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악몽을 퍼트리고 그걸 마족에게 인수하고 난 뒤 곧바로 성역으로 돌아왔다.
마족이 내게 도와달라 했으니 정말 도와주는 선에서 멈춘 것이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성역에서 마족의 욕설 섞인 고함을 듣다
그대로 아카데미로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범인은 잡히게 되어 있으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이 남녀 역전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남녀 역전 세상이다.
정확히는 모계 중심의 사회.
여성이 회사일을 하고 남성이 주부가 되는 게 당연한 세상.
여자가 먼저 고백하고 에스코트하며 리드하는 게 당연한 세상.
인간의 상상력은 디테일하지 못하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니 그 부분이 정말 정확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남녀 역전 세상이라 남자 암살자를 찾기 쉽다니.
대부분의 남자는 전업 주부가 되는 걸 선택한다.
물론 회사원이나 다양한 업계에 진출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은 남자는 내조를 한다는 편견이 남아 있는 상황.
그러다보니 남자를 솎아내는 일은 간단했다.
아카데미에 가는 것은 옆 대륙으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
쉽게 말하자면 적어도 1주일은 소모되는 해외 출장이다.
남녀 역전 세상이다 보니 이런 일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대부분 떠맡게 되고,
자연스럽게 화신도 군인도 아닌 일반인 남성은 아카데미에 갈 일이 거의 없는거다.
"그래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니?"
"네. 이제 뭘 할까요?"
아카데미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김하은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자세로 내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
마력을 쪼옥 빨리고 불안정한 정신도 강제로 진정시켰더니
명령을 한 것만 실천하는 극도로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사이도 아니고
뭔가 큰 일을 맡긴 신하도 아니니
극도로 수동적인 모습이라 해도 나쁠 게 없으니까.
어여쁜 미녀가 시키는대로 하겠다며 조용히 따라다니는데
이걸 싫어하는 남자는 참으로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겠지.
"간만에 환자들이나 돌볼까 하는데."
"네, 안내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그녀가 앞에서 걷는다.
그에 맞춰 씰룩쌜룩 움직이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원래 저렇게 걸었던가- 하는 의문이 절로 샘솟는다.
워낙에 서구적인 몸매다 보니
수인 경비병과 마법사들보다 시선을 더 잡아끄네.
몽마가 되면서 걸음걸이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변한건가.
탄력을 증명하듯 위로 휙 치솟은 엉덩이.
그 서구적인 뒷태가 나를 자극한다.
'이렇게 보니까 또 꼴리네.'
이하린이 헌신적이라면 김하은은 복종적이다.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꼴림 포인트.
거기에 날이 갈수록 매끈해지는 몸매까지.
보고도 없이 제 멋대로 일을 벌인건 괘씸하지만
남자의 본능이 그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한 수 지고 들어가게 만든다.
내가 판타지 세상 출신이라면 노발대발 날뛰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머리에는 아직 21세기 현대인의 관념이 뿌리내린 상황.
심지어 김하은이 하던 행위는 엄연히 치료행위였다.
여제자에게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알아서 깨어났으니까.
목줄 채워, 마력 뺏어가, 근원을 찍어 눌러
끝끝내 과격한 섹스까지 이어졌던 쾌락적인 처벌.
내게 헌신적인 미녀가 잘못 한 번 저질렀다고
꿈 속에서 쾌락 고문을 하니 스스로 참 못난 놈이 된 것 같다.
물론 이쪽 세상 기준으로는 내 행위가 올바른 행위지만…
'내가 존나 찝찝해.'
어쩌겠는가, 내가 찝찝한데.
사내의 본능은 어디가지 않는지라 미녀에게 약할 수 밖에.
하다못해 태도가 불량하기라도 하면 몰라.
제 잘못이라고 곧바로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데
거기에 대고 계속 화를내면 속 좁은놈이 되는 게 아닐까.
몸정, 떡정이라 해야 하나.
강탈한 대량의 마력은 요긴하게 쓰고 있지만
마력 흡수를 아예 봉인한건 조금 미안하기기도 할 정도.
그런 생각을 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생각하는 것은 고무 호스와 주유소.
며칠동안 마력을 소모했을텐데 채워준 적은 없으니까.
꿀렁꿀렁, 하고 거대한 마력의 일부를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이었다.
"흐, 흐야앗-?!"
무릎을 오므리고 제자리에서 어깨를 파르르 떤다.
듣기 민망할 정도의 신음소리는 덤.
움직이고 있던 마력을 곧바로 휘감지 않았더라면
건물 안에서도 밖을 쳐다보지 않았을까.
아포칼립스에서 다져진 순발력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질 정도.
'이게 무슨 싸구려 성인 게임도 아니고.'
마력으로 쾌감을 느낀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몽마는 감정과 기억을 읽고 꿈을 다루는 종족이지
마력 주입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게하는 종족이 아닌데.
'그럴꺼면 몽마가 아니라 색마지, 씨발.'
환자고 뭐고 김하은부터 돌보게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김하은이 환자가 된 게 아닐까.
"서, 셩좌님?"
발을 움직여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가장 먼저 보인다.
새하얀 피부에 서구적인 몸매, 거기에 땀에 살짝 젖은 상태로 달아오른 몸.
야외 노출 야동이라도 찍는건가, 싶을 정도로 선정적인 모습.
물론, 나는 운동장 한복판에서 야외 노출 플레이를 할 마음이 없었다.
"잡고 일어나렴."
"네, 감사합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그녀가 손을 잡아온다.
평소보다 따끈한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게 느껴진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킬 시간을 줄까 싶었지만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마력을 돌돌 말고 있는 것도
사람들의 이목을 너무 모을 것 같아서 그대로 잡아 이끈다.
"…헤헤."
"음?"
그 와중에 내가 잡아끄는게 마음에 든 걸까.
바들거리는 다리와 느려진 걸음걸이 때문에
손목이 아플 법도 한데 좋다고 헤벌쭉 웃는다.
'이건 수동적인게 아니라 그냥 마조히스트 아닌가?'
아니지, 마조히스트는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는 거였나?
그러면 복종을 쾌락으로 느끼는 걸 뭐라고 부르지?
발게진 피부에 흐리멍텅해진 눈동자까지 더해지니
머리 속 사고의 흐름이 음탕한 쪽으로 자꾸 흘러간다.
구체적으로 female:drug 같은 쪽으로.
이 상황에 환자들이 잔뜩 있는 병동으로 갈 순 없지.
곧바로 방향을 틀어 내 숙소가 있는 성역으로 향한다.
한예지 팀은 사격장에서 훈련 겸 내기를 하는 중.
이하린은 아마 마법동에 가서 새 논문을 본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입구의 경비들만 남아 있고 아무도 없겠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주는 수인족 경비들.
하지만 생리적인 반응은 어쩔 수 없는지
코를 씰룩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아으, 그-"
"일단 들어가자."
그걸 본 김하은의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달아오른다.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변한 얼굴.
내가 남자라고 숙소 입구도 남자 경비가 더 많으니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겠지.
전생의 남자들도 발기한거 감춘다고
애국가를 부르며 셔츠로 가리고 포지션을 바꿨지
떳떳하게 세우고 다니는 사람은 소수 아니었던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서
현관에 우뚝 멈춰버린 김하은을 바라보았다.
졸린듯 취한듯 멍한 눈도 좋았지만
눈물이 맺힐듯 말듯 촉촉해진 눈도 좋네.
역시 외모가 깡패라는 건 세상이 바뀌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마력을 일으켰다.
"성좌님,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되나, 요?!"
쿡, 하고 마력의 호스에 찔리니 화들짝 놀라는 그녀.
이렇게 보니까 고무 호스가 아니라 무슨 촉수같네.
시들지 않는 거목이 덩굴로 내 손목을 묶었던 게 떠올라서 그런가.
그대로 마력의 덩굴을 만들어 김하은을 꽁꽁 묶었다.
야동에서 나올 것 처럼 야시시하게 묶는 게 아니라
뱀이 먹잇감을 조이듯 온 몸을 전부 감는 방식으로.
"흐, 흐야악, 흐아아앙-"
그러자 마력 덩어리 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절규.
스피커 조절을 잘못한 수준의 커다란 신음소리였다.
몰래 야동보다 이어폰 음량 조절 잘못했을 때를 떠오르게 만드네.
'흡수는 정상적으로 하는데, 왜 저럴까.'
피부 호흡을 하는 것처럼 피부로 마력을 흡수하는지
그녀를 감싼 마력의 밧줄이 점점 얇아지는 게 보인다.
그럴 때 마다 눈사람에 눈을 퍼바르듯 마력을 보충.
마력 흡수가 멈출 때 까지는 이렇게 해야 하나.
'다이렉트로 때려박으면 난리가 나려나?'
피부 접촉만으로 바들바들 떨며 오르가즘을 느끼는데
섹스와 병행해서 직접 마력을 때려박으면 큰일이 나겠지.
익숙해 질 때 까지는 이렇게 마력을 보충시켜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마력을 밀어넣는다.
메마른 스펀지처럼 마력을 쭈우욱 빨아들이며
그 때마다 히익히익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면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여제자도 그렇고
어째 내가 근원을 건드린 사람들은 맛이 좀 간 것 같은데.
'뭔가 잘못 건드리고 있나?'
마력 흡수를 끝낸 김하은의 얼굴은 뭐랄까…
물티슈를 챙겨와서 닦아줄 수 밖에 없었다.
흘러내린 눈물과 벌게진 눈가
쌔액쌔액 가쁜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
입가에 달라붙은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죄, 죄송합니다아…."
티슈로 이마부터 뺨까지 살살 닦아주니
황송하다는 듯 손을 뻗어오는 그녀.
그러나 계속되는 쾌락에 힘이 쭈욱 빠졌는지
물티슈조차 손가락으로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뭘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블루스크린을 볼 때 느끼던 막연한 불안감.
그런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허벅지 위에 김하은의 머리를 올렸다.
이번에도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듯 몸을 꿈틀거리지만
물티슈도 못 드는 몸으로 어떻게 도망을 치겠는가.
"바로 일어나겠습니다…."
"상관 없으니 가만히 있으렴."
근원에 대해 생각하며 머리카락과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쿵쿵, 묵직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십니까, 성좌님?"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그러나 익숙한 기운.
"…들어오렴?"
들어오는 건 찰랑거리는 금발과 새파란 벽안의 미남.
전형적인 서양 미남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는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불사르는 폭군의 친위대.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죽은 여자의 오빠.