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나무 문을 열면 보이는 커다란 거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며 다과가 올려진 탁자와 화려한 전등,
사용한 적 없는 고가의 음악 감상용 스피커와 커다란 TV까지.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아늑한 평소의 숙소였다.
…그 양탄자 위에 무릎 꿇은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이게 뭔 상황이지, 진짜.'
자색과 금색의 머리카락이 내 발밑에 아름답게 흐트러진다.
경쟁심리라도 느낀건지 금발남 옆에 김하은이 같이 무릎을 꿇었으니까.
'아니, 너는 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남자.
돌돌 말린 두르마리, 이번에도 불사르는 폭군의 서신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 느껴지며 머리를 파고드는 지식.
메시지와 지식을 동시에 전달한다니
미래 사회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뇌를 간지럽히는 몽마의 지식은 잠시 미뤄두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혈육이 죽었다는 이유로 함대를 발진시킬 정도로
과도한 총애를 받는 불사르는 폭군의 친위대다.
성좌보다 대단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
하지만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 이유는 없는 남자 아닌가.
자기가 모시는 폭군 앞도 아니고 관련도 없는 성좌 앞에서 말이야.
'관련이 아예 없는건 아닌데.'
아마 죽은 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저러겠지.
분노와 원망과 살의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드니까.
감각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입술에 바닷물을 바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해도 남자에게 절을 받는 취미는 없으니 빨리 말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서신은 이미 전해줬을텐데 대체 제복 셔츠 안에서 뭘 자꾸 꺼내는지.
조금은 매정한 생각을 하며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거, 옆에 이유 없이 같이 엎드린 김하은이 은근 거슬리는데.
"…이건?"
"폐하께서 제게 하사하신 물건입니다."
그러한 잡다한 생각이 눈 앞의 물건을 보고 싸악 날아간다.
영롱하다 못해 기이할정도로 반짝이는 황금색 광채.
그렇다고 해서 품 안에서 금괴 따위를 꺼낸 건 아니다.
"그걸 물어본게 아니잖아."
"그리고, 제가 성좌님께 바칠 공물이기도 하지요."
모양새는 볼품 없는 돌멩이였다.
주먹 안에 쏙 들어갈 크기의 울퉁불퉁한 자갈.
그 안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만 아니라면
길거리에서 발로 차도 모르고 넘어갔을 것 같네.
그나저나 공물인가.
'가족이 죽었는데, 나한테 와서 공물을 바친다면….'
저런 눈동자에, 이런 행동이다.
가족을 잃었던 사람 중 꽤 많이 봐왔던 패턴.
내가 눈치를 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그리고 돌멩이를 양 손으로 들어올리는 모습.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형용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된 감정이 잔뜩 묻어나온다.
"성좌님께서 북대륙의 한 도시에서 권능을 사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보 참 빠르네."
아바타를 움직인지 30분이 되지 않았을텐데.
역시 우주함대인가, 위성 같은것도 데리고 다니나?
그보다는 저 황금색 돌멩이가 신경쓰이는데.
금빛이 심장박동처럼 두근두근 요동칠 때 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분명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크기인데
어째서인지 우주전함 앞에 서 있을때와 비슷한 기분.
살기니 마나니 하는 것이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지만
이토록 거대한 기운이라면 눈치를 챌 수 밖에 없다.
저 금색 돌멩이가 존나 위험하고 대단한 물건이라는 걸.
"폐하께서 성좌님께 부탁하신것은, 감히 폐하를 욕보인 성좌를 벌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렇다면, 제가 화신의 신병을 양도받고 싶습니다."
바닥에 이마를 박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건 신선한 기분이었다.
신선하다고는 해도 신선한 오이나 신선한 민트겠지만.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내 시선이 저 돌멩이에 고정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만다.
어째 고기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개새끼가 된 것 같은데
저 돌멩이가 감히 고기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게 절절히 느껴진단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저 놈도 그걸 알고 있겠지.
"알겠으니, 그 물건이 뭔지 설명부터 해 봐. 보기 불편하니까 자리에 앉아서."
"무례를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는다.
…계속 엎드려 있는 김하은은 일단 내버려 둘까.
저 돌멩이에 대한 설명이 더 급하니까.
※
우주 제국은 SF 세계관 답게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다.
장기를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부터 다양한 행성계의 외계 종족들.
그 중, 타인의 꿈에 들어가 기억을 읽고 감정을 훔치는 종족이 있었다.
당연히, 그게 드림 워커라 불리는 몽마들이겠지.
드림 워커에 대한 설명과 제국에 대한 설명은 넘겼다.
미친 황제 밑에는 광신도가 있는지 설명이 이상하리만치 길어지려 했으니까.
충성심을 근간으로 한 미사여구를 전부 제거하니
불사르는 폭군이 내게 왜 잘 대해주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드림 워커가 쓸모가 많아서 키워준다는건가."
포인트를 질릴 정도로 많이 번 황제는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지불해 전생의 물건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몰던 기함을 가져오고, 황실에 두고 왔던 사치품들을 구매하고
끝끝내 불타버린 황실 창고의 보물들까지 소환을 한 상태.
그리고 그 황실 창고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물건이 있는데
몽마, 드림 워커의 물건을 사용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거지.
기계공학의 종족인 드워프는 이쪽 세상에도 찾아보면 있다.
수인족도 엘프도 존재하며 사이보그는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몽마는 아니다.
대부분의 몽마는 자신의 꿈 속에서 나오질 않으니
아무리 날고 기는 황제라 해도 부려먹을 드림 워커가 없다는거다.
나만 빼고.
물론 부하로 유용하게 써먹겠다고
지식에 정보에 저런 보물까지 넘기는 건 수지가 맞지 않다.
화신이자 불사르는 폭군의 친위대가 말할 순 없지만
다른 이유도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고인물용 컨텐츠가 된 건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신 자위용 트로피다.
굳이 전생의 우주전함을 그대로 소환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내가 죽고 제국이 멸망하고 인류가 몰살당해
어두컴컴하고 추운 우주를 떠돌다 메말라 죽었는데
그 우주기함을 그대로 불러온다니.
나라면 아무리 포인트 이득이 있다고 해도
전생의 지하실로 기어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 할텐데.
그러나 불사르는 폭군은 전생의 기억에 취해 있다.
화신들이 아니라 친위대를 만들고 우주전함을 불러내
성역 대신 전함에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 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물론 내게 나쁜 점은 없다.
까놓고 말해서, 길드장한테 뉴들박당하는 청정수의 입장 아닌가.
사적으로 시키는 퀘스트만 성공하면 귀한 보상이 뚝딱 나오는데.
"그러니까, 이게 드림 워커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 때 사용하는 핵이라고?"
머리에 떠오르는 건 충성스러운 송곳니를 위해
새하얀 늑대 인간 여성을 창조했던 기억이다.
영구적인 분신체를 하나 만드는데도 그 난리가 났는데
세상 하나를 구체화시키고 영구적으로 어찌 유지하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외부 장착형 배터리 같은 걸 사용하는구나.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마법진을 그릴 때 마석을 장착시킬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내 마력을 사용해서 꿈을 꿔도 되지만
저 핵에다 꿈을 저장시켜 놔도 된다는거지.
"예. 출력으로만 비교한다면 전함 세 대 정도는 운용할 수 있는 귀한 녀석입니다. 나름 전략물자로 지정된 물건이죠. 이 정도라면 성좌님께 감히 부탁을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북대륙에서 그 남자를 잡아오면 내게 넘겨주마. 단, 불사르는 폭군이 부탁한 일을 먼저 해결하고 나서."
"예. 저도 무엇이 우선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살의와 기대감이 뒤범벅된 눈길이 내게 향한다.
아마 잡혀온 암살자는 곱게 죽지 못하겠네.
물론 내가 알 바 아니지.
사내놈의 뜨거운 시선을 받는 취미는 없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쫒아보냈다.
다시 한 번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는 걸 말리고-
아직도 엎드려 있는 김하은을 일으키면서.
다시 한 번 김하은의 손목을 잡아챈다.
대화 내내 엎드려 있어서 다리가 저린지 비틀거리는 그녀.
대체 왜 엎드려서 고개 박는 일에 호승심을 느끼는지 모르겠네.
한 손에는 따듯한 돌멩이, 아니 꿈나라의 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김하은을 이끌어 침실로 향했다.
"할 일이 생겼구나."
"예, 성좌님. 그동안 거실을 정리할까요?"
"너도 같이 누우렴."
아이템을 얻었으면 바로 사용해봐야지.
침대에 누울 때 까지 손목을 잡아 이끈다.
어어, 하면서도 못이기는 척 다가와 내 옆에 눕는 그녀.
곁잠 자듯 같이 눕는 것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은 숨기지 못한다.
불사르는 폭군이 보내 준 지식에 따르면
이 핵을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손에 쥐고 자각몽을 꾸면 된다.
마치 컴퓨터와 USB로 파일을 옮기듯이.
세상이 빙글 돌고 곁에서 김하은의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