실험을 하면 곧바로 망가지겠지.

딱 하나밖에 없는 실험체니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니 답은 딱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닥에 축 늘어진 화신의 머리채를 쥐어잡는다.

골병이 들 정도로 얻어 맞았는지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하네.

의미 없는 고문과 폭력을 좋아하지는 않으니

나는 곧바로 마력을 쑤셔박아 강제로 파고들었다.

뭘 두려워하고, 뭘 생각하고 있을까.

지극히 몽마다운 생각을 하면서.

시야가 흔들리며 방해 없이 기억속으로 파고든다.

그런 내 눈앞에 조금 당황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십인십색이라 하였던가,

색이 아니라 혼이라 해도 되겠는데.

다양한 무의식을 봐 왔지만 이런 무의식은 처음이었다.

"이건 또 무슨…?"

가로등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뒷골목.

다양한 쓰레기통이 널부러져있다.

딱 봐도 '나 불행했어요-' 같은 모양새.

다른 사람들이 나쁜 기억을 어둡고 자그맣게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이 암살범의 무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사람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 커다란 원통형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거무칙칙한 안개와 함께 찌그러진 깡통이 나온다.

그 안에 고여있는 구정물이 찰랑이며 흐릿한 과거를 비춘다.

배가 고픈지 빵을 훔쳤다가 귀싸대기를 맞는 꼬질꼬질한 아이.

'이쪽 세상도 이런 일이 있기는 하구나.'

성좌가 내려와 인간들에게 간섭을 하는 세상.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없는 유토피아는 아니다.

도둑이 있고 강도가 있고 강간범(여)이 있으며

당연하게도 버려지는 고아들과 뒷골목 슬럼이 있는 세상.

물론 동정심이 생겨서 마음이 약해질 일은 없다.

적어도 저 뒷골목이 방사능 돌연변이가 넘치는 세상보다는 안락하니까.

내가 알아보고 싶은 것은 직접적인 원인.

아카데미의 결계를 속일 정도의 실력이다.

그 정도라면 어딜 가도 대접받고 살 수 있지 않나?

결계 마법은 잘 모르지만 아카데미를 뚫은건데.

신적인 존재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재능에, 북대륙 출신이다.

막말로 불우한 과거는 다 잊고 내가 봤던 파티장처럼

마약을 빨면서   호화 저택에 스포츠카를 몰면서 살 수 있는데.

왜 엉뚱하게 추방당한 뱀의 심장의 화신이 되어 암살자가 되었을까.

주급 수십억 받을 수 있는 메시급 축구선수가

발차기 각력이 대단하다며 발로 사람을 차 죽인거다.

아니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암살자가 됨?

이런 질문이 당연히 튀어나오겠지.

많고 많은 북대륙 성좌 중에서

하필 추방당한 뱀의 심장과 계약한 이유.

그 기억을 찾아야 추방당한 뱀의 심장에게 역으로 파고들 수 있다는 걸

불사르는 폭군이 내게 건네준 몽마의 기억이 작게 속삭여주고 있다.

'많기도 해라.'

불우한 과거사가 있다는 걸 전력으로 주장하는 걸까.

골목 가득한 쓰레기들에는 불행한 과거가 가득 있었다.

빵을 훔치다 귀싸대기를 맞고

소매치기를 하려다 화신에게 걸려 경찰에게 넘겨지고

남자라는 이유로 뒷골목에서 강간당하고.

음, 개뜬금없이 금발 미녀한테 역강간당하는 야동이 튀어나오네.

그런 무수히 많은 기억들은 대충 제껴두었다.

그래도 성좌와 화신의 계약에 대한 기억은

이런 찌그러지고 녹슨 깡통과 통조림 말고

좀 더 밝고 깨끗한 기억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게 보이지가 않는다.

찌그러든 깡통, 녹슨 통조림

찢어지고 더러운 책, 고장난 장난감

모퉁이가 깨진 라디오, 금 간 TV까지.

정상적인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장.

이 어두침침한 곳에는 멀쩡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밝게 빛나거나 하는 건 딱 하나.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가로등도 없는 뒷골목에서   그나마 앞이 보이게 해 주는 유일한 광원으로.

"저 큰 게 기억이라고…?"

찌그러진 깡통과 보름달이라니.

대체 무슨 기억이길래 이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는거야.

부모에게 버림받아 쓰레기 같은 고아원으로 보내진 소년.

범죄에 손을 대고 여자에게 몸을 팔아 한 끼 식사를 하는 게 당연한 일상.

잡히면 얻어맞고, 강간당하고, 그 와중에 지들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싸우고.

그런 끔찍한 일상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화신은 커녕 정부의 눈조차 닿지 않는 뒷골목에

직접 성좌가 등장했으니까.

'운도 좋네, 개새끼가.'

그러니까 대단한 재능을 가진 화신이 추방당한 뱀의 심장과 계약한 게 아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놈이 뒷골목 불량소년 소녀 패거리를 모으다 보니

운도 좋게 그 안에 엄청난 재능을 지닌 남자가 한 명 있었을 뿐.

"나와 함께 가겠니?"

"누, 누구세요?"

부패한 기업가라길래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를 생각했는데.

왜 두꺼비 닮아서 얼굴에 개기름 흐르고 머리 벗겨진 그런 인상.

하지만 기억 속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멀끔하게 생겼다.

뭘 발라서 뒤로 잘 넘긴 머리카락과 뽀얀 피부.

눈매가 날카로워서 어디 악역 영애처럼 생겼으니까.

하긴 행성을 개발하는 미래 세계에서 왔는데

거기서 과학으로 얼굴 좀 개조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보다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여자였네.

그러고 보니 불사르는 폭군도 남녀 역전 세계 출신이지.

그러니까 사업가가 여자라는 게 당연해서 따로 말을 안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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